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75)화 (275/292)
  • 275화 

    사흘 내내 울었던 탓에 시아의 눈시울은 벌겋다 못해 혈관이 터진 것처럼 새빨갰다. 그녀의 얼굴은 죽지 못해 겨우 사는 사람처럼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시아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말들을 창자 속에서부터 긁어내 쏟아냈다.

    “칠십 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제 친구들은 그대로예요. 전 아버지의 딸이 되었고, 의술사로 살고 있죠. 바뀐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그렇게나 발버둥 쳤는데, 라크를 살리려고 발버둥 쳤는데! 모든 건 정해져 있었어요, 그는 죽고 나는 살아남아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운명은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던 거라고요!”

    시아는 이불에 엎어져 토해 내듯 울었다.

    그토록 울고도 또 쏟아낼 눈물이 남았을까. 요르문은 딸의 상태가 이렇게 심각한 줄 모르고 있었던 자신을 자책했다.

    사흘 내내 방에 조용히 있기에 생각이 정리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시아는 그의 예상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칠십 년이라는 세월을 지내면서도 자신은 옛 친구를 잊지 못했는데. 시아에겐 고작해야 사흘 전에 겪은 일이 아니던가.

    “미안하다.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

    요르문은 시아의 어깨에 이불을 둘러주었다. 며칠 굶었다고 앙상해져 버린 딸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식사는 놓고 가마. 먹고 싶어지면 먹으렴.”

    요르문이 떠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요르문 님에게 상처를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 역시 오랜 친구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괴로워했을 텐데, 자신은 어째서 죄 없는 그에게 화풀이를 해버린 것일까.

    그가 사라진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시아는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아버지.”

    * *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열정과 휴양의 계절을 맞이한 제국은 간만에 부연 안개 없이 화창한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르카나 광장의 분수대를 따라 아이들이 뛰어놀며 천진하게 웃었다. 양산을 쓰고 나온 숙녀들은 벤치에 앉아 평화로운 거리를 구경했다.

    갈리프콜 삯마차가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달리다, 나들이 나온 남녀를 뱉어놓곤 사라졌다.

    새하얀 시계탑이 오후 두 시를 알리며 웅장하게 울렸다. 광장을 잔잔하게 뒤덮는 종소리에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종소리를 감상했다.

    누군가는 거룩한 울림으로, 누군가는 칠십 년 전의 제국 전쟁의 피해자를 추모하는 상징으로. 그리고 누군가는 결국 또다시 스스로를 희생해야만 했던 마법사에게 바치는 묵념으로.

    “라크.”

    시아는 분수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수대와 시계탑의 공존이라……. 그녀가 알던 3587년에선 볼 수 없었던 어처구니없는 풍경에 시아는 조소했다.

    광룡을 무찔렀던 아홉 사도의 조각상으로 장식된 분수대는 본래 마도 시대에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르카나의 시계탑은 마도 시대의 종말 이후, 광룡에 희생된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해 분수대가 무너진 자리에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머리카락에 달라붙는 물방울에 시아는 분수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그녀가 마도 시대에서 익히 보아왔던, 고대 양식의 분수대가 아닌 그 이후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분수대였다. 그렇다. 이 분수대는 아르카나의 시계탑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기념물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과거와 달라진 것이 또 있다면, 분수대를 장식한 것이 광룡과 아홉 사도의 조각상이 아닌 라크시스 옌의 조각상이라는 것이다.

    어찌하여 라크시스 옌의 조각이 분수대에 있는가.

    시아는 허무한 한숨을 툭 뱉곤, 힘없이 분수대 난간에 기댔다.

    “날 기다리겠다면서……. 거짓말쟁이.”

    청동으로 조각된 그의 모습을 보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어찌하여 그런 선택을 했는가. 라크시스는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가.

    시아는 3587년으로 돌아오자마자 알게 된 라크시스의 최후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것은 정말로 고대 마법사다운 최후였다.

    시아와 라크시스의 약혼식이 있던 그 날. 할켄타인 소공작, 즉 프리드리히 할켄타인 대위는 테러범의 공격으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 무렵 제국과 서대륙의 관계는 극악으로 치달아 있었다. 맨덜랜드 사태로 불거진 가멜 식민지 문제에 대해, 제국인들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서대륙에서 가멜의 무장 독립 세력을 부추겨 제국을 공격하라 했다고 오해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제국과 서대륙은 무역과 세법을 이용해 서로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프리드실 공국의 후계자가 제국에서 암살을 당했으니… 프리드실 공국의 수장은 분노하며 다른 이가 아닌 황제를 꼭 집어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더욱 놀라운 건 황제가 이에 대해 자신의 책임이 없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는 것이었다.

    ‘황혼 국교회라는 이단이 내 아들을 죽였소, 공국의 후계자를 암살했단 말이오! 그런데 이단으로 하여금 프리드리히를 죽이라 한 자가 알리나 황제 당신이라니……!’

    프리드실 공국의 수장은 황제가 황혼 국교회라는 이단과 관련이 있으며, 그 이단을 부추겨 황제가 직접 맨덜랜드 사태를 일으키고, 서대륙에 모든 죄를 덮어씌워 전쟁의 빌미를 만들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전쟁의 빌미란 다름 아닌 프리드리히 할켄타인의 암살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황제와 이단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속속들이 내놓았다.

