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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73)화 (273/292)

273화 

시아는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변명을 했다.

라크시스를 가장 먼저 생각했고, 그다음으로 약혼녀가 돌연 사라져 버린 식을 목격하게 된 손님들의 걱정을 했다느니 하며 한참을 횡설수설할 동안 라크시스는 내내 가늘어진 눈으로 시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국 시아는 라크시스의 눈치를 보며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화났어요? 미안해요.”

그러자 라크시스에게서 그동안 참고 있었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아는 그제야 자신이 라크시스의 장난에 또 속았음을 알아차렸다.

“라크, 정말!”

“아하하, 더 이상 안 놀릴게요. 약혼식 날까지 당신을 이렇게 마음 쓰게 해버려서야.”

라크시스는 제 가슴을 탕탕 치는 시아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진정시킨 뒤, 약혼반지를 두어 번 쓸어내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화제를 돌렸다.

“아, 벤슨 남매가 약혼을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그래요? 나중에 고맙다고 전해 줘야겠네요.”

“그리고 미스 벤슨이 이런 말을 했다던데…….”

라크시스는 마치 지나가다 우연히 대화를 엿들은 사람처럼 달리아가 한 말을 생생하게 전했다.

- 리암 블레어를 막아야 해요. 보스는 그 남자의 혐오감을 부추겨 붉은 군대를 남부로 보내려고 했어요. 붉은 군대가 남부에 가선 안 돼요, 그랬다간 정말로 큰 전쟁이 벌어질 거예요.

시아는 심각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리암 블레어가 가멜인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던 건 맞았네요. 레베카를 거절한 것도 그 이유가 맞았고요.”

“최근 제국군에 자원하는 젊은이들이 늘었다고 하죠. 가멜의 독립 무장군에 위대한 붉은 군대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면서 말이에요. 그들을 부추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보수당과 리암 블레어예요.”

시아는 덜컥 겁을 먹었다. 그녀가 아는 전쟁은 승자는 없고 희생자만 남을 뿐인 참혹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공습이 울리고 전투기가 날아다니며 폭격과 가스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그야말로 죽음만이 남는 행위 말이다.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는 걸까요……?”

“이 기세라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일도 아니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라크시스는 의외로 덤덤했다. 수천 년을 살아오며 수많은 전투와 전쟁을 목격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도 어쩔 수 없는 마도 시대의 사람이라 그런 건지.

칠십 년 후에 벌어지는 서대륙 전쟁은 전쟁에 대한 제국민들의 인식을 단번에 바꿨다. 총과 보병이 전부였던 중세의 전쟁과 식민지를 압도하는 제국식 무기만을 전쟁의 전부라 여겼던 제국민들은 전쟁을 애국심을 불태우고 남성성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마도 시대를 거치며 폭발하듯 발전한 기술은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마도 시대라 불리던, 제국이 문명의 절정을 맞이한 시기에 서대륙의 수많은 나라들은 마도 문명 대신 총과 칼을 뛰어넘는 기술들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칠십 년이 지나고, 서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에 끼어든 제국은 그들을 지켜줄 마법 하나 없는 상태에서 전쟁의 무자비함과 잔혹함에 그대로 노출되고 만다.

서대륙 전쟁에서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제국의 젊은이들 중 열에 아홉이 돌아오지 못했다. 참호전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람을 미치게 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참전했던 아들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받고 오열하는 이웃들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연히 남아 있는데, 리암 블레어가 젊은이들의 자원을 받고 있다니.

‘지금 전쟁이 벌어진다면, 마도 시대의 기술이 전쟁에 오롯이 쓰일 텐데.’

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턱 막히듯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왜, 대체 왜…….”

“시아, 진정해요. 전쟁은 리암 블레어 혼자서 일으킬 수 없어요. 제국군이 남부로 향했다고 해도 그게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라크시스는 불안해하는 시아를 붙들고 마력을 흘려 넣어 그녀의 숨을 진정시켰다. 그 덕에 가빠오던 숨이 안정을 되찾았지만, 시아는 라크시스를 통해 전달받은 달리아의 말에서 전쟁에 대한 왠지 모를 확신을 느꼈다.

‘미스 벤슨은 뭔가를 알고 있는 거야. 카얄은 분명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걸. 전쟁이라니,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둘 순 없어.’

시아는 약혼식이 끝나고 달리아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으며, 라크시스가 걱정할까 봐 일단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결국엔 이 소식을 전해 주러 온 거군요?”

토라진 것처럼 입을 삐죽 내밀어 버린 시아를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라크시스는 그녀의 반응이 심상치 않은 것을 곧 알아차렸다.

“라크, 내가 보고 싶었던 거예요? 아님 약혼식 날까지 일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거예요?”

“시아. 전 당연히 당신을 만나러…….”

시아를 놀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라크시스의 낯에서 아까까진 가득하던 여유가 지워졌다. 토라진 시아의 마음이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라크시스는 쩔쩔매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수사에 진척이 생기니 내가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어때요? 이제 내가 아까 무슨 심정이었는지 알겠죠?”

“그래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으니 화 풀어요, 응?”

이 맛에 지금까지 날 놀렸던 거구나?

시아는 라크시스를 슬그머니 곁눈질하며 키득거렸다. 저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반응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자신이 오늘 이 남자와 약혼을 하게 된다니.

