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미스 알펜에게 생각보다 재능이 있더군요. 여러 가지로요.”
라크시스는 시아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예상했다는 듯, 당장에라도 편지를 떨어뜨릴 것처럼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재능이라고요?”
“미스 알펜이 재키 레이븐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재키 레이븐의 수면제가 그녀에게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죠.”
“맞아요. 그때 미스 알펜이 그랬었죠. 자신이 재키 레이븐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정신이 들었던 것 같다고요. 잠깐만요, 그렇다면 릴리 알펜이 마법사라는 건가요?”
시아는 화들짝 놀랐다. 마력은 소유자의 건강에 직결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체내에 들어온 불순물들을 정화하거나 기력을 회복시키고 재생을 촉진하는 것이 마력의 일반적인 특징이었고, 그 원리를 이용해 사람을 치료하는 자들이 바로 치유사들이었다.
“마법사라고 불릴 수준은 아닙니다. ‘마력을 보유한 자’ 정도랄까요. 평범한 자들보다 조금 더 건강할 뿐 스스로의 마력을 이용해 마법을 구현할 순 없는 수준이었어요.”
“하지만 아깐 미스 알펜에게 재능이 많다고 했잖아요.”
그러자 라크시스는 시아를 바라보며, 검지로 제 머리를 가리켰다.
“이쪽 재능이요. 미스 알펜이 생각보다 학문에 소질이 있더군요.”
라크시스는 재키 레이븐 사건 이후, 미스 알펜을 후원하며 벌어졌던 일들을 회상했다.
시아가 원래 시대로 돌아간 후에도 릴리 알펜은 라크시스 소유의 호텔에 머물며 지냈다. 재키 레이븐 수사가 끝날 때까지만 사정을 봐주겠다고 했던 고대 마법사는 어째서인지 헨리 던로의 사형이 끝난 후에도 릴리를 길거리로 내쫓지 않았다.
릴리는 하루살이처럼 호사를 누리며 매일을 불안하게 살았다. 푹신한 침대와 따스한 식사에 길들여진 몸으로 거리를 나갔다간 적응하지 못하고 굶어 죽을 것만 같았기에 불안한 마음을 쉽게 떨칠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고대 마법사가 호텔 지배인 대신 직접 릴리를 찾아왔다.
‘미스 알펜. 혹 아카데미는 다녔나?’
‘보셔서 아시잖아요. 시궁창에서 살아온 창녀가 아카데미를 다닐 수나 있었겠어요?’
다짜고짜 쏟아진 질문에 릴리는 방어적으로 굴었다. 로렌 허슬러가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얼음장처럼 변해 버렸던 고대 마법사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대 마법사에게서 나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 다녀보는 건 어떤가. 지낼 곳과 학비를 지원해 주지.’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게 왜 친절하게 대해 주시나요? 이런 호텔도 그렇고, 왜 계속…….’
왜냐는 물음에 뜻밖에 고대 마법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은빛 속눈썹 사이로 일렁이던 푸른 눈동자는 마치 누군가를 그리는 것 같았다.
‘미스 허슬러가 경찰서에서 진술하던 그대를 봤다면 아마 이렇게 하라고 닦달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난 그 숙녀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회상을 마친 라크시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요르문의 밑에서 마류학을 배워보라 권했는데 단번에 거절했어요. 타고난 마력이 많진 않아도, 탐구심과 마류를 감지할 능력 정도만 있으면 해볼 만한 학문이라 했더니, 그보단 당신 같은 의술사가 되고 싶다 하더군요.”
“저 같은 의술사요?”
시아의 반문에 라크시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수한 의문을 품은 채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기심과 열정, 의지를 가득 담은 저 아름다운 눈동자가 상대의 얼마나 마음을 동하게 하는가.
릴리 알펜도 자신을 치료하던 시아의 시선을 잊지 못한다고 했었지. 하지만 당사자는 이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할 터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손을 가만히 붙잡고 이야기했다.
“…고마웠다더군요. 자신 같은 사람에게도 선뜻 손을 내밀어 준 당신이요.”
시아는 그제야 릴리 알펜이 무슨 마음으로 의술사가 되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마도 시대에 치유술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곤 하나, 치유사를 부를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마법 없이 온전히 지식과 경험에 의존해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의 경우, 치유사보다 비용이 비교적 적게 든다고 하긴 해도 그 값이 비싸기는 여전히 매한가지였다.
대부분의 제국인들, 특히 릴리 알펜과 비슷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상과 질병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병원 진료 한 번이면 나을 수 있는 가벼운 병인데도, 그들은 그 진료조차 받을 돈이 없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길거리에서 죽어 나갔다.
의술사가 되고 싶다던 릴리 알펜의 결심. 치유사와 의사만이 존재하는 시대에, 시아는 릴리 알펜이 굳이 의술사를 고집하여 의학 공부를 시작했는지 깨닫고 말았다.
불현듯 뜨거운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갈리프도흐 의학과 소속으로 프리드실 공국에 유학을 간 것이라 아마 학기가 끝나면 돌아올 겁니다만.”
“그땐 제가 없겠죠. 먼 미래엔 릴리가 없을 테고요.”
복잡한 심경의, 그러나 슬픔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뜨거운 눈물이 시아의 볼을 타고 흘렀다.
“미스 알펜에게 소질이 있긴 한가 봐요.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면 아직 아카데미에 있을 시기인데 벌써 갈리프도흐를 다니고 있다니.”
“재능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미스 알펜은 아카데미에서 두 학년을 월반했어요. 물론 재능만으로 이뤄낸 성과는 아닙니다. 독기에 가까운 집념이 그녀를 거들었죠.”
