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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83)화 (283/292)
  • 283화 

    카얄의 가슴께에서 동그랗게 솟아나 바깥으로 나온 어둠이 키득거렸다.

    - 와우, 너 정말로 모든 것을 되돌렸구나?

    “그럼.”

    - 고생했네. 나의 형제여.

    작고 검은 토끼의 모습으로 시아를 몇 번이고 돌아보던 어둠은 인사를 하듯 귀를 쫑긋거리곤 천칭의 접시 위에 올랐다.

    이윽고 어둠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더니, 반대편 접시 위로 거대한 빛의 권능이 나타났다.

    고대 마도 시대, 미옌이 어둠의 권능을 얻기 위한 거래의 대가로 천칭에게 바쳤던 갈리프의 권능이었다.

    그때, 라크시스가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시아……!”

    라크시스는 심장께를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몸에 봉인된 어둠의 힘이 천칭에 의해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를 받쳐 제 품에 편하게 뉘었다.

    “라크. 내가 도와줄게요. 숨을 천천히 쉬어요.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이윽고 라크시스의 가슴팍에서도 작은 어둠 덩어리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사도들의 봉인에 비하면 확연히 작은 크기의 어둠이었다.

    반쪽짜리 사도의 몸으로 광룡을 막아보겠다고 노력한 결과가 바로 이 아홉 번째, 마지막 봉인이겠지.

    “다 라크 덕분이에요. 라크가 아니었다면 전 마지막 시간 여행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린지, 큭, 지금 제 몸에서 왜 이런 게 나오는 겁니까.”

    라크시스는 기생충이라도 본 것처럼 제 가슴에서 빠져나오는 검은 덩어리를 질색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마치 심장에 벌레가 끼어 있었던 것 같은, 흐.”

    - 뭐래, 나도 그동안 네 안에서 지내는 거 별로였거든? 네가 죽어 버릴까 봐 아무것도 안 먹고 얼마나 얌전히 있었는데.

    검고 반질거리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던 토끼 모습의 어둠이 새카만 혀를 메롱, 하고 내밀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몸에서 나온 어둠을 천칭의 접시 위에 올려 보냈다. 그러곤 돌려받은 빛의 권능을 그녀가 흡수하는 대신 라크시스의 텅 빈 심장 안으로 흘려보냈다.

    “제가 시간 여행을 할 때마다 늘 라크 곁으로 오게 된 이유가 이거였네요. 라크가 마지막 봉인이었으니까, 당신이 계속해서 날 불렀으니까.”

    검어지려던 그의 머리카락이 도로 은빛으로 빛났다. 전에 없던 마력과 권능으로 호흡에 안정을 되찾은 라크시스는 시아의 무릎에 누워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시아를 올려다보았다.

    영영 떠오르지 않아 제겐 없다고 믿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둠이 기억의 둑을 막고 있기라도 했었던 양, 어둠이 빠져나가자마자 떠오르는 주마등 같은 과거에 라크시스는 손을 파르르 떨며 시아의 뺨을 붙들고 하염없이 쓸어내렸다.

    “…갈리프, 시아 켈튼.”

    “네, 제가 당신의 갈리프이자 시아 켈튼이에요.”

    “처음부터 당신이었어. 나의 구원자, 나의 신…….”

    라크시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내겐 지금의 당신뿐이야. 시아 켈튼, 당신뿐이에요.”

    시아는 뭉클해진 감정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와중에도 라크시스는 시아가 한때 초상화 속 여인을 신경 썼다는 것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라크. 이젠 일어날 수 있겠어요?”

    라크시스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천칭이 떠나가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날아올랐던 흙먼지가 도로 가라앉고, 쓰러졌던 사람들이 서서히 깨어나며 단체로 악령에게 홀렸다며 웅성거리기 시작할 때였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부축해 일으키곤 카얄에게 다가갔다.

    찬란하던 사도의 금발은 빛을 잃고 검게 물들어 있었다. 칠십 년 후의 미래에서 봤던 모습과도 확연히 달랐다.

    ‘정말로 힘을 잃었구나.’

    카얄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저가 죽이려 들었던 노예 아이와 똑같은 모습이 된 자신을 조소하고 있었다.

    “…왜, 이 꼴이 된 날 보니 통쾌하나? 이젠 날 어떻게 할 셈이지? 예전처럼 어둠에 처박기라도 할 건가?”

    “카얄. 난 네 창조주도, 주인도, 부모도 아니야. 네가 알던 갈리프도 아니지. 하지만 널 저버리지 않을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카얄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시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엔 체념이 서려 있었다.

    시아는 그를 이해한단 얼굴로 마지막 한 마디를 토해 내듯 뱉었다.

    “네가 저지른 짓은 인간의 잣대로 심판받아. 네가 네 잣대로 인간을 심판했듯, 이번에는 네 죄를 그들에게 심판받도록 해.”

    프리드리히와 모여든 사람들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거대한 운석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자리에 운석이 없었던 것도 놀라운데,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세 사람이 고대 마법사와 그의 약혼녀인 레이디 켈튼과 이름 모를 남자라는 사실에 경찰은 까무러칠 뻔했다.

    “경관님. 이 사람이 황혼 국교회의 진짜 수장인 발자크 로스예요.”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주를 이용해 신도를 모으고, 재키 레이븐이 메이덜린의 여자들을 죽이도록 조종했어요. 이 남자가 유령선으로 노예를 매매해 저주의 제물로 쓰고, 붉은 옷의 강령술사로 하여금 제국 전역에서 사람들을 납치하도록 한 사람이에요. 맨덜랜드 사태를 일으켜서 도시를 불태우고, 오늘 이 자리에서 할켄타인 소공작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져 암살을 사주한 장본인이 이 남자라고요.”

