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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74)화 (274/292)
  • 274화 

    황제를 약혼식에 초대하게 되면서, 황궁에 기거하고 있는 귀빈인 프리드리히도 예법에 맞추어 초대하게 된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시아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것처럼 보이는 그 남자를 약혼식에 초대하고 싶진 않았지만, 라크시스는 현재 제국과 서대륙의 관계를 생각하여 결국엔 프리드리히도 초대할 수밖에 없었다.

    차탈은 뭐 씹은 표정이 된 라크시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했다.

    “어쨌든, 좋은 구경 하다 가겠네. 내 살다 살다 고대 마법사가 약혼하는 꼴을 다 보고 말이지. 그럼 이따가 보지!”

    차탈은 웃으며 제 명패가 놓인 테이블로 떠나갔다.

    그가 떠나자, 내내 라크시스의 눈치를 보던 시아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라크, 괜찮아요?”

    “그럼요. 당신과의 약혼식이 곧 이루어진다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좋은걸요.”

    거짓말.

    시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이젠 보이지도 않는 차탈을 향해 구시렁거렸다. 어째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대공은 마지막까지 얄밉게 굴고 말았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그 후로도 계속 손님들을 맞이했다. 어제저녁에 미리 랑케르트로 내려와 새벽부터 시아의 말동무를 해주었던 레베카와 에밀리, 밀레이나와 인사를 하고, 시간 여행으로 인연을 맺었던 발명가 메이슨 비렌체와 괴담 수집가인 루드윅 젤마니와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부하인 해밀턴 경장과 함께 쭈뼛쭈뼛 나타난 슈나이더 경감에게도 자리를 안내해 주고, 노신사 웰링턴 백작의 팔짱을 끼고 나타난 올가 웰링턴과도 사교계식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약혼식에 참석하기로 했던 모든 손님들이 자리에 앉았다.

    단 한 사람, 프리드리히 할켄타인을 제외하고.

    “식을 시작하게. 여기 모인 손님들을 이토록 기다리게 하다니, 소공작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군.”

    제국과 서대륙의 관계를 생각해 지각한 프리드리히를 기다려 주자고 말했던 황제가 가장 먼저 신경질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황궁에서 소공작이 탄 마차가 출발했다는 전보를 받은 것이 한참 전인데,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다는 건 그가 자의로 약혼식 참석을 거부했다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결국 황제의 지시에 약혼식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고, 오늘의 주인공인 시아와 라크시스가 꽃과 새하얀 리본으로 장식된 단상 위로 올라섰을 때였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 무언가 터진 것처럼 먹먹한 굉음이 들려왔다.

    굉음은 그 후에도 수차례 더 이어졌다. 폭탄이라도 터진 듯, 지척에서 들리는 소리에 모여든 손님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라크시스는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방금 들었던 소리는 공사 현장에서 쓰이는 마폭탄 소리와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오늘 하루 동안 근방에서 공사를 진행하는 곳은 없을 텐데……. 그렇다면 대체 이 굉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때, 약혼식장의 입구에서 시종이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고대 마법사님! 할켄타인 소공작께서 타신 증기 마차에……!”

    뭐?

    이윽고 약혼식장의 주변에서, 아주 선명한 폭발음이 들렸다. 랑케르트 성벽 바로 너머로 시뻘건 불길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자, 사람들은 그제야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황제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어서!”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저, 저기 하늘에, 꺄아아아악!”

    “도망쳐요! 이러다 우리 다 죽게 생겼어요!”

    공포로 물든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약혼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놀란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도망치며 현장이 어지러워진 순간이었다.

    쩔꺽―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난 방아쇠가 쩔걱거리는 소리가 시아의 예민한 청각을 사로잡았다.

    시아는 본능적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시체 같은 낯빛을 한 붉은 드레스의 여자가 총구를 이쪽으로 겨눈 채 서 있었다.

    시아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병상에 누워 있다고 했던 스칼렛 포드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아수라장 속에서도 스칼렛 포드는 오직 시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뱀처럼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시아!”

    퍽―

    ‘…아.’

    살점이 뚫리는 담백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방울져 흩날리는 피가 눈앞에서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명이 들리며 소음이 차단됐다. 옆으로 천천히 기울어가는 자신의 몸과 그런 자신을 으스러져라 붙잡은 라크시스.

    잔디 위로 쓰러진 시아의 위로 힘없이 늘어진 남자의 몸이 그녀를 무겁게 짓누른다. 라크시스와 겹쳐진 배가 뜨끈하게 젖어갔다. 아주 뜨겁고, 축축한 것이 시아의 드레스를 계속 적셔나가고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아아아악! 레이디!”

    레베카의 비명에 이명이 뚝 끊기고 가로막혔던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끌어안았던 손으로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이 익히 아는 액체와 똑같았다.

    피.

    수술방에서 원 없이 보았던 바로 그 피.

    제 위로 엎어진 남자의 등에 뚫린 시커먼 구멍에서 선혈이 하염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아는 그제야 제게 날아오던 총알을 라크시스가 온몸으로 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 라크.”

    사고가 정지된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랑케르트 성을 둘러싸고 이어진 폭발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도망치던 사람들은 더 이상 굉음이 들리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 현장으로 되돌아왔으나, 폭발보다 더 잔혹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라크, 정신 좀 차려봐요. 라크, 라크!”

    시아는 주변의 만류도 뿌리치고,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뇌었다.

