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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69)화 (269/292)

269화 

별장에 남겨진 일기와 뮐러 사에 남겨진 암호 쪽지는 마치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각 남긴 편지 같았다. 휘갈긴 글씨체가 일치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렇게 믿을 정도였다.

시아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곤 요르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프레디 뮐러는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까? 그가 죽고 내가 시간 여행을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이 모든 여정을 말이야. 시간 여행자인 내가 봉인을 찾으러 마도 시대에 오고, 레베카의 부탁을 받아 그의 죽음을 조사하고, 레베카에게 남긴 편지까지 내가 볼 거란 것도 알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다가올 미래를 그렇게 세세하게 알았다면 프레디 뮐러는 카얄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았을 거예요. 자신이 비행기 사고로 죽을 미래를 보았다면, 그 미래를 피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을 했을 테니까요.”

요르문의 반박에 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반박이 타당했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알고 돌진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죽음은 생명이 본능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그러나 프레디 뮐러가 만일 시아가 알펜하임 시계탑에서 나타날 여덟 번째 봉인도 손에 넣고, 황궁 동관의 조각도 찾고, 라크시스와 약혼할 것도 알고 있었다면. 그 정도로 미래를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면…….

시아는 복잡해진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았다.

‘사도는 프레디 뮐러에게 미래를 보았다면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었지.’

뮐러 가문의 반지에 깃들어있던 사도 나타의 목표는 배신자 미옌을 저지하고 다시 한번 찾아올 종말을 막는 것이었을 터다.

그리고 그가 프레디 뮐러에게 끊임없이 끔찍한 종말의 광경을 보여준 이유는, 아마 미래를 보는 능력으로 저 대신 종말을 막아달라고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만일 프레디가 본 수많은 미래 중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선택지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면.’

시아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프레디 뮐러는 모든 걸 알았기에 북부로 향하는 비행기에 탔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누님? 설마…….”

반문하던 요르문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시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서서히 피어오른 경악이 요르문의 얼굴을 장악했다.

“프레디 뮐러가 죽어야만 우리가 남은 봉인을 찾을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그 사실을 알고 사고가 날 비행기를 탄 거고요?”

요르문은 충격으로 몸에 힘이 풀려 소파에 힘없이 고개를 기댔다.

지금까지 봉인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모두 누님과 나, 라크가 발버둥 치며 카얄에 대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건 예정되어 있었다는 건가.’

시간의 흐름에 관여하는 존재와 정해진 미래를 내다 본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가.

요르문은 한때 시간 여행자인 시아 켈튼과 사도의 봉인을 통해 미래를 내다봤다는 프레디 뮐러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진지하게 이 문제를 고민했었다. 이는 ‘흐름’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태어나 한 번쯤은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내달린다. 마류학자 요르문 켈튼은 시간 여행자와 예언자라는 두 모순적인 존재의 공존이 불가능하며, 시아 켈튼의 실존으로 시간 여행자의 존재가 입증되었기에 프레디 뮐러의 예언은 예언이 아닌 미래에 벌어질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였잖아.’

프레디 뮐러의 예언은 결국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예언이 맞기 위해선 시간 여행자가 과거에 개입해 시간을 바꾸어 버리는 것까지가 모두 예정된 일이어야만, 이 우주가 애초에 정해진 운명대로만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누님이 마도 시대에서 역사를 바꿔 버린 것이, 실은 그 자체로 예정된 일이었다면……. 그러지 않고서야 프레디 뮐러의 편지가 지금 이 순간을 들여다본 것처럼 현재의 상황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까지의 들쑥날쑥하던 시간 여행도 모두 시아에게 예정된 운명이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재키 레이븐 사건에 휘말린 것도, 중세로의 이중 시간 여행도, 그녀의 일기장을 보고 라크시스가 로렌시아 호를 만들게 된 것도 모두 시아가 능동적으로 움직여 과거를 바꾸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것이 그녀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르문은 충격으로 멍해진 고개를 들어, 시아를 바라보았다.

“누님.”

“난 괜찮아.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 누구처럼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시아는 애써 웃어 보였으나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아는 지금까지 일기장의 미래를 막기 위해 본인이 노력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모든 노력이 운명이라는 이름하에 부정당해 버린 것이나 다름없으니.

“누님. 저는…….”

시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요르문의 말을 끊어냈다.

“그래도 난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비록 프레디 뮐러는 모든 걸 알고 비행기에 올랐고, 나는 그가 남긴 단서를 따라 봉인을 찾았지만 그게 정해진 운명이기 때문에 따르기로 한 건 아냐.”

명료한 목소리가 시계탑의 종소리처럼 요르문의 귓가에 꽂힌다. 머릿속을 꽉 막고 있었던 답답함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너도, 나도, 라크시스도 모두 살아있는 사람이잖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일 줄 아는 존재들이지. 프레디 뮐러는 우리가 만들어 나갈 미래를 내다본 것이지, 운명을 정해 놓은 존재가 아니야.”

시아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들었다. 요르문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오래전, 구슬땀을 흘리며 메이슨 비렌체를 수술하던 의술사를 겹쳐보았다.

‘라크시스 녀석은 누님의 눈동자가 빛나는 순간이 황홀하다고 했었지.’

요르문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라크시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아 켈튼, 칠십 년 후의 미래에서 제게 찾아온 친척 누님에겐 삶을 삶답게 만들어 내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빙하를 가르는 쇄빙선이요,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모험가였다.

빙하가 갈라지고 미지의 땅이 개척되는 것이 운명이라 해도 그 운명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어야 운명이 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남은 시간 여행도 마무리지으면 돼. 뭐가 걱정이겠어. 마지막 봉인도 결국 우리가 손에 넣었잖아.”

