285화
【 외전 - 레이디 옌 】
땀방울이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흐른다. 힘에 겨워 바들거리는 시아의 팔 위로 힘줄 선 남자의 팔뚝이 감겨들었다.
“힘들어요?”
시아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봐줄 생각이 없는지 시아의 등에 제 몸을 밀착시키고, 그녀의 귓가에 나른한 숨을 불어넣었다.
“벌써부터 힘들면 안 되는데.”
그의 숨결에 온몸의 혈관이 확장된 것처럼 꿈틀거렸다. 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뜨겁고도 차가운, 저릿한 기류가 전신을 타고 흐르는 순간.
“아……!”
시아의 손끝에서 새하얀 빛이 피어올랐다가 피식 꺼졌다.
라크시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아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성공이네요.”
“…대부분은 이런 걸 가지고 성공이라고 하진 않지만요.”
벌써 몇 번째인가. 시아는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시아가 라크시스에게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제야 성냥불 같은 빛을, 그것도 채 일 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손끝에서 겨우 피워 올릴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시아 켈튼은 시간 여행자가 되기 전까지 평생을 비마법사로 살아왔으니까.
그뿐 아니라 시아는 아카데미에서부터 공간학, 물리학, 화학 등의 골치 아픈 학문과 함께 마법적 지식을 배워온 마법사들과는 배움의 절대적 기간에서부터 크게 차이가 났다.
게다가 마법적 성취도는 팔 할이 타고난 감각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그 감각을 최대한 끌어 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저 이론적 지식이라 하니…….
‘이래서 마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해도 아무나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 거구나.’
그럼에도 시아는 마법을 배우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비단 그녀가 이 우주의 창조신이요, 모든 것을 관장하는 초월자임에도 미숙한 실력으로 권능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시작만 벌써 한 달인데도요?”
“사람이 모든 일에 소질을 보일 순 없죠. 저처럼요.”
매사 잘난 척을 해대는(실제로도 잘나서 할 말을 없게 만든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제 남편의 콧대를 한 번쯤 눌러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말, 굉장히 재수 없게 들리는 거 알아요?”
“어쩌겠어요. 사실인데.”
라크시스는 검지를 치켜든 채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시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그녀를 서재 한 편의 작은 티테이블로 이끌었다.
이윽고 그는 섬세한 손길로 찻잎과 도기를 만지며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대마법사의 손끝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적절한 온도로 찻잎을 적셔나가자 향긋한 차향이 넓디넓은 서재를 가득 채웠다.
시아는 소파에 앉아 라크시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명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대단한 미인이 찻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르는 모습은 꽤나 보기 좋은 그림이었다. 거기다 몸에 꼭 맞는 베스트에 셔츠 소매는 대강 걷어붙이고, 목깃을 살짝 풀어헤친 차림이라니.
마법사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깨는 몸이다.
시아의 시선을 의식한 라크시스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 좀 마셔가면서 봐요.”
“내, 내가 뭘 봤다구요.”
라크시스가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며 찻잔을 들고 시아의 옆에 앉았다.
그는 최상의 상태로 우려낸 차를 시아에게 내밀며 셔츠의 단추 하나를 슬쩍 더 풀었다. 곧게 자리 잡은 쇄골 밑으로 탄탄하게 도드라진 가슴팍을 드러내며 말이다.
라크시스는 제 가슴팍을 가리키며 은근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시아의 귓가를 간질였다.
“여기, 보고 있던 거 아닌가요?”
결국 시아는 마시던 차를 그대로 뿜고 말았다.
“시아, 괜찮아요?”
“켁, 콜록, 괜, 찮아요, 켈록, 크흡.”
라크시스는 재빨리 그녀의 잔을 받아 치워주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시아는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콜록거렸다. 사레에 들린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침을 하느라 얼굴이 새빨개졌다고 둘러댈 수 있으니 말이다.
한참 후에야 시아는 겨우 기침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참상을 뒤늦게 확인한 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라크, 그, 옷이…….”
