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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80)화 (280/292)
  • 280화 

    갈리프가 가엾게 느껴졌단 그의 말은 진심인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시아는 그것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가엾다면서, 그녀를 총으로 쐈다고?

    저 멀리 중앙 홀의 기둥 뒤에서 흘러나온 피가 벌써 웅덩이를 이뤘다. 저 정도 출혈이면 이미 쇼크로 죽었을 터다.

    “그래서 난 맹세했지. 앞으론 갈리프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해 살아가겠다고. 나의 창조주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지켜보기 위해 살아가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지금 네 입으로 갈리프를 용서했다면서, 갈리프를 쏴버린 거야? 죽음을 지켜본다느니 하는 번지르르한 말 따위… 결국 넌 그냥 갈리프를 죽이고 싶었던 거잖아.”

    시아는 바락 외쳤다. 그러나 카얄은 제자리에 선 채로 섧게 미소 짓기만 할 뿐이었다.

    “못 믿겠으면 가봐. 물론 이 우주가 너희 둘을 만나게 두진 않겠지만.”

    카얄에게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시아는 곧바로 일어나 갈리프에게로 달려갔다.

    갈리프는 죽었겠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총을 맞은 갈리프가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론 이기적인 생각이 먼저 들고 만다.

    나, 다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시아가 기둥 뒤로 돌아가 갈리프를 마주하기 직전,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밭은 숨과 함께 들린 가느다란 목소리가 시아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시아 켈튼. 거기에서 들어줄래?”

    “…갈리프. 아직, 살아있구나.”

    시아는 주춤거리며 물러서다 이어진 갈리프의 말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시간선의 주인이 된 걸 축하해. 이젠 네가 정말로 태고의 빛이 됐구나.”

    갈리프의 말이 사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시아의 몸 안의 마력이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봉인을 모아서 되찾은 빛의 권능 때문에 내가 신이 되고, 권능을 잃은 갈리프는 죽게 되었다는 소리야?

    애초에 봉인이란 게 왜 생겨난 건데. 미옌이 일을 이렇게까지 키우지만 않았어도 당신은…….

    시아는 기둥 뒤의 갈리프를 향해 애달프게 외쳤다.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넌, 네가 만든 사도에게…….”

    “미옌을 원망하지 마. 그 애는 내가 편해지도록 도와준 것뿐이니까. 그리고 내가 잘못하기도 했고 말이야.”

    갈리프는 설핏 웃다가, 잠깐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사라지고 있어.”

    뭐?

    “애초에 평행세계의 두 존재가 같은 시간대에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사라진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시아는 안절부절못하며 당장 기둥 뒤로 돌아가 갈리프를 살펴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그러다 기둥 뒤로 빠져나온, 자신의 것과 똑같은 검붉은 머리카락이 반쯤 투명해져 노을빛을 그대로 통과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입을 틀어막았다.

    “갈리프. 당신, 정말로 사라지고 있는 거야……?”

    “난 네 그림자로 존재하기 위해 생을 허락받은 거야. 네 시간 여행이 끝없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주는 길잡이로서 말이야.”

    “그렇다는 건……”

    “네 시간 여행이 완전히 궤도를 벗어났다는 뜻이지. 이젠 라크시스가 살아있는 세계로 시간선이 완전히 방향을 틀었어.”

    갈리프의 목소리엔 후련함이 묻어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을 이루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두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영원히 라크시스를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 하나만큼은 살리고 싶다는 소망을 마침내 이루게 되었기 때문에.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는 살게 될 거야. 그러니 나 대신 그 애를 잘 부탁해.”

    “…갈리프.”

    “두려워하지 마. 나와 이 시간대가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갈리프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유리처럼 투명해져 있었다.

    이젠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시아는 갈리프가 존재해야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으로, 누군가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균형의 우주란 이런 것인가. 시아는 불현듯 차오른 울음을 삼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또 다른 자신과 조우할,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시아가 기둥 뒤를 돌아선 순간.

    “혹시 아니? 어딘가에는 평행세계가 공존할 수 있는 우주가 있을지?”

    갈리프는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를 마주한 시아는 마지막 시간 여행을 시작했다.

    * * *

    순식간이었다.

    눈을 깜빡이자, 시아는 이미 온통 새하얀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공간이동 마법을 겪을 때처럼 몸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거나 지금까지의 시간 여행처럼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

    자신의 일기장이 도플갱어를 만나 홀연히 사라졌던 것처럼, 시아 역시 갈리프를 마주친 순간 그대로 우주 바깥으로 튕겨 나온 것이었다.

    풍선 내지는 비눗방울 같은 윤곽을 그리며 떠다니는 알록달록한 물체들을 감상하던 것도 잠시.

    “우웁!”

    시아는 급작스레 밀려오는 두통과 멀미에 눈을 질끈 감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이상했다. 마치 거대한 뱀의 몸통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반대로 미끈거리는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그대로 통과하며 장기를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시선이 분명 느껴지는데, 언덕처럼 거대한 호선을 그리는 눈동자가 자신의 정수리부터 오금을 지나며 뱀처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사방은 하얀데, 하얗지 않았다. 무언가가 존재하나, 그게 무엇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을 감싼 갈리프의 마력이 아니었다면, 시아의 몸은 진작 반죽처럼 늘어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앞뒤가 맞물린 괴상한 형태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여긴 차원 너머의 세계구나.’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를 지닌 차원 너머의 존재가 시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직접 볼 수도 없거니와, 그들을 직접 보았다간 미쳐 버리고 말 터다.

