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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76)화 (276/292)
  • 276화 

    시아는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비는 남녀를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동전 던지기일 뿐인데, 저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포물선을 그리며 태양을 가로지르다 첨벙, 소리를 내며 그녀의 옆으로 떨어지는 동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시아는 소원을 빌었다.

    딱 한 번만, 한 번만 더 시간 여행을 하게 해줘.

    그러나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루어질 리가 없는 소원이었다. 애초에 시아의 시간 여행은 불안정한 봉인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그녀는 이미 모든 봉인을 찾았으므로.

    남이 던진 동전에 소원을 빌어서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시아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열곤 동전을 꺼내 하나씩 던졌다.

    첨벙―

    첨벙―

    그러나 지갑 속의 모든 동전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왜. 멋대로 자신을 과거에 데려다 놓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선 왜 과거로 보내주지 않는 건데.

    시아는 텅 빈 지갑을 마구잡이로 가방에 쑤셔 넣다, 쇳조각이 든 실크 주머니를 발견했다.

    그래, 이 쇳조각. 프레디 뮐러는 시아에게 이 쇳조각을 항상 몸에 지니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게 다 뭐야. 프레디 뮐러, 당신도 틀렸어. 당신의 예언은 모두 틀렸다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끝나 버릴 거면 바보같이 그 비행기는 왜 탔어? 당신이라도 살지, 당신이라도 살아서 레베카를 지켜주지.”

    시아는 울분에 차 쇳조각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면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나는데도 아픈 줄을 몰랐다. 그저 눈물이 나고, 또 날 뿐이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희뿌연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게 무슨 희생이고, 대의야. 당신이 그렇게 죽어버리면 남겨진 가족은 어떻게 하라고……! 당신 딸을 봐, 지금의 날 봐! 프레디, 하하, 과거의 당신은 내가 지금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도 모두 보고 있겠지? 라크시스가 죽었어, 그가 죽었다고! 라크시스가 죽는 미래를 뻔히 봤을 텐데 당신은 약혼을 축하한다는 말이나 남기고……!”

    시아는 절규하며 목놓아 울었다. 손에 들린 조각이 갑자기 너무나도 미워 보였다.

    프레디 뮐러의 예언 따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 걸 믿었다가 방심해 버렸어. 방심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가 스칼렛의 총에 맞는 일은 막을 수 있었는데.

    세상이 밉고, 모든 것이 싫었다. 프레디 뮐러가 편지에 스칼렛이 약혼식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만 해주었어도, 라크시스가 건강이 악화된 상태로 괴한의 습격을 견딜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 프리드리히 대위가 암살당할 거란 이야기만 해주었어도 자신이 모든 것을 막았을 텐데.

    대위의 죽음도, 전쟁도, 라크시스의 죽음도.

    ‘모두 다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프레디 뮐러가 예언을 실패한 것이 어찌 그만의 잘못이겠는가. 그러나 견딜 수 없는 현실에 시아는 괴로워했다.

    한참 동안 프레디를 향해 화풀이처럼 원망을 퍼붓던 시아는 결국 차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분수대 앞에 선 채로 오열하고 말았다.

    시아는 손을 휘둘러 분수대에 쇳조각을 던져 버리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다급히 달려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시아야!”

    “이거 놔요, 이딴 거 던져 버릴 거야! 필요 없다고!”

    “시아야, 진정해. 손에서 피가 난다고! 이렇게 손을 다치면 의술사 일은 어떻게 할 거야? 너 그렇게 수술방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이대로 포기할 거냐고!”

    세차게 흔들리는 몸과 다그치는 목소리에 시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니 광장에 쏟아지는 햇빛처럼 찬란한 금발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헬릭스, 전하.”

    이 남자는 대체 왜 여기에 나타난 건가. 라크시스 때문에 차버린 남자가 왜 여기 있느냔 말이다.

    시아는 속이 타버릴 것처럼 괴로워하며 그대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시아야!”

    헬릭스는 황급히 시아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없이 창백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이토록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자 헬릭스의 속도 똑같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아르카나 광장을 지나쳐 가고 싶더라니. 사람들이 한데 모여 웅성거리고 있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기웃거렸는데, 그 한가운데에 시아가 이런 꼴로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아야. 일단 나랑 가자. 너 여기 이렇게 있다간 큰일 날 것 같아.”

    “흐흑, 황자 전하…….”

    “그래, 그래. 알았어. 자세한 건 이따 들을 테니까 일단 업혀봐.”

    시아는 혼절하다시피 늘어져 헬릭스에게 업혔다. 헬릭스는 보좌관 레논을 불러 마차의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레논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잠시 산책만 하고 오신다던 분이… 이분은 레이디 켈튼 아닙니까? 손은 또 왜 이렇게 다치신거구요!”

    축 늘어진 시아를 업고 광장을 가로지르느라 헬릭스는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짐이며, 이상한 쇳조각까지 마차에 던져넣은 헬릭스는 레논에게 부탁했다.

    “잔말 말고 날 좀 도와줘. 레논, 오후 일정 미룰 수 있지? 시아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아. 로드 켈튼에게도 연락해 줘.”

    헬릭스의 짝사랑이 무사히 끝나려나 싶었는데, 어째 또 레이디 켈튼과 이상하게 엮여버린 것 같다.

    레논은 결국 다음 일정이 쓰인 종이에 줄을 죽죽 그으며, 마차에 쓰러진 시아를 번갈아 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으, 폐하께 혼나도 전 모릅니다요.”

