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81)화 (281/292)

281화 

시아는 미친 듯이 달렸다.

몇 걸음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지점이었는데, 생각보다 멀어 죽어라 뛰어야만 했다. 하위 차원의 우주에서 태어난 존재의 한계였다.

시아가 헉헉거리는 와중에도 기존의 시간선은 새로운 가지를 도로 흡수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치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려 하는 가능성들이 불쾌한 것처럼 말이다.

겨우 고개를 든, 라크시스가 살아남는 미래의 시간선이 힘없이 사라지려고 하는 찰나.

“여기야……!”

시아는 새로이 자라난 시간선 속에 몸을 던졌다.

와그르르―!

그녀가 끼어든 탓에 별들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천, 수만, 아니,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구잡이로 펄럭이는 셔츠 자락과 머리카락 때문에 반쯤 가려진 시야의 틈새로 눈부시게 빛나며 산화하는 별들을 지켜보던 시아는 자신이 지나온 자취를 따라 시간선이 찢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새로운 시간선이 자라고 있어……!’

라크시스가 죽게 되는 기존의 시간선은 차량을 잃어버린 열차처럼 과거로 이어지는 꼬리가 끊긴 채 차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부유하고 있었다.

대신 시아가 끼어든 지점에서부터 자라난 시간선이 새로운 큰 줄기가 되어 다시금 구구구구, 하는 울림과 함께 차원 너머의 세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간선 속으로 떨어지는 시아의 양옆으로 사계의 풍경과 수많은 밤과 낮, 희로애락의 웃음과 울음소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시아는 자유 낙하하는 깃털처럼 과거를 가로지르며 기묘하고도 환상적인 차원의 세계를 눈에 담았다.

우주를 벗어나 차원 너머의 세계에서 시간선 위를 달리는 것은 인간의 몸으로도, 신의 몸으로도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일이리라.

그러나 두 번 다시 겪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일은 평생 한 번이면 족해.’

그녀의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일부를 발견한 갈리프의 마력이 요동치는 것이었다. 라크시스에게 넘겨준 사도의 마력이 갈리프를 감지하고 반응한 것일 터다.

시아는 별똥별처럼 마찰을 일으키며 대기권으로 떨어졌다. 환한 대낮에 떨어진 나그네별을 알아볼 자가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시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라크시스만은 자신을 알아보리라는 것을.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는 대지에, 시아는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자신이 떨어질 곳을 지켜보았다.

그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약혼식 날, 할켄타인 소공작이 마차 사고를 당했던 지름길이었다.

‘…내가 바꾸어야 할 과거가 이 지점이라고?’

그때, 폭탄을 꼭 쥐고 가로수 뒤에 숨어서 저 멀리서 다가오는 프리드리히의 마차를 지켜보고 있는 테러범이 보였다. 아직 프리드리히의 마차가 테러범과 가까워지려면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한다.

그녀가 바꾸어야 할 과거는 아마도 전쟁의 시발점을 차단하는 것.

그러나 라크시스는 스칼렛의 총을 맞고 쓰러졌었다. 어지간한 부상에도 끄떡없던 고대 마법사가 고작 총알 하나에 쓰러졌단 건, 스칼렛이 총에 무슨 수작을 부렸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라크시스를 살리기 위해선 스칼렛을 저지해야 하는 게 아닐까? 프리드리히를 살리는 게 아니라?

대지와의 거리가 아직 충분한 지금이라면 몸을 슬쩍 틀어 랑케르트 성 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시아는 몸을 틀지 않았다. 그녀가 낙하하고 있는 바로 저 지점에서 아주 강렬한 끌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차원 너머의 세계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시간선 위에서 느꼈던 바로 그 끌림 말이다.

‘그래, 이 느낌이야. 시간 여행의 도착지가 가까워지는 느낌이 이거라고……!’

시아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시아와 마찰하게 된 공기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그녀의 낙하를 알렸다.

뒤늦게 운석을 발견한 테러범이 허둥지둥 도망치고, 프리드리히가 탄 증기 마차도 서둘러 멈췄다.

그렇게 시아가 지면에 충돌하여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오른 순간.

뎅―

돌연 아르카나 광장 시계탑의 종소리를 닮은 미지의 깨달음이 그녀의 뇌리를 울렸다.

광활한 우주. 운명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간다. 수조 개의 톱니바퀴에서 철컥이는 소리가 귓가에 포화처럼 쏟아붓는 것만 같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에 놀란 인근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웅성거리기 시작했으나, 시아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은 오로지 정적뿐.

길고 긴 고요 끝에 마침내 우주의 시곗바늘이 처음으로 째깍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새로운 시간선이 그녀가 살던 우주를 관통하여 완전히 정착한 것이다.

이런 기분을 또 언제 느껴봤었더라.

거대한 구덩이 속에 떨어져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시아는 푸르른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래, 지금까지의 시간 여행이 모두 이러했었지.’

어째서 시간 여행을 할 때마다 시야가 하얗게 변하고 정신을 잃게 되었던 것일까. 시아는 시간 여행의 진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시간 여행이란 우주 밖 철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은 한낱 인간의 눈으로 감당할 수 없는 차원 너머의 광경을 목도했기에 매번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떨어진 별이 만든 거대한 구덩이의 가장자리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시아는 뒤늦게 몰려온 전신의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라크시스는 살았을까?

약혼식이 이루어진 랑케르트 성은 프리드리히의 마차가 사고를 당한 이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걸어가려면 멀겠지만, 지금의 시아에겐 라크시스를 능가하는 마력이 있었다.

