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요르문.”
“알았어, 알았다고.”
라크시스의 바로 옆에 있던 로드 켈튼은 라크시스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다 알겠다는 듯 툴툴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고맙네. 뒤를 부탁하지.”
고대 마법사의 발밑에 푸른 바람이 고여 들었다. 그 말인즉, 그가 지금 공간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옌 경, 지금 어딜 가는 건가! 이 사태를 해결하고 가야지, 손님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고 가면 어떡하나!”
차탈은 다급히 약혼식의 주인공을 붙잡았으나, 고대 마법사는 홀연히 떠나가 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차탈이 바보처럼 허공에 손을 휘적이자 요르문이 그를 붙잡아 주며 조용히 말했다.
“전하. 라크를 붙잡지 마세요. 지금 녀석은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으러 갔으니까.”
* * *
시아가 떨어지며 만든 거대한 구덩이의 안.
라크시스는 서럽게 울며 제게 안겨든 시아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당신이 있던 곳엔 제가 없던가요.”
“그래요, 흡, 이 거짓말쟁이, 날 기다려 준다고 해놓고선 죽어 버렸다고요. 끝까지 사람들을 지키다가, 정작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흐흐흑…….”
시아는 자신이 칠십 년 후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숙녀와 거리가 먼 미래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어째서 그녀의 옷에 피가 묻어 있는 걸까.
“미안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당신을 이렇게 울게 만들다니…….”
“진짜 미워요, 라크가 미웠어요. 칠십 년 후에서 만나자고 했으면서 대체 왜 그랬냐고요. 난 라크만 있으면 상관없었는데, 당신만 있으면 상관없었는데…….”
라크시스는 악몽을 꾸다 깬 사람처럼 자신을 찾는 시아를 보고 그녀가 겪은 일을 짐작하고 말았다.
“시아. 종말이 일어났었나요?”
그 말에 시아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먼지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시아의 눈동자엔 굴곡진 세월이 아련한 빛을 띤 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종말보다 더한 일이 있었죠. 서대륙과 제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었거든요.”
라크시스는 그제야 시아가 낙하한 이곳이 바로 프리드리히의 증기 마차가 지나가기로 했던 지름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방의 소란에서 테러범을 잡았다는 고함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곳에서 할켄타인 소공작이 죽을 운명이었구나. 그의 죽음을 빌미로 전쟁이 일어났던 거였어.’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면 라크시스는 아마도 몸을 사리지 않고 그들을 구하려 했을 것이다.
평소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는 그였으나, 사도라 불리며 살아온 탓인지 라크시스는 사람들의 참혹한 죽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리고 난, 그들을 지키려다 죽었던 거였겠지.’
광룡을 막다가 죽었던, 시아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미래처럼 말이야.
그러나 시아는 모두를 구했다. 라크시스뿐 아니라 전쟁으로 죽고 다칠 죄없는 목숨들까지 전부.
라크시스는 침음을 삼키며 시아의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시아. 당신이 미래를 바꿨군요.”
“과거를 바꾸고, 다가올 미래도 바꿨어요. 당신이 없는 세계에서, 당신이 존재하는 세계로. 라크 당신 하나를 살리기 위해 내가 또다시 시간 여행을 했다고요.”
“하지만 저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의 삶도 구해 낸 거잖아요.”
“맞아요, 내가 흑, 다 바꿨어요. 내가 이 우주의 운명을 비틀었어, 당신의 운명을 움직였다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시아의 오열에 라크시스의 속도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열기 어린 속삭임을 토해 냈다.
“…고마워요.”
울음을 삼키던 시아가 히끅거리며 되물었다.
“정말로, 고마워요?”
“진심으로요.”
시아와 라크시스는 끌어안은 채로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먼지와 눈물로 엉망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에겐 서로의 모습이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또 사랑스러워 보였다.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힌다.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침묵 속에 오가는 것은 오로지 뜨거운 열기뿐.
이윽고 시아와 라크시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맞부딪혔다.
“어머나! 저길 좀 봐요!”
떨어진 별을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이 세기의 약혼식 주인공들의 키스를 목격하고 환호성을 보냈다.
한발 늦게 사고 현장에 도착한 프리드리히는 시아와 라크시스의 진한 입맞춤에 서글프게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소공작님, 괜찮으십니까?”
“그럼. 괜찮고말고.”
프리드리히의 보좌관은 주인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시아와 라크시스의 기나긴 입맞춤을 곁눈질로 구경했다.
저런 것이 진짜 사랑이로구나. 보기만 해도 마음의 크기를 알 수 있는, 바로 저런 것이 진짜 사랑이로구나.
프리드리히만 아니었으면 보좌관도 다른 사람들처럼 박수를 쳤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였다.
“레이디 켈튼, 조심해요!”
프리드리히가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순간, 모여든 사람들도 전부 느낄 수 있을 만큼 싸늘한 공기가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며 시아와 라크시스가 있는 구덩이 안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예리한 날붙이가 햇살에 번쩍였다.
“갈리프으으―!”
라크시스가 채 뒤를 돌아보기도 전이었다.
찰나 모습을 드러낸 괴한이 라크시스의 등에 칼을 꽂아 넣었다.