    “괜찮아. 이 일은 내가 책임질게.”

    시아와 헬릭스를 실은 갈리프콜 마차는 그렇게 아르카나 광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이팝나무꽃이 진 여름의 교정은 짙고 푸르렀다.

    “전하, 지난번엔 신세를 많이 졌어요. 저, 그…….”

    “신경 쓰지 마. 난 괜찮으니까. 우리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잖아?”

    “…그쵸, 친구.”

    시아는 곁에 나란히 앉은 헬릭스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벽돌 사이를 기어 다니는 개미의 꽁무니만 한없이 눈으로 좇았다.

    벽돌 틈에 쌓인, 한 움큼도 안 되어 보이는 흙 위에 노란 들꽃이 피어있었다. 왜인지 노란 들꽃에서 금발의 헬릭스가 겹쳐 보이는 것 같아, 시아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는 것도 친구가 할 일이지, 안 그래?”

    “…감사합니다.”

    시아가 아르카나 광장의 분수대 앞에서 쓰러진 후, 헬릭스는 그녀를 황실 주치의에게로 데려가 치료했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는 의술사의 말에 안도한 것도 잠시, 며칠을 굶었는지 위장이 텅 비었다며 부드러운 음식과 회복 마정석으로 한동안 돌봐줘야 한다는 말에 헬릭스는 서글프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시아야. 널 힘들게 한 남자가 대체 누구니?’

    시아가 이리 괴로워할 줄 알았더라면 그녀를 포기하지 말걸. 그 남자 대신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추잡하더라도 매달렸을 텐데.

    자신이 그 남자보다 시아 켈튼을 더 아끼고 사랑할 자신이 있었는데.

    ‘나였다면 시아를 이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야. 언제나 시아 곁에서,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을 텐데.’

    그러나 시아는 몸이 회복되자마자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헬릭스의 곁에서 바람처럼 떠나 버리고 말았다.

    헬릭스는 시아의 사랑을 받는 그 남자가 미치도록 원망스러웠고, 또 부러웠다. 자신은 받아보지도 못한 시아의 마음을, 그 남자는 내버리고 짓밟기까지 했으니.

    헬릭스는 이런 심정이 얼굴에 드러날까 봐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빙긋 지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이거 돌려주려고 왔어.”

    시아는 헬릭스가 내민 실크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분수대에 던져 버리려고 했던 피 묻은 쇳조각이 들어있었다.

    “네가 그렇게 쥐고 있지 않았더라면 위험한 날붙이라고만 생각해서 진작 버렸을 거야.”

    “…버려주셨더라면 더 감사했을 텐데.”

    “내가 어떻게 그래. 네게 소중해 보이던걸.”

    헬릭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아의 눈치를 보았다.

    쇳조각에는 시아의 손바닥에서 흐른 피 외에도 원래부터 말라붙어 있던 핏자국도 남아 있었다.

    혹시 시아의 사랑을 받는 그 남자가 저 조각에 찔려 목숨을 잃은 것일까.

    그러나 헬릭스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시아의 짓씹은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울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헬릭스는 붕대를 감은 시아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얼마나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지, 붕대에선 또다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갈리프도흐는 어쩐 일이야? 요새 갈리프도흐에 자주 온다며. 지난번처럼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전하. 하지만 괜찮아요. 저 아무 일도 없으니까, 그냥 매일같이 누워 있기만 하는 게 좀 그래서…….”

    시아는 헬릭스의 호의를 거절했다. 어차피 그에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쇳조각이 뭔지, 자신이 왜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졸업한 지 오래된 자신이 어째서 갈리프도흐의 교정을 배회하는지.

    헬릭스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그를 거절한데다,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 여전한 것도 알고 있었기에.

    시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헬릭스가 먼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같이 좀 걸을까? 산책하러 나온 거라면 말이야.”

    헬릭스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놀란 것 같았지만, 뭐 어떠랴. 계속 슬퍼하는 것보단 차라리 놀란 게 나을 터다.

    * * *

    “…여길 자주 오나 봐?”

    헬릭스는 시아가 선 자리를 놀란 듯 바라보았다.

    “…네.”

    시아와 헬릭스가 한참을 걷다 도착한 곳은 음악 대학이 있는 오래된 건물동 앞 중정이었다.

    여름을 맞이해 새파랗게 올라온 잔디가 유독 한 곳만 거멓게 짓눌려 있었다. 시아의 발 모양과 꼭 들어맞는 자국이었다.

    잔디가 눌린 자국 바로 앞에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발레아스키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나도 발레아스키의 음악들을 좋아해. 특히 실피아드에 나오는 춤곡들을 좋아했어.”

    “…그런가요?”

    시아가 처음으로 제게 반문했다. 헬릭스는 그녀의 관심을 돌렸다는 것에 기뻐 쓸데없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계속 늘어놓았다.

    “어릴 때 밀레이나 돔으로 공연을 보러 가자고 폐하를 조른 적도 있었지. 무용수들이 마정석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진짜 요정 같아서 신기했었거든.”

    그러나 무용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시아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마정석이라는 말에 암시장의 무대 위에서 펼쳐졌던, 마도 시대의 극을 떠올려 버렸던 탓이다.

    헬릭스는 안절부절못했으나, 시아의 속마음을 읽을 순 없었다.

    “헬릭스 전하.”

    “응, 시아야.”

    “발레아스키의 동상은 원래 메이덜린의 공동묘지에 있지 않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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