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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77)화 (277/292)
  • 277화 

    시아에게서 정말로 뜻밖의 질문을 받은 탓에 헬릭스의 사고가 잠시 멈췄다. 발레아스키의 동상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지 않았었나? 그가 태어날 때부터 발레아스키의 동상은 갈리프도흐의 음악 대학동 앞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시아는 재차 되물었다.

    “발레아스키가 죽고 그의 묘 앞에 세워져서, 추모객들의 꽃으로 매일같이 뒤덮여 있지 않았던가요?”

    “그건 나도 잘…….”

    “허허참, 누가 보면 아가씨가 내 동년배인 줄 알겠어.”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시아와 헬릭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비질을 하고 있던 나이 지긋한 경비원이 허허롭게 웃었다.

    “그 동상 말일세. 메이덜린 쪽의 공동묘지에 있던 게 맞구먼.”

    “정말이요?”

    “어이쿠, 황자 전하도 계셨군요.”

    황자까지 벤치에 함께 있는 줄 몰랐던 경비원은 헬릭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제가 두 분 이야기를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흙을 좀 쓸다가 우연히 들었던 거구먼요.”

    “아닐세. 오히려 잘 들어주었다고 해야 하겠지. 발레아스키의 동상이 메이덜린 묘지에 있었다니, 나는 모르는 일인데. 혹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는가?”

    “자세히 말해 달라고 하셔도 제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진 않을 수 있습니다요.”

    “괜찮네. 말해 주게.”

    헬릭스의 간절한 부탁에 경비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 칠십 년 전쯤에 있었던 제국 전쟁 말입니다. 그때 수도도 엄청 공격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랬지.”

    시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제국 전쟁이 언급되자 목 끝까지 숨이 차올랐지만 괜찮다, 괜찮다를 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경비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메이덜린 공동묘지도 그때 폭격을 맞았더랬죠. 황자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 공동묘지에 유명한 예술가들의 묘가 많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다고 들었네.”

    시체 도굴이 성행하기 전, 메이덜린 공동묘지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아름다운 추모 공원이었다.

    즐비하게 늘어진 묘비들 사이로 유명인사들의 동상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예술가를 기리기 위해 꽃을 들고 메이덜린 공동묘지를 찾았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자들이 묻히는 묘지 외곽과 달리, 유명인사들이 묻혀있던 묘지 중심부는 시체 도굴이 횡행하던 시절에도 언제나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폭격을 맞고 무너진 곳이 어디 한두 군데였겠습니까. 산 사람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데 묘지를 누가 돌보겠어요. 그런데 그 옛날 뮐러가의 가주라는 여자가 무너진 밀레이나 돔을 세우고 묘지를 재정비하는 데에 어마어마한 기부금을 냈다더군요. 대모의 뜻을 이어 예술을 지켜낸다면서요.”

    뮐러가의 가주라는 말에 시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저씨, 혹시 그 가주라는 사람의 이름이 레베카 뮐러였나요……?”

    “대충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지? 나도 어릴 적 일이라 이름까진 잘 기억이 안 나는구먼. 여튼 그때 파괴된 묘는 그냥 두고, 멀쩡한 동상들만 갈리프도흐 안으로 옮겼어. 음악 대학 앞엔 발레아스키 동상, 뭐 이런 식으로 말이여.”

    그랬던 거구나. 시아는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하다, 문득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에 공허해져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내가 아가씨가 매일 이 동상 앞에 서 있는 걸 아는데 말이여. 동상이 보고 싶으면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는 건 어떨까? 잔디 다 죽어, 응?”

    “…죄송합니다.”

    경비원은 시아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처음엔 잔디를 죽이는 범인이 누군가 싶어 매일같이 지켜봤는데, 이 아가씨는 올 때마다 같은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울다가 돌아가곤 했다.

    이 아가씨가 울지 않게 된 것도, 발길이 뜸해지게 된 것도 최근 일이었다.

    “안 그래도 이 동상, 가끔 유령 들렸다는 이야기가 들리기까지 하더구먼. 아가씨도 조심혀. 괜히 가까이 가지 말고.”