공간이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람.

마법을 배운 적이 없으니 쓸 줄도 모른다. 시아는 허탈한 웃음을 툭 뱉으며, 랑케르트 성까지 어떻게 걸어가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구덩이 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하늘을 등지고 저를 내려다보는 밀 알갱이 같은 얼굴들을 어떻게 뿌리치고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시아.”

그토록 그리워하고 간절히 원했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포마드로 멋들어지게 넘긴 머리는 죄다 흩어져 산발이 되고, 가슴팍에 꽂아둔 부토니에는 어디에 버리고 왔는지 꼴이 엉망이었지만.

“…정말로 살아있잖아.”

라크시스 옌은 살아있었다.

시아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라크시스를 끌어안았다.

* * *

해가 중천에 뜬 환한 낮에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은 아주 잘 보였다.

운석이란 게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 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태양 빛을 이길 만큼 발광하며 떨어지는 운석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3522년의 마도 시대. 시아 켈튼과 라크시스 옌의 약혼식에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머, 저길 좀 보세요! 대낮에 별똥별이라니, 신기하지 않아요?”

“두 사람의 약혼을 하늘도 축하하나 봐요. 어쩜 이리 낭만적일까!”

한 귀부인이 탄성을 터뜨리자 약혼식장에 모여든 손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외쳤다.

그러나 라크시스를 비롯한 대마법사들의 반응은 달랐다.

저건 단순한 운석이 아니다.

떨어지는 운석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이고도 익숙한 마력에 요르문이 헐레벌떡 라크시스에게 달려와 속삭였다.

“라크, 자네도 느꼈지? 저건 누님과 똑같은 마력이야. 설마 우리가 못 찾았던 봉인이 아직 남아있었던 건…….”

“…그녀다.”

“뭐?”

기껏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녀라니. 요르문이 인상을 찌푸리며 라크시스에게 되물으려는데, 그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아 말문이 막혔다.

뒤이어 라크시스가 내뱉은 말은 요르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시아의 시간 여행이 시작된 거야. 그녀가 미래에서 온 거라고.”

“라크, 잠깐만. 네 말은 그러니까, 지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저 별이 누님이라는 소리야? 하지만 봉인은 다 찾았다고 했잖아. 누님이 어떻게 시간 여행을 또 하겠냐는 말이야. 게다가 누님은 지금 네 옆에…….”

요르문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없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새하얀 약혼식 드레스를 입고 라크시스의 곁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던 시아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저 멀리 창공을 가르고 떨어지는 별이 정말로 누님이란 말인가?

그때 약혼식장의 반대편에서 귀부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악! 여기 총을 든 여자가 있어요!”

새빨간 드레스 차림으로 라크시스의 옆자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던 스칼렛이 떨어지는 별을 멍하니 지켜보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들키고 만 것이었다.

저런 붉은 옷차림을 하고 와 놓고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다. 아마도 인식 저해 마법이나 저주를 이용해 이목을 끌지 않고 약혼식장에 잠입했을 터였다.

라크시스는 총을 들고 당황해 버둥거리는 스칼렛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스칼렛은 시아를 쏘려고 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아는 라크시스의 곁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는 건, 시아는 모든 걸 알고 미래에서…….’

라크시스의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갔다. 그때, 약혼식장 저편에서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놔, 이거 놔!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거야!”

“스칼렛 포드!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여기까지 온 거지? 병원에선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약혼식의 손님으로 참석했던 슈나이더가 스칼렛을 발견하고 놀라며, 곧바로 그녀를 체포했다. 제압당한 스칼렛은 테이블에 엎어져 발악을 하다 수갑이 채워지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해밀턴 경장. 당장 갈리프도흐 병동에 연락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살인마가 밖으로 나돌아다니게 두었는지 말이야.”

“넵, 알겠습니다.”

해밀턴 경장은 바짝 얼어붙어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소란을 듣고 찾아온 차탈의 표정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무장관으로서 슈나이더를 비롯하여 하객으로 참석한 경찰들에게 스칼렛 포드의 탈주를 가지고 한바탕 쓴소리를 퍼부은 후였다. 아마 한동안 모르간 전역의 경찰들은 야근을 피할 수 없게 될 터였다.

차탈은 이미 공쳐 버린 약혼식을 보고 혀를 차며 라크시스에게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고대 마법사가 레이디 켈튼과의 약혼식을 얼마나 기대했던가. 이 두 남녀와 그리 관계가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황혼 국교회로 인해 함께 고생한 정이 있기 때문일까. 차탈은 시아와 라크시스의 약혼식만큼은 잘 되길 빌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스칼렛 포드가 약혼식장에 나타나다니,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일인가.

“옌 경, 이게 무슨 일인지, 원.”

“대공 전하. 황제 폐하께선 무사하십니까?”

라크시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황제의 안부에 차탈은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 여기까지 와서도 신사 노릇을 하지. 호위가 몇인데 황제가 위험할 리가 있을까.

“무사하고말고. 자네 걱정이나 하게. 애초에 저 여자가 여기에 나타난 건 자네나 나나 레이디 켈튼을 노린 걸 텐데. …응? 레이디 켈튼은 어디 갔나? 벌써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 건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황제 폐하께는 인사를 못 드려 죄송하다고 말씀을 전해 주시지요.”

“옌 경, 지금 대체…….”

황제의 안부를 왜 묻나 했더니……. 차탈은 그제야 라크시스의 기색이 이상하단 걸 눈치챘다. 라크시스는 홀로 최후의 전쟁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비장하고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운석이 떨어진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