그와 함께 만들어 나갈 미래는 밝겠지. 앞으로는 봉인에 전전긍긍할 필요 없이 라크시스와 행복하게 남은 생을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에 시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자, 다들 나오십시다! 아가씨, 고대 마법사님. 모두들 두 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나오셔요.”

예비 영주 부인의 방을 찾아온 요크부인이 예식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이젠 시아와 라크시스가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할 차례였다.

“어머, 고대 마법사님.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신랑이 신부의 얼굴을 보면 불운이 찾아온다는 것도 모르시나요?”

요크부인의 타박에 라크시스는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오늘은 약혼식 날이지, 결혼식 날은 아니지 않는가?”

“하여간 못 말리신다니까. 일단 두 분 모두 나오세요. 손님들을 맞이하셔야지요.”

시아와 라크시스는 요크 부인에게 등 떠밀리다시피 하며 성의 너른 들판으로 나섰다. 꽃과 리본과 사람이 가득한 오늘의 약혼식장엔 들뜸과 웃음이 가득했다.

그래, 이렇게 행복할 수 있잖아. 결혼식 전에 신랑이 신부의 얼굴을 보면 불운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는 정말로 미신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녀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 *

“약혼을 축하하네, 레이디 켈튼.”

“누추한 곳까지 직접 행차해 주시니 정말로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서면으로 답신을 받았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황제가 진짜로 약혼식에 나타나자 시아는 손이 축축해지도록 긴장하고 말았다.

“영광은 무슨. 랑케르트 성에 초대받은 나야말로 오히려 영광이지. 선대 황제께서 그토록 고대 마법사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성에 내가 언제 또 와보겠느냐.”

떨리는 다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곤 있으나, 노련한 황제의 눈엔 바짝 긴장한 시아의 필사적인 노력이 훤히 보였다. 황제에게 시아는 아직도 사교계의 햇병아리 수준이었다. 그러니 황제에게는 시아의 모든 모습이 귀여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내 오래 서 있어서 그런지 다리가 아프구나. 이만 자리로 돌아가 보아야겠네.”

“예, 폐하.”

황제가 떠나가고 시아는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시아는 까맣게 몰랐다.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황제가 시아를 위해 자리를 피해 주었다는 것을.

인파에 둘러싸여 있는데, 뒤통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대공 전하.”

얼핏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렸으나, 시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평소보다 기분이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황자는 간만에 예복을 차려입고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아는 적의가 걷힌 차탈의 얼굴을 보며 설핏 웃었다.

그와의 첫 만남도 얼마나 엉망이었던가. 시간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악연으로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시아는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쥐고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약혼식에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그래, 나 역시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하네.”

대공의 기척을 느끼고 시아의 옆으로 다가온 라크시스도 시아와 마찬가지로 공손하게 인사하며 대답했다.

“대공 전하께서도 일상으로 돌아오시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러자 차탈의 인상이 대번에 찌그러졌다.

일상으로 돌아온 걸 축하한다고? 오래전 알현식 날, 시아를 희롱하려다 들켜 사교계에서 매장당한 후 사람들 앞에 코빼기도 나서지 못했던 자신을 조롱이라도 하는 것인가?

“이것 참, 오늘처럼 좋은 날에도 기어이 날 물 먹이는 건가?”

“이런,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전 병세가 나아진 것을 말씀드렸던 것인데.”

“두 분 다 왜 그러세요. 진정들 하세요, 네?”

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차탈과 라크시스를 말렸다. 다행히도 서로를 향한 날 선 반응이 진심이 아니었는지 두 사람은 대화를 장난으로 받아넘기며 피식 웃었다.

“오늘의 주인공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기꺼이 얌전히 있어 드려야지. 안 그런가, 옌 경?”

“웬일로 이성적인 생각을 다 하시는군요. 대공 전하.”

“옌 경! 자넨, 정말이지…….”

결국 차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백기를 들었다. 그러곤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라크시스에게 바짝 다가가 붙으며 복화술을 하듯 조용히 속삭였다.

“스칼렛 포드의 저주에 걸린 자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나는 발자크 그자의 저주에 걸렸던 사람이네. 옌 경은 카얄이란 작자의 행방에 대해 아는 것이 정말로 없는가?”

카얄의 행방. 여정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 중 하나를 차탈이 언급하자, 라크시스는 잠시 심각해졌다.

방금 전 그의 병세가 나아졌음을 축하한 것도, 대공의 정신을 지배하던 카얄의 저주가 약해졌음을 돌려 말한 것이었으나…….

“어딘가에는 살아있겠지요. 하지만 약해진 건 분명합니다. 그자는 저주로 목숨을 연명하는 존재인데, 대공 전하께 건 저주가 약해졌다는 건 술자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뜻과도 같으니까요.”

“하긴 그렇지.”

라크시스는 곧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사람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 모습이 차탈은 왜인지 안심이 되어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피식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할켄타인 소공작이 늦는군.”

“경호를 위해 지름길로 돌아오느라 그런가 봅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제국에선 할켄타인 소공작을 그리 환영하진 않잖습니까.”

“그런 자를 약혼식에 초대한 자네도 참 대단해.”

“제 의사만으로 손님을 받을 순 없지요. 황제 폐하께서 참석의 뜻을 밝히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랬다. 시아와 라크시스의 약혼식에 초대된 또 하나의 놀라운 손님은 다름 아닌 프리드실 공국의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할켄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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