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 * *
[친애하는 여정의 동반자, 레이디 켈튼에게.
편지를 찾아낸 것을 축하하오. 이것은 아마 내가 당신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가 되리다.
당신의 예상대로 나는 여정의 결말을 알고 있소. 그 결말은 시간선의 주인인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순간과 일치하오.
한때의 난 어린 딸이 있기에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 쳤소. 그러나 내가 살아남는 미래엔 레베카도, 달라진 역사도 보이지 않더군.
종말을 막고 레베카를 살리기 위해선 내가 죽어야만 했소. 당신에게 이렇게 암호 편지를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죽음을 결심하고 나니, 그제야 종말이 아닌 새로운 미래가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지.
이젠 정말로 홀가분하군. 남은 여정은 모두 당신에게 맡기게 되어 미안하기도 하오.
레이디 켈튼. 고대의 신화를 아시오? 아홉 사도 중 첫째가 당신을 배신하여 벌어졌던 일. 신화를 생각한다면 봉인의 개수는 여덟 개여야 마땅하나, 당신은 당신이 아끼던 인간에게 왕좌를 지어주려 했었지.
만일 그 인간이 왕좌에 오를 자격을 갖추어, 사도들과 함께 고대의 광룡을 봉인했다고 한다면 봉인은 몇 개가 되겠소?
그러나 당신은 수명이 다해가는 사도들의 부름을 받을 때에만 시간선을 이탈할 수 있지. 사도는 온 우주의 시간선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존재인 당신에게서 떨어진 조각이고. 수명을 다한 조각이 본체로 되돌아가고자 당신의 몸을 과거로 부르는 것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수명이 한참 남은 조각은 어찌 찾을 수 있겠소?
본디 우주에는 하나의 시간선만이 주어지오. 그 말은 같은 존재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지.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이 현상을 보았소.
만일 같은 존재들이 서로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사라지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사라진 존재들은 영원히 소멸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어디로 튕겨 나가는 걸까?
우주의 비밀은 구체화된 언어로 형태가 빚어져선 안 되기에, 이렇게 수수께끼를 내는 것을 미리 사과하오.
수수께끼를 푼 당신에겐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니, 부디 여정을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주시오.
당신의 여정을 위해 아래에 시간과 장소를 적어두겠소.
3587년 6월 30일 18:00.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갈리프도흐의 중앙 홀.]
* * *
시아는 달리고 또 달렸다.
6월 30일 저녁 여섯 시가 되기까지 고작 십 분이 남은 상황이었다. 요르문과 실랑이를 벌이다 늦지 않았더라면 갈리프도흐에 여유롭게 도착했을 텐데.
‘시아야, 가지 말렴. 네가 갈리프든, 무엇이든 상관없단다. 아버지 곁에 있어주면 안 되겠니? 지금 가면 난 널 두 번 다시…….’
시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갈리프도흐의 정문을 뛰어 들어갔다. 무더운 여름 저녁에 땀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눈으로 들어가는데도, 닦을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움켜쥔 주먹에 새하얀 힘줄이 돋았다. 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슬퍼하던 요르문의 표정을 떠올리면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뺨에 흘러내리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과 경비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시아는 마침내 갈리프도흐의 중앙 홀 문 앞에 도착했다.
괴담이 얽힌 발레아스키 동상에서 암호 쪽지를 발견했던 어젯밤.
바로 그다음 날인 6월 30일인 오늘 아침, 요르문은 먼지가 쌓인 채 주인 없는 뮐러 저택에 방치되어 있던 프레디 뮐러의 타자기를 작동시켜 암호를 풀어냈다.
마지막 암호 쪽지에 남겨진 비밀은 지금껏 밝혀진 미래와는 차원이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프레디 뮐러는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구나. 그리고 너는…….’
시간선의 주인. 사도의 창조주. 요르문은 시아가 갈리프라는 사실을 결국 알아버리고 말았다.
‘…네, 제가 평행 시간선의 갈리프예요.’
‘어쩐지 그런 것 같더니. 사실 오래전에, 그러니까 마도 시대에 네 머리카락이 은발로 변했던 걸 보고 짐작하긴 했다만.’
‘짐작하고 계셨다고요?’
요르문은 재차 성마르게 얼굴을 문질렀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라크 녀석 저택에 걸려 있었던 그 초상화 말이다.’
요르문은 초상화를 언급하며 시아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시아에겐 더 이상 초상화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림 같은 건 이제 상관없어요. 지금은 프레디의 암호가 가장 우선인걸요. 프레디는 지금 봉인이 아홉 개라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카얄을 제외한 여덟 사도가 광룡을 봉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암호를 보면…….’
봉인이 아홉 개인지, 여덟 개인지에 대해선 오래전부터 라크시스와 요르문, 루드윅과 시아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었다.
신화를 고려한다면 봉인은 사도의 머릿수대로 아홉 개가 맞을 테지만, 미옌이 갈리프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아 일행은 봉인이 여덟 개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레디의 편지를 다시 한번 보는 순간.
- 당연히 당신이 구한 작고 연약한 인간을 말하는 거지요. 그 아이를 위해 왕좌도 새로이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한 줌의 별 가루가 되어 사라지던 사도 울리아트의 목소리가 떠오름과 동시에 갈리프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 난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아.