“…누님.”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일단 이 편지부터 보자고. 요르문, 여기 좌표는 어디야? 가르쳐 줘, 응?”

결국 요르문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시아에게 와락 안겼다.

“역시 누님이에요! 누님이 제 누님이라 정말 다행이에요.”

“윽! 갑자기 낯간지럽게 무슨 소리야.”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하고 싶은 말 다 할래요.”

요르문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시아에게 온갖 낯간지러운 말을 쏟아냈다. 달라붙는 요르문과 그를 떨쳐내려는 시아의 실랑이가 끝난 건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시아는 엉망이 된 레이스와 옷깃을 툭툭 털어 모양을 다시 잡고선, 질린다는 표정으로 요르문에게 물었다.

“그래서 편지에 적혀 있던 좌표는 어디인지 알아?”

“갈리프도흐 교정이에요. 그런데 건물이 있거나 하진 않더라고요. 평범한 화단인데, 파헤쳐 봤는데도 나오는 건 없었어요.”

“아, 그래? 잠깐만. 요르문, 그새 거기까지 다녀온 거야?”

시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요르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층 연구실에 있다가 내려온 줄 알았는데, 저 꾀죄죄한 몰골로 갈리프도흐까지 다녀왔다고?

요르문은 그걸 또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괴짜 마도 공학자라는 소문이 이럴 때 유용하죠.”

“그래서 그 꼴로 갈리프도흐의 화단을 파헤쳤다고?”

“그래야 더 괴짜처럼 보이니 아무도 안 건드리지요. 괴짜가 화단 흙더미 속에서 무얼 찾으려고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시아는 뒤늦게 그의 무릎께와 구두 앞코에 흙이 잔뜩 묻어있는 것을 발견하곤 결국 입씨름을 포기했다.

동시에 마치 짠 것처럼 이 층 카펫 가득 찍힌 흙 발자국을 발견한 요크 부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나갈 땐 그, 단추라도 좀 잠그고 나가.”

“이렇게요?”

요르문은 아주 순진한 얼굴로 능청스럽게 가슴팍을 내밀었다. 대충 끼운 셔츠 단추는 제대로 된 구멍에 끼워져 있지 않아 엉망이었다.

시아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일부러 엉뚱한 짓을 하는 건지, 평소엔 말끔하게 다니면서 오늘따라 지저분한 낯짝을 당당히 내미는 요르문에 시아는 미래의 양부를 본 것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으, 내가 해줄게. 이리 와 봐.”

시아는 요르문을 타박하며 소파에서 엉덩이를 들썩 움직여 요르문에게 바짝 붙고선, 어린아이의 옷을 입히듯 요르문의 셔츠 단추를 다시금 제대로 채워주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얼핏 연인이라고 오해할 만한 모습이었다. 셔츠 바람의 남자 앞에 앉아, 그의 속살을 코앞에 두곤 옷을 입혀주고 있는 여인이라니.

그러거나 말거나 존경하는 누님의 관심을 받은 동생의 얼굴엔 서서히 뿌듯함이 차올랐다.

그때, 다정하고도 서늘한 목소리가 시아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런. 남편이 없는 사이에 나의 약혼녀께선 한눈을 팔고 계셨군.”

“악!”

공간이동 마법의 바람이 휘몰아침과 동시에 요르문이 제 정강이를 붙들고 벌떡 뛰어올랐다.

시아는 어안이 벙벙해져 고개를 들었다.

요르문이 앉아있었던 소파 바로 옆, 라크시스가 지팡이를 든 채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턱선을 따라 불거진 힘줄에 불편한 심기가 대놓고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크, 왜 때리나!”

“다 큰 사내가 단추 하나 제대로 끼우지 못하다니, 신사라는 말도 아까울 지경이야. 수작 부릴 시간에 아카데미부터 다시 다녀야 하겠어, 꼬맹이?”

“꼬맹이? 하, 내가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그리고 동생이 누님에게 어리광 좀 부린다고 문제 될 게 뭐가 있나. 누님과 난 가족이라고, 악!”

결국 요르문은 정강이를 한 대 더 걷어차였다. 울상짓는 요르문을 다른 소파로 쫓아낸 라크시스는 시아의 옆자리에 당당히 앉았다.

시아는 그의 눈치를 슬쩍 보며 운을 뗐다.

“고생했어요, 라크. 수사는 잘 끝났어요? 뭐 좀 알아낸 거라도 있고요?”

“알아낸 것이 있기야 하죠. 당신에게 알려주려고 곧바로 달려왔는데, 이런 장면을 목격해 버리고 말았네요.”

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제게 이렇게 서늘한 태도를 보일 수도 있던가. 저도 모르게 변명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요르문은 제 동생이잖아요.”

“그 관계의 진실을 제가 알고 있잖습니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거짓 친척 남매라는 뜻이었다.

질투와 서운함이 엉킨 라크시스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시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긴, 그녀가 라크시스의 입장이 되어 이 장면을 보았다면 그녀 자신 또한 속이 불편할 것이다.

“미안해요, 라크.”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못된 건 저 녀석이지, 당신에겐 그저 질투가 났을 뿐이니까.”

라크시스는 요르문 앞에서 보란 듯이 시아의 이마에 입술을 눌러 붙이곤, 시아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시아, 내가 가져온 소식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궁금하죠.”

시아는 대답을 계속 뜸 들이고 있는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뭔데 계속 말을 않고 있는 거람? 황혼 국교회의 본거지라도 찾았나? 리암 블레어의 범죄를 증명할 결정적 단서를 찾기라도 한 거야?

그러나 라크시스가 가져온 소식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었다.

“달리아 벤슨이 깨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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