    남대륙 회사의 자금줄과 황제가 연관이 있다는 증서들과 이단의 수장으로 지목된 스칼렛 포드가 평소 황제를 자주 알현했다는 것, 그리고 고대 마법사의 약혼식 날에 마치 테러가 일어날 것이 예정된 것처럼 프리드리히가 탄 증기 마차만을 지름길로 돌아오게 했다는 것까지.

    이 일로 제국 전역이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황제가 타국의 차기 수장 암살을 사주했다니. 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요르문이나 차탈은 이것이 카얄의 모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암이 황제의 개인 계좌를 이용해 남대륙 회사의 자금을 세탁했다는 사실이나, 암시장 사건 이후 꼬리를 자르고 사라진 카얄의 존재감이 지워지며 그간 카얄이 해왔던 일들이 스칼렛이 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어버려 발자크 로스의 황제 알현이 스칼렛 로스의 알현으로 둔갑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요르문과 차탈을 제외한 사람들은 황제의 행동에 배신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말았다. 알리나로선 억울했겠지만, 사람들의 질타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프리드실 공국이 프리드리히 할켄타인의 죽음을 이유로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전쟁을 막기 위해 서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제국의 관료들이 나서서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제국 마도 무기들의 위력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프리드실 공국에서는 오만한 제국을 짓누르고 그들이 독식했던 남대륙의 식민지들을 나눠 갖자며 서대륙의 다른 나라들까지 참전시키고 만다.

    그리하여 광룡의 부활보다 더욱 참혹했던, 칠십 년 전의 ‘제국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수도는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시가지는 폐허가 되었다. 제국의 뛰어난 마도 문명과 군사기술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카얄. 이 개자식.’

    리암 블레어가 남대륙 정벌을 빌미로 의회에서 제국군의 남부 이동을 승인한 상황이라 수도와 그 인근에 최소 병력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제국의 중심지가 꼼짝없이 공격을 받고 만 것이었다.

    켈튼 코퍼레이션의 마도 무기들과 요르문, 라크시스 등을 비롯한 수도의 마법사들이 나서서 수도를 황급히 방어했고, 그렇게 제국은 수도 함락 직전에서 겨우 버티며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본래 제국에는 지방의 각 거점마다 마력을 이용해 방어막을 발동시킬 수 있는 마도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땅에 매립된 마정석과 장치를 연결하여, 평범한 마법사들의 마력으로는 만들 수 없는 아주 거대하고 단단한 돔 형태의 마력막을 만들어 내 도시의 중심부를 감쌀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마도 장치의 존재가 무색하게, 서대륙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된 후 도시는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받고 만다. 장치의 동력원인 마정석이 모조리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동력원을 파괴한 것도 황혼 국교회라 하는데, 어찌 됐든 당장 장치를 가동시켜야만 했던 제국에서는 무한한 마력의 소유자인 라크시스 옌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당시 라크시스 옌은 총상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는데, 각 거점의 마법사들과 정신을 연결해 자신의 마력을 수도 모르간을 포함한 제국 전역의 도시에 전달하여 방어 장치를 가동시킬 수 있도록 했다.

    라크시스 옌 덕분에 수도로 쏟아지는 서대륙 연합군의 포화와 같은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면서 제국에서도 반격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렇게 자그마치 오 년 가까이 전쟁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낮으로 방어 장치를 지키고 있던 라크시스 옌이 괴한에 습격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괴한은 과도한 마력 사용으로 라크시스 옌이 지친 틈을 타 그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었다.

    어찌하여 괴한 따위가 철통같은 제국 군사 시설의 보안을 뚫고, 그것도 고대 마법사라 불리는 남자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자는 왜 하필 총이 아닌 칼을 이용해 라크시스 옌을 공격한 것일까.

    고대 마법사라 불리며 대단한 실력을 자랑하던 라크시스 옌은 왜 반격 한번 하지 못하고 괴한의 습격에 당하고 만 것일까.

    라크시스 옌을 공격한 괴한은 대체 누구인가.

    사람들은 괴한을 서대륙에서 온 첩자나 제국 내부의 배신자일 것이라 수군거렸다.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오랜 전쟁으로 물자가 떨어져 가는 서대륙 연합군이 당시, 남은 전력을 다해 수도에 최후의 폭격을 퍼붓고 있어, 라크시스 옌이 방어 마력 장치에서 도저히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순간, 그의 근처에 도움을 청할 마법사도 아무도 없었다고 하니, 이는 훗날 라크시스 옌의 피습 사건의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결국 라크시스 옌은 부상을 입은 상태로 장치에 끝까지 마력을 공급했다.

    포화와 같은 마지막 폭격이 끝나자마자 고대 마법사는 기다렸다는 듯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곤 무한한 마력의 끝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머리가 검어진 채 숨을 거두었다.

    이후 전쟁은 서대륙 연합과 제국의 협상으로 종식을 맞이했고, 제국은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고 서대륙 각국에 전쟁 보상금을 지불하느라 전쟁이 끝난 후 저성장의 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찬란하던 마도 시대는 전쟁과 함께 기반시설이 모두 파괴되어 끝이 나고 말았으나, 마법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3587년에도 마법은 건재하게 되었다. 마법사들도 마력을 잃지 않고 여전히 활동했고, 마도 시대의 계보를 이으려는 움직임도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으나…….

    단 한 사람, 오직 라크시스 옌만 이곳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