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괜찮아요.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라크.”
“알잖아요? 이 세상에 제가 못 하는 일은 없다는 걸.”
결국 시아는 라크시스의 품에 와락 안겼다.
“…마지막까지 능청스러운 건 똑같네요.”
“마지막이라뇨. 새로운 시작인걸요.”
라크시스는 반 이상 투명해져, 제 손이며 재킷, 구두까지 훤히 비쳐 보이게 된 시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그녀를 안고 또 안았다.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게요. 당신이 원래 시대로 돌아간 그 순간, 당신이 눈을 뜨자마자 날 만날 수 있도록.”
지금 시아가 떠나고 나면, 라크시스는 칠십 년 후에나 그가 아는 시아 켈튼을 만날 수 있다.
그때까지는 두 번 다시 시아를 이렇게 안아볼 수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이마에 입을 맞출 수도 없을 것이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는 듯 그녀의 이마를 따라 콧잔등, 입술에 차례로 깊게 입술을 눌렀다.
“사랑해요, 시아.”
시아의 몸이 점점 투명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모든 부분이 사라진 순간.
“라크, 나도 사랑해요.”
시아는 칠십 년 후의 미래로 되돌아갔다.
* * *
3587년 6월 30일, 무더운 어느 여름날.
노을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르카나의 거리에 하나둘 불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수도 최대의 유흥가이자 정반대의 얼굴이 공존하는 저녁의 아르카나는 열기 어린 남녀와 들뜬 분위기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광룡에게 희생된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광장의 시계탑에도 조명이 켜졌다.
약 칠십 년 전, 수도 외곽의 랑케르트 영지 부근에서 나타난 광룡이 제국을 덮쳐 수십만 명이 죽고 제국의 문명이 파괴된 사건을 기리기 위한 추모탑이었다.
고대 마법사라 불리던 라크시스 옌이 광룡을 처단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고대 마법사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이후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힘을 합쳐 도시를 재건하고 희생자들을 수습했다. 그리하여 광룡이 나타난 이후 칠십 년이 지난 지금, 제국은 마도 시대의 전성기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은 광룡의 공격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데, 제 이웃과 가족이 죽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광룡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한 지역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곳이 자신의 터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단체로 유령에 홀린 것처럼 광룡의 실체를 주장하였으나, 정작 실제로 광룡을 본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신문 기사들과 거짓말처럼 잠적해 버린 라크시스 옌을 두고, 사람들은 그것들이 바로 광룡으로 인한 참사의 증거라며 떠들어댔다.
그리고 아르카나 광장을 거니는 두 남녀 사이에도 똑같은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알버트, 내가 너니까 말해 주는 거야.”
“시아 네가 시간 여행을 한다는 거 말이지?”
며칠 전, 아르카나의 분수대 앞에서 오열하던 시아 켈튼에 대한 소문이 제국 전역에 쫙 퍼지는 일이 있었다.
그녀가 칠십 년 전에 자취를 감춘 고대 마법사를 그리워한다나 뭐라나.
사람들은 시아 켈튼이 단단히 미쳐 버렸다고 수군거렸다. 평범한 상사병이면 몰라, 칠십 년 전의 사람을 애타게 찾는 게 상식적으론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아는 그녀의 오랜 소꿉친구, 알버트 조지 랑케의 연락을 받아 간만에 아르카나 거리로 나선 상태였다.
알버트는 보험사정관의 조수나 쓸 법한 안경을 고쳐 쓰며 진지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시아야, 시간 여행은 불가능한걸. 과학으로도 마도 공학으로도 불가능한 일인데, 네가 어떻게 과거로 날아갔겠어? 요즘 의술원 일이 너무 힘들어서 네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진짜라니까? 벌써 여덟 번이나 시간 여행을 했다고. 그런데도 그 사람은 결국 죽었어,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시아는 라크시스와 꼭 닮은 얼굴의 알버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결국 오열했다. 알버트는 서럽게 울면서도 자신에게 건넨 꾸깃꾸깃 접힌 편지를 받아 들었다.
[친애하는 여정의 동반자, 레이디 켈튼에게.
편지를 찾아낸 것을 축하하오. 이것은 아마 내가 당신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가 되리다.
당신의 예상대로 나는 여정의 결말을 알고 있소. 그 결말은 시간선의 주인인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순간과 일치하오.
……
수수께끼를 푼 당신에겐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니, 부디 여정을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 주시오.
추신.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당신은 이 편지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눈치챌 것이오.]
프레디 뮐러의 편지를 끝까지 읽은 알버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이 편지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르카나 시계탑을 확인했다. 3587년 6월 30일의 저녁 여섯 시 정각이 되기까지 채 오 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아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제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내가 라크를 살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시아야.”
“미안, 나 오늘 이만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나중에 보자, 알버트.”
시아는 고개를 돌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알버트가 그녀를 붙잡았다.
“시아 켈튼, 너 그렇게 라크시스 옌이 좋아? 그 사람을 위해서 네 모든 걸 포기할 만큼?”
붉어진 눈시울로 뒤를 돌아보는 시아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한때 시아는 소꿉친구였던 알버트를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라크시스와 지나치게 닮은(사실 똑같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으나,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저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이 괴로웠다.
“시아, 나는 네게 무슨 의미야?”