그녀가 뿜은 찻물이 라크시스의 셔츠며 베스트, 바지에 얼룩을 남기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보다 이젠 좀 괜찮아요?”
“전 괜찮은데…….”
저 하얀 셔츠에 튄 얼룩을 어쩐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자국이 남고 말 터다. 얼마 전 옷감을 새하얗게 만들어 주는 세제가 발명되었다던데, 그런 걸로 세탁해도 안 없어지겠지.
라크시스는 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는 눈치다.
제아무리 권능을 가진 초월자래도 얼룩은 무서운가 보다. 얼마 전 그가 가진 모든 옷들이 블레어 스트릿의 부티크들에서 개별주문으로 구입한 맞춤옷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시아는 저랬다.
돈이라면 남아난다고 아무리 말해도 평생을 소시민으로 살아온 시아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켈튼의 딸로 부족함 없이 자라왔는데도 말이다.
라크시스는 이윽고 베스트의 단추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라크.”
그의 길쭉한 손가락이 움직이자 셔츠 자락이 서서히 벌어진다. 서재의 책상에 대충 던져놓은 베스트 위로 사락, 소리와 함께 셔츠가 툭 떨어졌다.
시아는 비명을 삼켰다.
훤히 드러난 상체는 미술관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가 그 모습을 더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달까.
매일같이 보면서도 언제나 새롭다. 라크시스의 몸은 그런 감상을 느끼게 할 정도로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승마와 사격은 좋은 운동이구나. 조정도 마찬가지고.
참고로 그가 조정을 한 적이 있단 사실도 모든 시간 여행이 끝나고서야 알았다.
조정은 시아 켈튼의 소꿉친구인 알버트 조지 랑케(뒤늦게 안 사실인데, 놀랍게도 그녀의 소꿉친구 알버트는 라크시스가 마법으로 꾸며낸 인물이었다.)가 아카데미와 갈리프도흐 시절에 클럽에서 하던 운동이었다.
‘시아야. 잔느 강에서 열리는 이번 조정 경기, 보러 올 거지?’
학창 시절 내내 교복과 정장을 고수하던 알버트가 저렇게 팔이 훤히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고 노를 젓고 있다니. 그것도 알리나의 아들인 조지 황자가 후원하여 제국 삼대 스포츠 대회로 자리매김한, 그 유명한 조지 로열 로잉 대회에서 말이다.
새하얀 반팔 유니폼에, 땀에 젖어 이마로 자연스레 흘러내린 포마드 머리까지. 우승을 거머쥔 알버트는 시상식 직후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이 받은 황금빛 메달을 목에 걸어주었다.
‘시아야. 이건 네게 바칠게.’
‘왜, 나한테……?’
‘음, 네가 응원해 줘서 이긴 거니까?’
조정이 어디 혼자만의 노력으로 우승할 수 있는 스포츠던가? 시아가 당황한 틈을 타 궤변을 늘어놓은 알버트는 그녀에게 미리 준비한 꽃다발까지 안겨주었다.
그 탓에 시아는 연인의 경기를 응원하러 온 모양새가 되어 한순간에 이목을 끌었다.
그녀가 차려입은 우윳빛 드레스와 챙이 넓은 모자, 양산 탓에 더욱 그러해 보였다.
제국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전기 마도 시대에 유행하던 격식 있는 복장을 갖춰 입은 사람만이 조지 로열 로잉 대회를 관람할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입은 불편한 드레스가 뜻밖에도 낭만적인 광경을 연출한 것이다.
‘알버트, 사람들이 오해하겠어. 이런 건…….’
‘너와 내가 알잖아. 우린 소꿉친구일 뿐이란 걸.’
알버트는 능글맞게 웃으며 팀복인 하얀 블레이저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러곤 그녀가 앉을 자리에 손수건을 깔아준 뒤 보트에 마주 앉아 노를 저으며 유유히 잔느 강을 빠져나갔다.