라크시스는 시아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릴리 알펜의 재능에 대한 호기심 반, 시아를 위하는 마음 반으로 시작한 후원이 이런 결말을 가져올 줄은 그도 몰랐다.
시아가 훌쩍이고 있으니 괜히 그의 코끝도 알싸해지는 것 같았다.
“제국과 서대륙의 관계가 불안정해져서 배가 예전처럼 자주 뜨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오가는 상선도 많이 줄어들었어요. 여객선도 마찬가지고요.”
시아가 이렇게 눈시울을 붉힐 줄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릴리 알펜을 제국으로 불러들일 걸 그랬다. 하지만 현재의 국제 정세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남대륙 식민지인 가멜을 사이에 두고 갈등이 깊어진 서대륙의 수많은 나라들과 제국이 서로 관세와 품목별 수출금지로 보복을 시작한 이래, 상품들을 밀반입, 밀반출하려는 선박들에 대해 무차별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선박으로 오인된 여객선이 공격받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었다.
“원한다면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줄 순 있어요. 대신 서대륙의 지리는 저도 잘 모르는지라 공국에서 헤맬 수도 있지만…….”
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발개진 눈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인연이라면 언젠간 마주칠 수도 있겠지. 게다가 오늘은 두 사람의 약혼식 바로 전날이었다.
지금은 릴리 알펜의 소식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렇게 잘 살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것만큼 다행인 것이 또 있을까.
“잘살고 있는 걸 알았으니 괜찮아요. 나중에 라크가 저 대신 편지라도 전해 줄래요?”
라크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전달해 줄게요.”
* * *
대망의 약혼식 당일이 되었다. 수도 모르간 외곽의 랑케르트에서는 새벽부터 영주와 약혼녀의 약혼식을 축하하는 꽃들을 온 영지에 장식하느라 분주했다.
길이 막힐 것을 예상해 일찌감치, 혹은 그 전날 미리 출발해 랑케르트 영지의 호텔에서 머물렀던 하객들은 날이 밝자마자 거리로 나왔다.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시가지에선 시아와 라크시스를 축복하는 것처럼 분수가 화려하게 솟구치며 사방에 무지개를 피웠다.
결혼식도 아니고 고작 약혼식인데 황제와 대공까지 참석하기로 했다니, 랑케르트의 시민들은 수군거리면서도 저들의 영주가 황제도 움직이는 고대 마법사라는 사실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랑케르트 성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벽부터 한바탕 시아를 씻기고 꽃단장을 마친 요크부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예비 영주 부인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들어와요.”
“시아.”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화려한 부토니에를 꽂은 라크시스였다.
시아는 머리카락을 반쯤 포마드로 넘긴 라크시스를 보고 넋을 잃었다. 절로 탄성이 나오는 외모였다.
그러나 먼저 선수를 친 건 라크시스였다.
“…예뻐요. 정말이지, 당신은…….”
라크시스는 순백의 드레스 자락 더미 속에 요정처럼 앉아있는 시아를 발견하고 황홀경에 빠졌다. 그녀의 하얀 드레스 차림이 자신과의 약혼을 위한 것이란 사실에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차올랐다.
요크부인은 결혼식 전까진 부군 될 사람을 볼 수 없다고 그랬었는데…….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것도 자신을 보고 저런 표정을 짓는 남자를 만나게 되자 시아는 당황스럽고도 부끄러워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결혼식 전에 신랑과 신부가 서로 얼굴을 보면 불운해진다던데, 이렇게 찾아와도 되는 거예요?”
“약혼식이잖아요. 당신은 아직 베일을 쓰지도 않았고.”
“그래도 요크부인이 라크가 여기 온 걸 보면 잔소리할지도 몰라요.”
라크시스는 요크부인의 잔소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와 소파를 끌어다 시아의 옆에 앉았다.
시아는 무릎 위에 올려둔 무언가를 조물딱거리며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왔던 라크시스는 시아가 들고 있는 것이 황궁 동관에서 발견되었던 것과 똑같은 쇳조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멈칫했다.
“긴장돼요?”
“모든 게 다 해결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프레디 뮐러의 암호가 자꾸 신경 쓰이네요.”
미래의 양부에게서 받은 피 묻은 쇳조각을 항시 몸에 지니고 있으라 했던 프레디 뮐러의 쪽지 때문에 시아는 약혼식인 오늘도 하얀 실크 주머니에 쇳조각을 넣어 겹겹이 쌓인 치맛자락 속에 묶어두었다.
차라리 그의 암호를 해독하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찜찜하진 않았을 텐데…….
“괜찮아요, 시아. 다 끝났어요. 황혼 국교회도 정식으로 수사가 시작됐고, 카얄은 도망쳤죠. 봉인도 다 찾았고요. 이젠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괜찮다고 생각해도 되겠죠?”
“적어도 오늘만큼은요. 정 걱정하고 싶다면 내일부터 해요. 오늘은 당신의 약혼자만 생각해 주면 안 될까요?”
라크시스는 실크 장갑으로 덮인 시아의 손등에 가만히 키스했다. 시아는 설핏 미소 지었다. 그의 위로에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자신과 라크시스의 약혼식이었다. 하루 종일 서로만 생각해도 모자랄 날에 괜한 걱정으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싶진 않았다.
시아는 쇳조각을 허리춤의 주머니에 넣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원래 시대로 돌아가는 날이 오늘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러길 바라지만, 설령 당신이 돌아간다 해도 난 미래에서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 걱정은 말아요.”
“알았어요. 그런데 라크는 그렇다 쳐도…….”
그러자 뭉클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크시스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아, 내 걱정이 아니라 손님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건가요?”
“아뇨! 당연히 라크 걱정을 했죠. 아, 그렇다고 손님들 걱정을 안 했다는 것도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