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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66)화 (266/292)

266화 

“…도망이라. 체스터 클리포드는 그럴 만한 위인도 못 되는 자이긴 합니다만. 시아, 손에 든 건 뭔가요?”

“레베카가 제게 버려달라고 준 건데, 아무래도 그냥 버리기가 좀 그래서요.”

시아는 지금껏 무의식중에 꽉 쥐고 있던 종이를 주섬주섬 펼쳤다. 동시에 바스러진 가루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라크시스는 가루들 속에서 그나마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잎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건 말린 꽃이군요. 그럼 그건…….”

시아는 복잡한 심경으로 대답했다.

“막스 블레어가 레베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어요. 식장에 올 때까지 내내 갖고 있었나 봐요.”

[꼬마 숙녀의 앞날에 행복만 가득하길.]

몇 마디 되지 않는 편지의 마지막 줄을 읽은 라크시스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커졌다. ‘꼬마 숙녀’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설마 막스 블레어가 B였다는 겁니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시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말라 바스러진 것은 아마도 편지에 동봉되어 있던 들꽃일 것이다.

화려하지도 값비싸지도 않은, 어쩌면 로드리치 저택 뒤뜰의 돌 틈에 피어있었을지도 모를 이름 모를 들꽃. 빨래 바구니를 들고 오가는 메이드를 위해 소소한 구경거리가 되어주던, 작고 수수한 들꽃.

왜 하필 들꽃이었을까.

라크시스는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리암 블레어의 편지 배달부가 막스 블레어였을지도 모르겠군요. 블레어가의 사람이라면 리암 블레어의 약혼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약혼 당사자인 리암 블레어도 몰랐던 약혼녀의 정체를 막스 블레어가 알고 있었다니. 논리적으론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프레디 뮐러가 살아있었던 시절엔 레베카가 뮐러 저택에서 지냈을 테고, 제아무리 프레디가 외부에 레베카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고는 하나 블레어 가와의 교류 중에 레베카가 막스 블레어를 만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리암과 달리 막스는 사교성이 좋았고, 어쩌면 평소처럼 뮐러 저택에 놀러 갔다가 부모들 사이에서 오가던 형과 레베카의 약혼 이야기를 엿들었을지도 모른다.

“설마.”

“시아, 왜 그러십니까.”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간 추측들을 갈무리하다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 시아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막스 블레어는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자기 형이 남대륙인을 싫어하는 것도, 그런 형의 약혼녀가 가멜인 혼혈의 메이드 헬렌이라는 것도, 제 형이 카얄과 손잡고 로렌시아 호를 위험으로 몰아넣을 것도, 카얄의 목표가 뮐러가의 후손이었다는 것도.”

“그래요, 그런 것 같군요. 그래서 그때…….”

라크시스는 로렌시아 호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되었던 막스 블레어가 자신을 보고 처음으로 했던 말들을 문득 떠올렸다.

‘…헬, 렌은 괜찮습니까?’

‘저주라니, 헬렌. 젠장, 헬렌…….’

‘모두 저 때문입니다, 저 때문에 헬렌이…….’

그 당시 막스는 과다출혈로 죽어가면서도 레베카를 걱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땐 그녀가 로드리치가의 메이드 헬렌에 불과했는데도.

라크시스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시아를 돌아보았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군요. 뮐러가의 마지막 핏줄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건 막스 블레어가 유일했던 겁니다. 리암도, 카얄도, 레베카 뮐러의 얼굴을 몰랐던 거죠. 애초에 프레디 뮐러는 뮐러가의 후손들이 카얄에게 노려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레베카 뮐러를 들키지 않게 숨겨두었다가, 카얄의 습격이 시작되자 로드리치가에 보낸 거였고요.”

그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기억 한 편에 묻어둔 채 잊고 있었던 퍼즐 조각들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뮐러 저택의 사용인들은 오래전 카얄에 의해 모두 죽었죠. 프레디 뮐러도 마찬가지였고요. 레베카의 존재를 알고 있던 자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니, 뮐러 영애가 로드리치가에서 메이드로 지낸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막스 블레어만 빼고요.”

“그렇다는 건…….”

“리암은 자신이 약혼녀에게 쓴 편지가 어떤 식으로 배달되는지 몰랐죠. 실은 그의 동생이 몰래 배달부를 자처하고 있었는데도요. 그런데 막스 블레어가 이 사실을 카얄에게 들키게 된 겁니다.”

그의 말이 멎자마자, 시아와 라크시스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미동 없는 두 사람 사이에서 움직인 건 침을 삼킨 목울대뿐이었다. 말 한마디 없이도 시아와 라크시스는 이 사건의 결말을 똑같이 유추할 수 있었다.

시아가 입을 열어 나직이 말을 이었다.

“막스 블레어는 레베카를 지키기 위해 카얄을 막아선 거였어요. 로렌시아 호에 저주의 진이 그려졌던 바로 그 날 말이에요.”