    “유령이라뇨?”

    “가까이 가면 움직인다나 뭐라나, 아가씨도 여기 학생 아닌감? 갈리프도흐 학생은 다 아는 괴담인디, 여튼 난 마저 일하러 가 봐야겄구먼.”

    경비원은 시계를 보더니 이크, 하고 놀라며 유유히 자리를 떴다.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아는 퍼뜩 무언가 생각난 듯 헬릭스를 돌아보았다.

    “헬릭스 전하.”

    “어? 어, 응. 시아야.”

    “발레아스키 동상에 무슨 괴담이 얽혀 있나요? 알고 계신다면 제발 제게 알려주세요. 네?”

    헬릭스는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울적하게 있던 시아가 돌연 눈을 빛내며 제게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흰자위는 잔뜩 충혈되어 있었던데다 자줏빛 눈동자엔 집념에 가까운 이채가 깃들어 있어, 헬릭스는 결국 이유도 묻지 못하고 동상의 괴담에 대해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 * *

    그날 밤이었다.

    “…밤에 나오려니까 무섭네요.”

    “시아야. 아무래도 황자가 장난을 친 것 같은데.”

    요르문은 으스스해진 팔을 재차 문질렀다. 달을 등진 발레아스키 동상의 얼굴이 역광을 드리우고 악령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상 앞에 섰다.

    “갈리프도흐 학생은 모두 아는데 저만 모르는 괴담이라고 했으니까요. 시간 여행으로 바뀐 무언가가 만들어 낸 현상일지도 몰라요.”

    “나도 그 괴담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시아야, 이젠 남은 봉인도 없어. 괴현상을 일으킬 만한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요르문은 울상을 지었다. 한 달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고 유령처럼 돌아다니던 딸이 생기를 찾은 건 다행이었지만, 괴담 같은 것에 관심을 갖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때 시아가 요르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기억하시나요?”

    동상을 옆에 두고 마주 보게 된 시아와 요르문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정답을 알고도, 요르문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시아는 그 침묵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프레디 뮐러의 쪽지, 그 안에 있던 좌표와 꼭 맞는 위치예요. 제가 이동 스크롤로 수도 없이 확인했어요. 이 동상이 있는 곳이 바로 칠십 년 전, 제 친척 동생인 요르문이 파헤쳐 본 곳이라고요.”

    그랬다. 발레아스키 동상에 시아가 매일같이 찾아왔던 건, 그곳이 프레디 뮐러의 암호에 남겨진 좌표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리라.

    시아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마지막으로 발레아스키 동상 앞에 선 것이었다.

    “시아야. 진짜로 괴담대로 해볼 거니?”

    요르문의 물음에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이 환하게 뜬 밤, 발레아스키 동상의 뒷면으로 돌아가 갈리프도흐의 교가를 모두 부르고 나면 동상이 뒤를 돌아 노래를 부른 사람을 내려다본다고 한다.

    괴담이 아니라 실은 술 취한 학생들이 밤늦게 교정에 들어와 헛것을 본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지만, 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소리로 꿋꿋이 노래를 불렀다.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던 교가가 마침내 끝나고, 텅 빈 중정에 적막이 내려앉을 즈음, 돌과 돌이 맞물려 돌아가는 기분 나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

    시아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동상이 분명 자신을 등지고 있었는데, 어느새 몸을 돌려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르문은 황당하여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괴담이 진짜였단 말이야?”

    자세히 보니 동상과 동상의 받침대 사이의 이음새 부분에 동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치가 있었다. 마치 돌려서 열 수 있도록 만든 뚜껑 같다고나 할까.

    동상을 세우고 난 후에 이런 장치를 만들었을 리는 없으니, 동상을 제작한 이는 만들 때부터 계획적으로 받침대에 이런 장치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장치를 만들었을까?

    그때, 요르문의 목소리가 귓전에 불쑥 들려왔다.

