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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79)화 (279/292)
  • 279화 

    우주에 끝이 있다면, 우주 너머의 장소도 존재하는가.

    만일 우주가 끝이 존재하는 꽉 닫힌 공간이라면, 우주 안의 물질들은 풍선 안에 갇힌 공기들처럼 저들끼리 끊임없이 뭉치고 흩어져 재생산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우주가 태어날 때 생겨난 물질 이외의 것은 절대 우주 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러한 가정이 사실이라고 전제하였을 때,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 자가 과거의 자신을 만났을 때, 두 사람은 과연 공존이 가능할까? 에너지의 총량이 정해져있는 닫힌 우주는 과연 해당 시간대에 있어서는 안 될 에너지가 추가로 존재하는 것을 허락할 것인가?

    프레디 뮐러의 편지 내용과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들려오는 시아의 목소리는 천문학자들도 밝혀내지 못한 난제의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실은 시간의 굴레를 깨트리는 것까지 모두 제 운명이었던 거예요. 라크시스의 운명도 제 손에 있었어요. 제가 이렇게 괴로워하다가 해답을 찾고, 평행세계의 저 자신에게 달려가리라 결심한 것도 모두 정해져 있었던 일인 거예요!’

    시아는 환희에 젖어 외쳤다. 동시에 시아의 말에서 그녀의 계획을 알아챈 요르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아야. 이 세상에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없어.’

    ‘하지만 모든 운명은 제가 개척한 거예요. 갈리프가, 시간 여행자 시아 켈튼이 만들고자 했기에 운명이 만들어진 거죠.’

    ‘시아야.’

    시아는 당장에라도 갈리프도흐의 중앙 홀로 달려갈 것처럼 행동하며 급하게 얇은 재킷을 꿰입었다.

    그녀의 몸에 흐르는 마력량이라면 라크시스처럼 정말로 이동 스크롤 없이 공간이동이 가능할 터였다. 요르문은 다급하게 시아를 붙잡았다.

    ‘아버지.’

    ‘…가지 말거라, 그냥 이렇게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되겠니?’

    시아는 요르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눈치챘다. 은빛 눈동자가 갈등하듯 파르르 떨렸다.

    ‘제가 지금 갈리프도흐로 달려가 버리면, 이 시간대의 아버지는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겠죠.’

    프레디 뮐러의 암호는 결국 시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동 시간대에 존재하는 갈리프, 즉 또 한 명의 시아 켈튼을 만나 우주에서 튕겨져 나가라. 그것이 마지막으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갈리프의 조각이자 아홉 번째 봉인인 라크시스 옌을 찾아 과거로 되돌아가라.]

    ‘제가 라크를 살리기 위해 과거로 가면, 라크가 죽고 없는 지금 이 시간대로는 되돌아올 일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 그러니 제발…….’

    요르문은 이제 울기 직전의 얼굴로 애원하고 있었다.

    우주가 하나의 시간선만을 인정한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시아가 과거로 돌아가 라크시스를 되살리는 순간, 라크시스가 죽고 없는 이 평행세계는 사라지게 된다.

    즉, 시아의 양부인 요르문의 존재는 없던 것이 될 터다. 만일 시아가 무사히 라크시스를 살려내고 마도 시대에 정착한다면, 칠십 년 후의 요르문이 시아를 양딸로 맞이하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될 테니까.

    자신의 존재가 지워진다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다. 그러나 요르문은 이 세계가 사라지는 것보다 시아가 자신을 떠나는 게 더 두려웠다.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시아는 그의 가족이었고,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었으니까.

    그러나 요르문은 시아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

    기울어진 해가 서서히 노을을 그리고 있었다. 프레디 뮐러의 편지에 적힌 저녁 여섯 시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절 입양하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같은 아버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예요. 지금까지 요르문 켈튼의 딸로 살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했어요.’

    불그스름해진 빛을 등지고 선 시아의 눈에는 반짝이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말없이 지어 보인 애달픈 미소는 사랑하는 딸이 제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 인사이리라.

    요르문은 결국 시아를 꽉 끌어안으며,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한다, 시아야.’

    막상 갈리프도흐 중앙 홀에 도착하자, 문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아는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저녁 여섯 시까지 고작해야 삼십 초 정도 남은 것이 전부인데, 어째서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아마 이 너머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시아 켈튼, 즉 갈리프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십 초.

    십 초.

    침을 삼킨 시아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시아는 심호흡을 한 후, 중앙 홀의 거대한 문손잡이를 양손으로 붙잡고 천천히 밀어 열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갈리프?”

    갈리프가 아닌, 손수건을 꺼내 피 묻은 손을 닦고 있는 이 시대의 카얄이었다.

    【 대마법사의 운명은 그녀의 손에 】

    “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당신은 내가 방금 쏴버렸는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는 거지?”

    카얄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시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물었다. 시아의 전신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마도 시대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다. 갈리프의 기억에서만 엿보았을 뿐,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네가, 갈리프를 쐈다고?”

    “정신이 나간 건가? 갈리프, 왜 당신이 갈리프가 아닌 것처럼 말하지?”

    카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시아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시아는 그의 어깨 너머, 텅 빈 홀의 기둥 너머 마룻바닥에 피가 서서히 고이기 시작한 걸 발견하고는 숨을 삼켰다.

    “뭘 보고 있지?”

    “…날 왜 쏜 거야.”