“알버트, 넌 친구잖아. 우린 영원히 친구로 지내자고 약속했잖아. 너는, 너는……!”
그 순간 저녁 여섯 시를 알리는 아르카나 시계탑의 종소리가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뎅―
뎅―
절규하듯 멈춰 버린 시아의 말은 이윽고 한 사람의 이름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라크.”
확장되어 있던 시아의 동공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알버트를 뿌리치려던 손길도 멈췄다.
분명 외출할 때와 똑같은 차림인데, 그녀의 셔츠며 바지는 어느새 흙이 잔뜩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종이 모두 울리는 동안 시아의 얼굴은 아까와 다른 의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뜨겁게 차오르는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가득 품은 채 시아의 볼을 타고 흘렀다.
시아는 제 소꿉친구인 알버트 조지 랑케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냈다.
수증기 낀 유리창이 닦여나가듯, 인식을 저해시키던 마법이 사라진다. 안경이 벗겨진 알버트는 어느새 그녀가 알던 라크시스 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시아의 손에서 안경이 툭 떨어졌다.
라크시스는 제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시아의 손길을 말없이 받아들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러곤 숙녀를 기다리는 신사처럼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돌아왔군요, 시아.”
“라크, 나 정말로 당신이 살아있는 미래에……. 라크, 정말 살아있는 거 맞아요? 여기가 제가 살던 시대가 맞나요?”
“그럼요. 여긴 3587년 6월의 마지막 날을 맞이한 아르카나 거리예요. 당신은 스물여덟의 의술사이고, 방금 막 마지막 시간 여행을 마쳤죠.”
시아는 라크시스의 손을 잡을 생각도 못 하고 펑펑 울었다. 평생 흘릴 눈물을 오늘 죄다 쏟아 버리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달라진 3587년의 풍경과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새로운 스물여덟 해의 인생을 훑어나가다, 라크시스의 기가 막힌 거짓말을 알아차리곤 울던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어떻게 나한테 소꿉친구라고 거짓말할 수 있어요?”
“거짓말 아닌데. 이번 생의 당신에게 난 정말로 소꿉친구였다고요. 아카데미부터 갈리프도흐까지 줄곧 우린 친구였어요.”
“설마 헬릭스 전하를 라크가…….”
마도 시대에서 내내 미래의 헬릭스 황자를 질투하더니, 결국 라크시스는 헬릭스가 시아에게 접근하는 일을 완전히 막아버린 모양이다.
그것도 소꿉친구라는 어마어마한 위치를 이용해서 말이다.
“글쎄요? 전 그저 당신과 어릴 적부터 친구가 되었을 뿐인데, 황자가 왜 여기서 등장하는지 모르겠군요.”
라크시스는 능청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자신의 재킷을 벗어 시아의 어깨에 둘렀다. 시아는 그제야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꾀죄죄한 몰골인 자신을 사람들이 흘긋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라크, 저 때문에 옷이 더러워지겠어요.”
그러나 라크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그의 입술이 시아의 이마를 타고 콧잔등, 입술에 차례로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라고. 당신이 원래 시대로 돌아온 그 순간, 당신이 눈을 뜨자마자 날 만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러곤 라크시스는 마도 시대에서처럼 시아의 손을 자신의 팔 위에 얹었다.
“시아, 이젠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지 않아도 돼요. 당신 앞엔 나와 함께하는 미래밖에 없으니까요.”
“…라크.”
라크시스는 남은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푸른 사파이어 반지를 꺼냈다.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파르르 떨고 있는 시아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약혼반지를 끼워주었다.
“앞으로는 두고 다니지 말아요. 매일 이 반지를 보며 날 생각해 주기로 했잖아요.”
“이걸 어떻게…….”
“약혼식장에 떨어뜨리고 갔더군요. 아무래도 이 반지는 당신의 시간 여행을 따라가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실크 장갑을 낀 손가락 위에 반지를 껴두어서 미끄러져 빠진 모양이었다. 시아는 자신이 약혼반지를 떨어뜨리고 간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정신이 없었겠지. 마지막 시간 여행을 위해 그녀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말이다.
라크시스는 처음 반지를 받았던 때처럼 하염없이 반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시아를 향해 싱긋 웃었다.
“남은 이야기는 저택으로 돌아가 천천히 풀어볼까요?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시아는 라크시스를 올려다보며 눈매를 둥글게 접었다.
“그래요.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으니까.”
라크시스는 숨을 삼켰다.
곱게 접힌 눈매 속, 노을에 물든 시아의 눈동자가 황혼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여행을 마친 자의 눈만이 지닐 수 있는 저 아름다운 반짝임을 보라.
라크시스는 환희로 가득한 시아의 눈동자에 오로지 자신만이 가득 담겨 있다는 사실이 못내 기뻤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충만한 사랑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앞으로도 두 사람의 눈동자엔 서로만이 담겨 있으리라.
이 모든 건 시아 켈튼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도래해야만 했던 종말을 막고, 죽었어야만 했던 고대 마법사를 살려 운명의 궤도를 비트는 데 성공한 단 한 명의 시간 여행자가 만든 기적.
라크시스는 제 운명을 바꾸어 준 시아의 손등에 경외와 존경을 담아 키스를 하며 말했다.
“갈까요. 나의 레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