시아는 이때의 알버트를 회상하며, 라크시스의 능청스러움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시아는 아마도 평생 모를 것이다. 그것이 모두 시아의 시야에서 헬릭스 황자를 떼어놓기 위한 라크시스의 노력이었음을.
알버트 랑케와 시아 켈튼이 떠난 자리에 헬릭스가 우두커니 서 있었던 건, 영원히 라크시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터다.
어느새 라크시스는 딱 맞게 입은 바지에 벨트만을 남겨둔 상태가 되어있었다.
시아는 푹 익은 토마토처럼 변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면서도 손가락 틈새로 그의 몸을 흘긋 보고 있으니.
라크시스는 피식 웃었다.
“보고 싶으면 말하지 그랬어요. 언제든 보여줄 수 있는데.”
“라크, 잠깐만요. 그, 여긴 서재예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부인?”
평화로운 아침의 따스한 햇볕이 창문을 타고 넘어와 라크시스의 머리카락이며 속눈썹에 부딪혀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의 넓은 어깨가 시아를 서서히 감쌌다. 남자의 손길이 귀부인의 허리 장식을 풀어내고 풍성한 자락을 올렸다. 소파의 다리가 마루를 긁으며 재차 끼익거렸다.
갈리프의 권능을 갖고도 여전히 와인처럼 검붉은 빛을 띠는 시아의 머리카락이 차츰 땀에 젖어 들었다. 달뜬 숨소리와 느긋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라크시스는 간헐적으로 새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말없이 입을 맞추었다.
제 아름다운 외모가 유용한 적은 많았지만, 이토록 만족스러운 적은 없었다. 라크시스는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아내를 보며, 이런 얼굴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처음으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노예 아이에게 마냥 아름답기만 한 얼굴은 그리 쓸모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얼마 안 가 시아가 소파에 축 늘어져 버렸다.
라크시스는 대체로 시아의 눈동자가 의지와 열정으로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으나, 가끔씩 이렇게 혼몽해져 풀어지듯 웃는 것도 꽤나 좋아했다. 그것이 자신으로 인해 짓게 된 표정이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얼굴을 보듬으며, 그녀의 옆에 앉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예뻐요. 레이디 옌.”
고개를 까딱일 힘도 없어 눈알만 굴리던 시아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도 그 호칭은 익숙지가 않네요.”
“결혼한 지 세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면 그건 문제인데.”
“라크, 대부분의 남편은 아내를 이름으로 불러요.”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당신을 레이디 옌이라 부르겠죠.”
시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호칭으로 절 부를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그럴걸요.”
라크시스는 시아를 안아 들고 서재 한 편에 마련된 긴 소파로 향했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정령들이 사방에서 별 가루처럼 날아들었다.
환한 대낮이라 별 가루보단 부유하는 먼지처럼 보이는 정령들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파이프에 달린 레버를 돌려 은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은 뒤, 꽉 짠 수건으로 시아의 머리카락이며 습윤한 피부를 열심히 닦아냈다.
시아는 영혼의 부스러기쯤 되어 보이는 조그마한 빛 알갱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중들 부인은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던 시아를 위해 라크시스가 세레타 지구의 저택에서 데려온 정령들이었다.
‘시대가 어느 땐데 혼자서 옷 하나 못 입겠어요?’
‘하지만 레이디 옌에겐 필요할 텐데요.’
그의 말마따나 레이디 옌에겐 요크 부인 같은 시중들 부인이 정말로 필요했다. 황실과 깊은 연을 가진, 작위를 가진 귀족 여성으로서 참석해야 할 행사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아 켈튼일 적엔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생활이었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지금껏 그녀가 켈튼의 일원으로서 참석해야 했던 행사에 제대로 참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사실 이는 양부 요르문의 배려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행사를 매일같이 다녔다면 공부를 못했을 테니까.’
정령들이 와글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시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어헤쳐졌던 드레스며 단추들이 어느덧 말끔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