- 그 고운 발로 날 계단처럼 밟아 마차에 오르겠지. 보석으로 치장한 가녀린 손으로 내 뺨을 때리며 즐거워할 테고.
들판에 버려져 죽어가던, 앙상하게 마른 노예 아이였던 라크시스가.
- 좋은 향이 나요. 갈리프. 안아봐도 됩니까.
- …다른 사람에겐 허락하지 마세요.
- 그냥, 다요. 제가 당신에게 하는 모든 것들을요.
한 명의 사내로 자라나 설익은 소유욕을 드러내는 라크시스가.
- 왜 날 지키려고 한 거야. 내가 고맙다고 해줄 줄 알았어? 당신이 다치면 어떡하냐고. 당신 없이 나만 살아남아서 어쩌란 말이야!
- 날 두고 가지 마. 갈리프, 제발. 아직 사랑한단 말도 못 했어, 아무것도 고백하지 못했다고…….
죽어가는 자신을 앞에 두고 오열하던, 가엾은 라크시스가 눈앞에 그려진다.
갈리프의 기억을 타고 떠오르는 과거가 퍼즐의 조각을 차례로 맞추어 나갔다.
‘검은 머리였던 라크시스가 은발의 마법사가 된 건, 그 애가 마지막 사도로서 광룡을 함께 봉인했기 때문이었어. 반쪽짜리 사도의 힘으로 어둠을 품에 가뒀기 때문에 옛날의 기억들을 모조리 잊어버린 거야.’
마침내 시아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검붉던 머리카락에 서서히 은빛 마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라크가 노예 아이이자 마지막 사도였군요.’
‘노예 아이라니 그게 무슨, 시아야, 지금 네 머리가…….’
‘제가 그에게 왕좌를 주려 했어요. 사도의 자리를 주고, 영원히 함께하려고 했었어요. 저는 라크시스를 사랑했으니까, 그는 제게 감정이란 걸 알려준 첫사랑이었으니까.’
허공을 바라보는 시아의 눈동자가 우주를 담은 것처럼 검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력이 충만해진 은빛 머리카락이 요정의 날개처럼 사방으로 부유하며 서재의 모든 마도구며 전기 장치를 멋대로 껐다 켜고 있었다. 당장 마류 폭풍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공간을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마력에 요르문을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건 자신이 평생을 키워온 수양딸 시아 켈튼이 맞는가?
아니, 그녀는 과연 인간이 맞는가?
‘모든 게 떠올랐어요.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났다고요. 미옌이 라크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아아, 이제 알겠어요. 제국 전쟁에서 라크시스를 찌른 칼이 무엇인지. 그건 바로 천칭의 조각일 거예요. 미옌이 절 죽일 때 썼던 바로 그 천칭 조각 말이에요.’
‘시아야, 정신 차려!’
‘라크는 살아 있는 봉인이나 다름없었어요. 사도의 힘을 갖고도 수천 년을 살아 있었으니까요. 미옌은 라크를 죽여 제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약해진 미옌은 라크를 죽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구태여 균형을 주관하는 천칭의 조각을 찾으러 다녔던 거예요. 라크의 심장에 봉인된 어둠을 꺼내면, 라크도 죽고 말 테니까요. 그래, 괴한은 역시 카얄이었던 거예요!’
시아의 말이 길어짐에 따라 요르문은 시아가 두려워져 그녀의 팔을 붙들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이젠 거대한 태양처럼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한 시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요르문은 곧 시아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나왔다.
‘아버지, 요르문. 제 일기장을 기억하세요? 모든 미래가 적혀 있던 바로 그 일기장이요. 그 일기장은 제 것이 아니었어요. 무한히 시간을 반복하던 갈리프의 것이었죠.’
‘시아야, 이러다 저택이 무너질지도 몰라. 제발 진정해, 진정하고 말해 주렴, 응?’
‘그 일기장을 기숙사에 가져오자마자, 제가 쓰던 일기장이 사라졌어요. 그땐 그저 무섭기만 했었는데, 이젠 알겠어요. 아버지,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진짜였어요. 이 우주엔 같은 것이 동시에 존재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의 꽉 닫힌 우주에선 오직 하나의 시간선만을 인정하니까요!’
요르문의 말을 들었는지, 시아를 둘러싸고 요동치던 마력이 한결 차분해졌다. 그럼에도 요르문은 시아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한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꽉 닫힌 우주엔 변수가 생길 수도, 생겨서도 안 돼요. 시간 여행은 우주 바깥의 힘을 이용해 닫힌 우주를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죠. 그런데 천칭은 갈리프의 소원을 들어줬죠. 그녀에게 씌워진 시간의 굴레를 파괴하면서 말이에요.’
신을 마주한 기분이 이런 것일까.
요르문은 어느덧 시아의 목소리가 제 귀가 아닌 관자놀이를 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르문의 마력이 시아의 마력과 공명하며 전례 없이 요동치며 절절 끓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요르문은 시아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으려 애썼다.
우주의 법칙과 시간 여행의 원리. 인간으로선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불가능과 미지의 영역.
요르문은 시아의 입에서 꽉 닫힌 우주라는 표현이 나오자마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우주가 아주 작은 점에서 시작되어 한없이 팽창되고 있으며, 그렇기에 우주에는 끝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학계에서 최근에야 발표되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