    시아는 이를 악물고 공포를 견디며 카얄에게 물었다.

    기둥 뒤에 쓰러져 있을 갈리프가 걱정되었다. 저렇게 출혈이 심한데 갈리프의 숨이 붙어있을까.

    만일 그녀가 죽어버렸다면.

    숨이 끊어진 도플갱어를 만나도 시간 여행이 가능한 걸까.

    갑자기 바뀐 주어에 카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다, 섬뜩한 미소를 그려냈다.

    “너, 갈리프가 아니구나?”

    꽉 닫힌 문이 등 뒤에 닿았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어진 시아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카얄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라크가 광룡을 처치했을 때 죽은 게 아니었나? 아, 이번엔 광룡이 부활하지 않았지. 그렇다면 카얄은 살아있을 수 있겠구나.

    대신 제국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광룡의 불길에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라크시스도 포화를 막다 죽어버렸어.

    아니, 날 지키다가 죽었어.

    스칼렛에게서. 카얄, 당신에게서.

    시아의 입술 사이로 절망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랬어.”

    그녀의 물음 하나에, 카얄은 갈리프와 똑같이 생긴 눈앞의 존재의 정체를 알아챈 듯했다.

    검은 코트의 마법사라는 별명답게 실크햇부터 검은 가죽 장갑까지 온통 검은 옷으로 뒤덮인 남자가 시아에게 달려와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당신에게 절망을 주고 싶어서 그랬어. 당신이 만든 세계는 불공평했으니까.”

    “큭!”

    “당신이 아끼던 피조물들이 자멸하는 꼴을 보니 어땠어? 인간들에게 벌을 내린 건 신도, 사도도, 광룡도 아니야. 그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자멸이라는 벌을 내렸지.”

    카얄은 시아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넘실거리는 마력이 마룻바닥에 뒹구는 시아의 몸을 감싼 덕에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부딪힌 충격까지 막지는 못해 곳곳이 욱신거렸다.

    카얄은 시아의 앞에 천천히 다가와 섰다.

    “당신이 아무리 구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어. 인간도, 노예 아이도. 안 그래?”

    시아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카얄을 노려보았다.

    “…개자식.”

    “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를.”

    시아는 당장에라도 자신을 쏴버릴 것처럼 총구를 들이대는 카얄에 몸을 움찔거리며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카얄은 뜻밖에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나직이 물어오기만 했다.

    “시아 켈튼, 총이 두렵나?”

    “…총 맞는 걸 달가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카얄은 겁에 질린 시아를 기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시아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복수란 건 생각보다 그리 통쾌하지 않아. 난 갈리프가 고작 노예 아이 하나에 모든 걸 내걸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어. 제 손으로 만든 수많은 영혼들은 천칭 위에서 스러져 가도록 내버려 두었으면서, 노예 아이 하나를 살리기 위해 권능도 포기하고 시간의 굴레에 스스로 갇힌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단 말이야.”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제게 왜 하는 건가. 시아는 난데없이 시작된 카얄의 고백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자신이 갈리프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제게 이런 고백을 하는 저의가 무엇일까.

    “나의 창조주는 몰랐던 거야. 감정이란 게 이리도 비참한 것이란 걸. 사도들에겐 영혼을 가엾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줘놓고는, 정작 본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창조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거지. 그러니 갈리프에겐 영혼들이 모두 순환해야 할 에너지에 불과했던 거야.”

    카얄은 그저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처럼 하염없이 제 할 말만을 하고 있었다.

    갈리프의 기억을 엿본 적이 있었던 시아로서는 그가 무슨 맥락과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노예 아이 때문에 깨달은 거야. 사도들이 지켜봐야만 했던 세계가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 자신이 만든 세계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그랬다. 그는 사실 갈리프를 싫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도 미옌은 자신을 만들어 낸 창조주에게 인정받고, 또 사랑받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갈리프 앞에서 미옌은 언제나 어린아이였다.

    부모의 거짓말에 배신감을 느끼고, 제멋대로 굴어버린 어린아이.

    카얄의 고백은 그간 갈리프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가를 알아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시아는 갈리프와 같은 존재이되,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시아는 피가 끓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저지른 짓이 용서되는 건 아니야.”

    카얄의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었던가.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들도, 라크시스도 모두.

    시아의 말에 카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윽고 평소처럼 천사 같은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온 카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리볼버에서 총알을 모두 빼내곤 품 안에 넣으며 손을 가볍게 툭 털었다.

    “난 이미 갈리프를 용서했어.”

    “그런데 왜……!”

    “시아 켈튼, 그거 아나?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삶을 지탱하지.”

    때마침 갈리프도흐 중앙 홀의 거대한 아치형 창문을 타고 넘어온 노을이 카얄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라크시스 옌을 죽이고 나서 나는 황혼 국교회 없이 홀로 살아나가야만 했어. 저주조차 쓸 수 없는 비루한 몸뚱이로 세상을 살아봤더니, 보통 정신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더군.”

    주홍빛으로 물든 검은 코트 차림의 피투성이 신사라……. 얼핏 섬뜩하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으나, 시아는 그의 옆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 시대에서 갈리프를 만났어. 끝없이 시간을 반복하며 노예 아이를 살리고자 발버둥 쳤단 소리를 들으니 내 비참한 세월도 수없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면서도 한 편으론 갈리프가 가엾게 느껴지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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