라크시스의 등을 타고 시아에게 강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괴한은 라크시스의 등에 칼을 박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섬뜩하고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칭 조각에 심장을 찔린 노예 아이. 그리고 노예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화들짝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뜬 갈리프의 표정까지.
곧 노예 놈의 심장에 봉인되어 있던 마지막 어둠이 천칭 조각에 찔린 곳을 통해 빠져나갈 것이다.
그럼 노예 놈은 다른 형제들처럼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겠지. 갈리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질 테고. 비록 프리드리히는 죽이지 못했지만, 이만하면 갈리프의 소중한 것을 빼앗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주 완벽한 복수다.’
괴한, 즉, 카얄은 숨을 죽이고 갈리프가 처절하게 부르짖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갈리프의 놀란 눈은 도로 그대로 돌아왔고, 이윽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뭐, 뭐야.”
“또 만나네, 카얄.”
갈리프, 즉 시아 켈튼은 제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엔 카얄이 준비한 것과 똑같은 천칭 조각이 들려 있었다.
닫힌 우주에선 동일한 두 물질이 동 시간대에 존재할 수 없다.
카얄은 그제야 라크시스를 찌르려던 제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젠장, 젠장, 젠장!”
카얄은 욕설을 뱉으며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오래전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의 창에 꿰뚫렸던 것처럼 아주 강렬한 고통이 그의 목덜미를 옥죄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큭!”
라크시스가 카얄의 멱살을 잡아챈 것이다. 카얄은 라크시스의 손에 매달린 채 공중에서 볼썽사납게 버둥거리며 켁켁거렸다.
시아는 카얄에게 조각을 보이며 조용히 되물었다.
“이걸 찾아?”
“갈리프, 큭!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악!”
라크시스는 카얄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고대에 광룡이 되었다 실패한 후로 카얄의 몸엔 술자를 지켜줄 마력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 저 대신 저주로 마력을 모아다 줄 이단도 없는 상황이라, 카얄은 평범한 인간처럼 내동댕이쳐진 충격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시아는 바닥에 내던져진 채 고통에 헛기침을 하고 있는 카얄 앞으로 다가갔다.
“네 걸 빼앗은 건 아니야. 이 우주가 하나의 시간선 위에서 똑같은 조각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은 것뿐이지.”
“제기랄, 그러니까 네놈의 말은……!”
카얄은 그제야 시아 켈튼이 어떻게 천칭 조각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저 여자가 들고 있는 건 미래에서 가져온 천칭 조각이었다.
시아는 그를 안쓰럽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조용히 선고했다.
“이젠 인정해. 넌 여기서 끝이야.”
그러자 숨이 막혀 빨개졌던 카얄의 얼굴에 서서히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끝? 하! 내가 끝이라고? 당신은 여전히 오만하고 방자하군! 이러니 당신이 만든 세계도 위선적인 거야, 당신이 감히 내게 끝을 운운해? 감히 당신이?”
“…끝이라.”
발악하며 난동을 부리는 카얄의 위로 시아의 무거운 마력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사지가 결박된 카얄이 악을 쓰며 마력에 저항하는 가운데, 시아는 그런 카얄의 앞에 천천히 쭈그려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래, 난 이미 네가 만든 끝을 보고 왔지. 갈리프에게 절망을 안겨주려던 계획이었다면 굉장한 성공이었어. 수많은 사람들도, 라크시스도 네가 벌인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그런데 미래의 네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복수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고 했어.”
놀라서 굳어버린 카얄의 앞에서 시아의 담담한 고백은 계속 이어졌다.
“모든 걸 후회한다고 했어. 사랑하는 형제들과 함께 영혼을 인도하던 사도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었지.”
그러자 카얄의 붉은 눈동자가 불현듯 물 막으로 뒤덮였다.
“…헛소리 집어치워. 당신이 뭔데 함부로 지껄여.”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카얄은 발악하는 대신 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시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시아 켈튼이기만 했다면 카얄을 죽일 듯이 미워했을 텐데. 그러나 지금의 시아에겐 갈리프의 기억들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의 기억과 감정을 엿보고 나니 차마 카얄에게 모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뭘 안다고 너에 대해 말하겠어. 난 네가 아는 갈리프가 아닌데. 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네가 무슨 심정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데.”
시아는 천천히 일어났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잠, 잠깐만, 안 돼, 멈춰! 갈리프, 당장 멈추라고!”
사지와 몸통이 흙더미에 붙어버린 채 카얄은 고개만 들곤 다급히 소리쳤다. 시아가 천칭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천칭의 일부인 쇳조각을 하늘을 향해 들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시아와 카얄, 라크시스만이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존재가 대지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곧 광활한 접시가 이리저리 기우는 소리가 났다.
천칭의 도래는 물리적인 접근이 아닌, 의식에의 접근이라 운석 낙하지점으로 모여들었던 평범한 사람들은 기이한 고양감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천칭이 대지 위에 내려앉았다. 시아의 손에 들려 있던 쇳조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잃어버린 조각이 돌아왔구나.
웃음기 어린 맑은소리가 관자놀이를 왱왱 울렸다.
시아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눈을 감고 천칭에게 청했다.
“천칭이여, 빛과 어둠이 본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게 해주소서.”
이윽고 카얄에게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오래전 그가 가져갔던, 오토마톤의 심장 속에 봉인되었던 어둠의 힘이 천칭에 의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