    “정신 차려요, 라크, 제발…….”

    봉인의 폭발도 온몸으로 막아내는 사람이 고작 총알 하나에 쉬이 죽을 리 없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머리카락을 더듬어 그의 얼굴을 찾았다. 그녀의 말에 멀쩡히 대답해 줄 줄 알았던 남자는 가쁜 숨을 내쉴 뿐, 죽은 것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아, 안 돼. 라크, 일어나요. 당신 안 죽었잖아. 이렇게 안 죽잖아.”

    폐가 뚫린 건가. 심장을 관통한 건가. 물먹은 이불처럼 축 처진 몸을 바닥에 내려놓자 온통 피범벅이 된 그의 셔츠가 보였다.

    시아는 본능처럼 드레스를 찢어 라크시스의 상처를 막아 지혈을 했다.

    “라크, 이러지 말아요. 이런 장난은 싫다구요. 눈 뜰 수 있잖아요, 라크, 제발요.”

    그의 코에서 실낱같이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라크시스의 얼굴은 곧 죽을 사람처럼 파리했다.

    모여든 사람들이 고대 마법사와 그 옆에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레이디 켈튼의 모습을 보고 숨을 삼켰다.

    “지혈이 잘 안 돼, 피가 계속 나는데, 왜 평소처럼 안 낫는 거야, 왜…….”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시아의 모습에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한 걸음 물러났다.

    황제가 부른 황실 치유사들이 급히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웅성거렸으나, 시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저기, 저기에……!”

    총을 쏜 범인을 잡으러 간 사람들이 스칼렛을 보곤 충격에 빠져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시아에겐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득히 먼 곳에서 거대한 접시가 기우는 소리가 시아의 귓가에 들렸다. 그 많은 소란들은 하나도 듣지 못했는데, 우주를 가로질러 그녀에게 전달된 그 소리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천칭이 기울고 있었다.

    시간 여행의 도래였다.

    “…안 돼, 잠시만. 이대로 갈 순 없어. 이 사람을 두고 이렇게 갈 순 없다고!”

    “레이디, 왜 그러세요!”

    시아의 절규에 레베카가 다급히 시아를 붙잡았다. 그러나 시아는 라크시스를 끌어안고 발버둥 쳤다. 그녀의 머릿속엔 예전과 똑같은 기묘한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작은 빛이여. 태고의 빛이여. 바라 마지않던 소원이 이루어지고 있나니.

    “이런 건 내가 바란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시아는 발악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러나 점점 하얗게 물드는 시야는 그녀에게 또다시 시간 여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제발 날 여기에 있게 해줘, 제발, 난 라크를 두고 갈 수 없어…….”

    사람들은 시아를 피해 물러서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행복해야만 했던 약혼식 날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고대 마법사가 고작 총알 하나에 쓰러져버린 것도, 그의 약혼녀가 미쳐 버리는 것도 모두의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시아의 시야는 어느새 아찔하리만큼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 여행의 기묘한 감각과 극한의 정신적 고통으로 시아는 결국 혼절하고 말았다.

    ―너는 결국 굴레에서 벗어나 두 개의 선을 매듭지을 것이다.

    아득한 음성이 들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물가물한 정신 속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와 사방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시아가 휘청거릴 때.

    “시아야!”

    ‘…요르문, 아니, 헬릭스 황자 전하인가.’

    3587년의 초여름, 황궁에서 열린 키르 해협 전투 승전 기념 연회에 나타난 피투성이 시아 켈튼에 제국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 * *

    “시아야, 이것 좀 먹어봐. 응? 벌써 며칠째 누워만 있는 거니.”

    시아 켈튼이 피투성이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연회장 한가운데에 나타났던 그 날로부터 꼬박 사흘이 지났다.

    황제의 배려 덕에 사방팔방으로 기사가 퍼지는 건 면했지만, 현장에서 시아를 목격한 사람들까지 모두 입막음을 할 수는 없었다.

    입궁할 땐 멀쩡하게 시폰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한순간 피에 젖은 모습으로 변해 버린 시아에 사람들은 요르문이 술수라도 부린 것이 아니냐며 수군거렸지만 결국 사건의 전말은 밝혀지지 않은 채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시아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아, 시아는 한동안 의술원을 쉬게 되었다.

    사실 소문이 아니었어도 시아는 의술원을 쉬어야만 했을 터였다. 지금 그녀의 정신은 온전치 않았으니까.

    요르문은 사흘 내내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딸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며, 들고 있던 스튜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침대맡에 앉았다.

    요르문은 시아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칠십 년 전의 약혼식에 참석했던 목격자이자, 라크시스 옌의 최후를 목격했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므로.

    요르문은 제게서 등 돌려 누운 시아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바꿀 수 없는 과거도 있지. 그 옛날, 네가 노력했던 걸 나는 다 알고 있단다.”

    그러자 시아의 몸이 움찔 굳었다. 이윽고 시아는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 앉으며 요르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버석하게 갈라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피가 끓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면, 전 왜 노력했던 걸까요. 라크의 운명이 결국 정해져 있었던 거라면, 전 왜 그를 살리려고 했던 거죠?”

    “…시아야.”

    “천칭이 절 기만했어요. 갈리프가 절 기만했던 거예요. 이걸 보세요. 사소한 것들이 바뀌었을지언정 3587년의 시아 켈튼의 삶은 그대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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