    “마도 시대에는 도굴꾼들이 많았지. 발레아스키는 생전에도 유명했던 작곡가였고 말이야. 옛날엔 해괴한 취미를 가진 부호들이 많았거든. 발레아스키의 해골이라면 암시장에서 못해도 수억 비스크는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시아는 윽, 하고 싫은 소리를 냈다. 암시장이라면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르문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동상의 받침대 사이에 숨겨진 낡은 버튼을 발견했다.

    “여기 센서가 있구나. 센서에 닿던 빛이 일정 시간 이상 차단되면 동상이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모양이야.”

    요르문은 마도 시대에서 만들었을 법한 작은 태엽 장치를 발견하곤 아직까지도 작동되는 센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 하필 갈리프도흐의 교가를 불러야 한다는 괴담이 퍼졌을까요?”

    “교가가 길잖니. 도굴꾼들이 묘를 파내는 데엔 시간이 한참 걸리니까, 아마 단순한 추모객과 도굴꾼을 구별하려고 이런 식으로 설계를 한 모양이야.”

    그 후로 시아와 요르문은 한참 동안 동상과 그 받침대를 살폈다. 혹시 숨겨진 장치가 있나 싶어, 시아가 받침대 이곳저곳을 누르는 중이었다.

    그 순간, 동상 받침대의 단 일부분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안에는 문자열이 새겨진 버튼이 불이 켜진 채, 괴담을 풀어낸 당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황한 시아가 그 앞에서 망설이고 있자 버튼에 들어온 불이 서서히 점멸하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거, 정답이 뭘까요? 아, 장치가 사라지려고 해요, 답이 뭐지, 답이… 아!”

    발을 동동 구르던 시아의 머릿속에 불현듯 낮에 들었던 헬릭스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발레아스키의 음악들을 좋아해. 특히 실피아드에 나오는 춤곡들을 좋아했어.’

    “실피아드!”

    발레아스키의 작품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시아는 왜인지 춤곡 실피아드가 답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버튼이 받침대의 단 안쪽 공간으로 도로 들어가려는 찰나, 시아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여 정답을 눌렀다. 그러자 동상 받침대의 한쪽 면 전체가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 물결처럼 요동치며,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냈다.

    시아는 숨을 삼켰다.

    [발레아스키의 무덤을 도굴하려는 용감한 자여. 공포를 견디고 이곳까지 도달했다면, 그대는 발레아스키의 음악을 사랑하는 자이기도 할 테요.

    망자의 안식을 방해하지 말고 부디 물러나 주길 바라오.]

    “…역시 도굴꾼을 막기 위한 장치였네. 하긴 아무래도 요즘은 보기 드문 장치긴 하지. 묘지가 부족해 동상을 세울 곳이 얼마 없으니까.”

    경고문을 드러낸 동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요르문은 멍하니 서 있는 시아의 곁에 다가서서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괴담의 실체는 이게 전부일 거야. 시아야, 여름이라고 해도 네게 밤바람은 차단다. 몸도 안 좋은데 이만 돌아가자.”

    정말로 그게 끝이기라도 한 것처럼 동상에 떠오른 글자들은 다시금 뱀처럼 구물거리며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도굴꾼에게 보내는 경고가 사라진 동상의 받침대는 언제 글자가 나타났었냐는 듯 매끈해져 있었다.

    ‘정말 이게 다라고? 아냐, 그럴 리 없어.’

    시아는 믿기지가 않아 동상 주변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요르문이 그녀를 말렸지만, 시아는 요르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양 동상이며 받침대, 잔디 할 것 없이 살피고 또 살폈다.

    가느다란 달빛에 의지해, 바지에 풀물이 드는 줄도 모르고 바닥을 더듬던 때였다. 시아의 구두 앞코에 무언가가 툭 걸렸다.

    “잠시만요. 아버지, 여기에…….”

    두루마리처럼 말린 종이였다. 도굴꾼을 향한 경고문이 나타났다 사라진 곳의 바로 앞쪽이었다. 숨을 멈춘 채 종이를 집어 펼쳐본 시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요르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마지막 암호 쪽지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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