    폭탄과도 같은 시아의 발언에 경찰들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상관이 불호령을 내리며 명령했다.

    “뭣들 하고 있어, 당장 체포해!”

    라크시스와 시아의 도움으로 구덩이에서 카얄을 끌어낸 경찰들은 현장에 도착한 호송용 증기 마차에 카얄을 밀어 넣었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 카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참으로 너답군. 시아 켈튼.”

    시아와 라크시스는 카얄을 태우고 멀어져가는 증기 마차의 꽁무니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마차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지자, 라크시스는 시아의 어깨를 감싸며 입을 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어둠의 힘도, 저주를 벌일 힘도 모두 잃었으니 카얄은 아마 앞으론 버티기 힘들 겁니다. 신체에 무리가 가해지면 인간처럼 죽어 버릴지도 모르죠.”

    “괜찮아요. 카얄이 죽으면 제가 그의 영혼을 인도할 거니까.”

    시아는 라크시스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갈리프의 기억을 잠깐 엿봤는데요, 카얄도 처음부터 나쁜 사도는 아니었더라고요.”

    무더운 여름의 공기를 뚫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땀에 젖은 시아의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흘러가는 바람이 모든 열기를 진정시키듯 대지를 길게 훑었다.

    쏴아아―

    녹음이 우거진 숲이 풀잎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더 이상의 소란도, 갈등도 없다.

    이젠 정말로 끝이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정이 마침내 끝났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기쁨,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뒤섞인 웃음이었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며 천천히 떨어져나왔다.

    라크시스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굳어있었다.

    “시아, 지금 당신 몸이…….”

    시아의 몸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는 홀씨처럼 그녀의 몸도 이 시간대에 정착하지 못해 어디론가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시아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저 고요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라크, 전 이제 돌아가야 해요.”

    “돌아간다뇨, 어디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이곳으로 아예 온 것 아니었나요? 설마 칠십 년 후로 되돌아간다는 건 아니겠지요……?”

    라크시스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야 겨우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왜 다시 떠나간단 말인가.

    그러나 시아는 그녀의 뺨에 다가오는 라크시스의 손을 가만히 떼어내며, 위로하듯 그의 손등을 가만히 도닥였다.

    “라크. 당신이 만난 전 요르문 켈튼의 양딸이자 스물여덟의 의술사이자, 동창회 날 우연히 미래가 적힌 일기장을 손에 넣으며 시간 여행을 시작한 사람이었어요.”

    떠나기 싫은 건 시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반드시 떠나야만 했다.

    “제가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선 전 반드시 제가 살아왔던 삶을 그대로 살아가야만 해요.”

    그랬다. 시아 켈튼이 모든 봉인을 찾고 라크시스 옌의 죽음을 막는 이 시점에 도달하기 위해선, 시아 켈튼에게 지금까지 그녀가 겪었던 일들이 모두 그대로 일어나야만 한다.

    마도 시대를 지나 오십 년 후에 그녀가 요르문의 양딸로 입양이 되고, 라크시스가 사라진 역사를 배우며 자라나, 칠십 년 후의 갈리프도흐 동창회에 참석해 미래가 적힌 일기장을 받고 시간 여행을 시작하는 일들까지 전부 그대로 말이다.

    이것이 뒤틀리는 순간 시아의 시간선은 타임 패러독스를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거나, 또다시 새로운 시간선의 가지를 피워낼지도 몰랐다.

    “…그렇다는 건 당신은 또다시 시간 여행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라크가 알고 있는 시아 켈튼이 되려면 아마도 그래야겠죠?”

    시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회전목마처럼 돌고 도는 시간의 굴레를 돌다 벗어나는 것은 갈리프이자 시아 켈튼인 자신의 운명일 터. 회전목마에서 내리기 위해선 결국 회전목마에 다시 타야만 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간선엔 더 이상 평행세계의 갈리프가 없잖아.’

    수국관에서 갈리프를 만나 분신의 존재를 깨달았던 일이나, 갈리프도흐 중앙 홀에서의 마지막 여행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미래가 적혀 있던 갈리프의 일기장은 어디로 간 거야?

    시아가 그런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동안, 라크시스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피식 웃고 말았다.

    “왜 그래요, 라크?”

    “요르문은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당신을 수양딸로 맞이해야만 하겠네요.”

    시아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님을 딸로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애원하는 요르문의 모습이 떠오르고 만다.

    시간선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가족관계를 희생하게 될 요르문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시아는 한참이나 키득거렸다.

    라크시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진지한 척 대답했다.

    “큰일이군요. 아무것도 모를 어린 시아 켈튼을 데려다 키우게 될 요르문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요르문만 큰일이겠어요? 죽음을 피한 대신 라크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요.”

    라크시스의 표정이 찰나 심각해졌다.

    “생각할 게 갑자기 많아지는군요. 당신이 시간 여행을 시작하려면 광룡도 있어야 하고, 종말도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봉인을 찾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라크시스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시아의 고민도 깊어져만 갔다.

    라크시스가 죽는 미래의 시간선을 끊어내면서 시아는 자신의 스물여덟 인생의 시간선도 끊어버렸다. 자신은 과연 의술사 시아 켈튼으로, 레이디 시아 켈튼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갈리프의 과거와 권능을 이어받았으니 초월자로서 우주 안이든 밖이든 어딘가를 부유하며 살아갈 순 있겠지만…….’

    뿌리가 끊어진 ‘인간’ 시아 켈튼의 인생을 앞으로도 무사히 이어갈 수 있을까? 칠십 년 후의 새로운 뿌리에 그녀의 삶을 무사히 접붙일 수 있을까?

    자신은 시아 켈튼으로서 라크시스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라크시스는 그녀의 고민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눈빛으로 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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