    갈리프에게 시간 여행을 허락하고, 우주 밖의 철리를 허락해 준 존재들이 바로 이들이리라.

    - 여긴 네게 위험하단다. 어서 네 우주로 돌아가렴. 작은 빛아.

    형체 없는 목소리가 뱃속에 그려지듯 들리는 게 느껴졌다.

    시아는 그제야 비눗방울처럼 동글동글 떠다니는 것들이 수많은 우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입구가 뚫린 우주, 풍선처럼 꽉 묶인 우주. 열린 우주로는 차원 너머의 물질들이 자유롭게 오가고 있었고, 닫힌 우주들은 점점 팽창하다 일정 지점에 도달한 후 성장을 멈추었다.

    ‘모든 우주든 별을 한가득 품고 있구나. 그래서 이렇게 반짝이고 알록달록한 거였어. …마치 불안정한 봉인의 마력처럼.’

    시아는 실눈을 뜨고 감기를 반복하면서 그녀가 빠져나왔던 우주를 찾아 헤맸다.

    멀다고 느껴졌던 우주가 손만 뻗으면 닿기도 했고,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했던 우주가 실제론 아득히 멀리 있기도 했다. 시아는 차원 너머의 이곳에선 그녀가 알고 있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연필로 그린 그림들이 실제 사람을 마주하면 이런 기분일까.’

    녹인 설탕 가지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뚱이로 허우적거리기를 수차례,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시아에게 돌연 거대한 길이 강렬한 진동을 뿜어내며 증기기관차처럼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별과 빛으로 이루어진 길이었다. 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시아의 발밑을 정확히 스쳐 지나간 길은 달리는 열차처럼 무서운 속도로 우주와 우주 사이를 지나치며 먼 곳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와그르르―

    속도를 이기지 못한 별과 별이 길 위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청량한 악기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시아는 쏜살같이 움직이는 길 위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길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시아는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그 속도를 맞추지 못해 자꾸만 넘어지고 말았다.

    길을 이루는 별 하나를 겨우 잡은 시아는 질주하는 증기기관차에 매달린 사람처럼 펄럭거리며 우주를 가로질렀다.

    그러다 시야에 들어온 길의 일부분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게, 시간선이란 말이야……?”

    그녀가 목격한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장면들이었다.

    스물일곱의 시아 켈튼이 의술원에 입학하던 그 날. 스물넷의 시아 켈튼이 갈리프도흐의 친구들 마리, 카트린과 함께 아르카나로 놀러 가는 모습.

    시아는 그제야 별과 빛이 모여 만든 길이 과거의 모든 순간을 담은, 그녀가 살던 우주의 시간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길 위로 보이는 과거의 장면들이 점차 선명하고 다양하게 보였다.

    집사 헤이든의 인생, 기사 로건의 인생. 길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하루며, 벤치 밑에서 자라던 노란 들풀의 짧은 생까지도 전부 보였다.

    그들에게서 뻗어 나와 곁가지를 치려고 하던 수많은 사건들은 시간선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휘말려 하나의 줄기가 되었다.

    시아는 곧 그 곁가지들이 평행세계가 되고자 했던 수많은 가능성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잘못하다간 라크가 살아남는 미래도 이 거대한 시간선에 휘말려서 없는 일이 될지도 몰라.’

    시아는 겨우 중심을 잡고 길 위에 서서 과거를 향해 거꾸로 달리며 그녀가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더듬어갔다.

    “…어서 라크가 살아있는 시간으로 가야 해.”

    하지만 그가 살아있던 무수한 순간 중 대체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야 하지?

    전쟁 도중 라크가 괴한에게 찔렸던 순간으로?

    라크가 스칼렛의 총에 맞았던 약혼식 날로?

    그것도 아니라면 카얄이 광룡이 되어 나타났던 고대 종말의 날로?

    과거를 모두 알고 있는 시아로선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도 다가올 일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 여행을 하던 시절에 미래가 적힌 일기장을 갖고도, 앞날을 예측하지 못해 얼마나 우여곡절을 겪었던가.

    “대체 어디로 되돌아가야 하는 거야……!”

    시아는 비명처럼 외쳤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시간선은 하염없이 움직여, 어느덧 제국 전쟁이 종식된 시점에 도착해 있었다.

    “고민할 때가 아냐, 이러다간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말아.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어느 시점의, 어느 장소로 가야 하냔 말이야……!”

    그때, 아주 강렬한 인력이 시아의 정신을 잡아끌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헤매던 원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조각을 찾은 것처럼 그녀의 살점, 뼈, 심장에서 떼어낸 듯한, 말 그대로 그녀의 일부인 무언가를 찾아낸 것만 같은 직감이 들어버린 것이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시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닿은 곳은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시간선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고, 굵직한 빛이 나뭇가지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간선의 가지는 무서운 속도로 곁가지를 흡수하며 내달리던 기존 시간선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빛줄기는 흐름에 저항하며 자꾸만 고개를 들려고 몸부림을 쳤다.

    시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기다.’

    구구구, 하는 거대한 울림과 함께 발밑이 우직, 하고 뒤틀렸다. 새로이 자라나려는 시간선의 가지 때문에 그에 연결된 시간선의 무수한 흐름이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빼꼼 고개를 든 새로운 시간선의 가지에서 라크시스가 살아남는 미래가 보였다. 그렇다는 건 지금 시아가 서 있는 시간선은 라크시스가 죽고 없는 기존의 시간선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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