“그렇죠. 미스 뮐러를 지키기는커녕 자신도 저주에 희생될 뻔했지만 말입니다.”

마지막 퍼즐이 완성되는 순간, 해묵은 의문점이 풀리며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졌다.

그게 그런 거였다니. 이런 사정이 있었다면 그간 막스 블레어가 켈튼가와의 만남을 피해 왔던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리암 블레어가 막스를 감금했을지도 모르지. 모든 비밀을 알고도 자신에게 털어놓지 않은 괘씸한 동생에게 배신감을 느껴서 말이야.’

만약 막스 블레어가 정말로 레베카를 좋아했던 거라면, 레베카를 생각해 그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지금껏 일부러 만남을 거절했을 수도 있었다.

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모든 일들이 막스의 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쨌든 이 또한 기가 막힌 사랑이 아닌가.

비록 엇갈렸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라크, 이게 진짜라면 막스 블레어를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는걸요.”

“그렇게 합시다. 카얄이 떠나가고 암시장과 맨덜랜드 건으로 블레어가가 몰락하고 있는 이상 이젠 리암도 더는 이쪽의 만남을 거부하기 힘들 테니까요.”

남의 연애사엔 어지간하면 개입하지 않는 라크시스도 이번만큼은 시아에 동조하며 블레어가 방문 계획을 세웠다. 이토록 흥미로운 일이 또 있으랴. 뻔하디뻔한 가십이 아니라, 봉인과 관련된 자들의 속사정과 지독히 얽혀 버린 인연에 대해 밝혀내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 간만에 흥분이 깃들었다.

그때였다.

“사람 살려! 여기 도와주세요! 사람 죽어요!”

문밖에서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시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베카 목소리예요!”

성당 안은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누군가가 얻어맞는 소리와 사내들의 고함, 새신부의 비명과 밀레이나의 호통이 한 데 얽혀 하객들을 놀라게 한 탓이다.

시아는 곧장 버진로드를 가로질러 입장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입술이 터진 채 식식거리며 서 있는 체스터 클리포드와 사색이 된 레베카, 그리고 신랑 들러리에게 둘러싸여 짓밟히고 있는 막스 블레어가 경악스러운 광경을 만들고 있었다.

* * *

“거, 신랑 얼굴을 이렇게 쥐어패면 쓰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앞에 체스터 클리포드와 막스 블레어, 막스 블레어를 폭행한 신랑 들러리들이 나란히 섰다.

새신랑의 얼굴은 수치스러움으로 벌겠다. 막스에게 얻어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객들이 몰려들어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터졌구먼? 어디 보자, 입 안은 멀쩡한데.”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지 않은 배불뚝이 경찰이 체스터를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출동한 경찰들의 우두머리였다.

경찰의 걱정을 받자, 체스터가 기고만장해져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막스 블레어! 당신은 내 명예를 더럽혔어, 결혼식 날에 이게 무슨 망신이야! 파혼에 대한 책임은 블레어가 전체의 명예와 배상금으로 톡톡히 받아낼 거야! 그리고 레베카 뮐러, 당신도 마찬가지야. 결혼도 하기 전에 만난 남자가 식장까지 찾아오게 해? 남의 뒷조사까지 시키면서?”

막스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허망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레베카도 쳐다보지 않은 채였다.

그런 그에게 야유를 보내는 이도 있었으나, 몇몇은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듯 수군거리기도 했다.

막스에게 수갑을 채운 경찰이 체스터의 손목에도 수갑을 채우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로드 클리포드, 그쪽도 잘한 건 없소.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이렇게 폭행하는 건 명예로운 일이요? 하여간, 쯧. 옛날 귀족들은 장갑 내던지고 권투장에서 결투라도 했지, 이건 시정잡배만도 못해서야, 원.”

“뭐어? 시정잡배라니, 말 다 했어? 잠시만, 이거 뭐야, 당신! 날 왜 체포해. 맞은 건 난데, 왜 나한테 수갑을 채우냐고. 내가 누군지 모르나? 클리포드 백작을 모르느냔 말이야!”

“거참, 돼지 멱따는 소리가 다 나네.”

경찰의 혼잣말에 하객들에게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문도 트지 못하고 부들거리던 체스터는 결국 머리끝까지 빨개져서 고개를 홱 돌렸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의 앞에 살벌한 표정의 콘힐 공작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게 대체 무슨 집안 망신이냐.”

“블레어가의 저 망나니만 아니었어도 들키지 않았을 거라고요! 아버지, 전 억울하다니까요.”

콘힐 공작 앞에서 돌연 어린아이처럼 태도가 바뀐 체스터는 묶인 손으로 제 아버지를 붙잡으려 했으나, 콘힐 공작은 아들을 싸늘하게 외면했다.

“나중에 보자꾸나.”

“아버지!”

덜떨어진 사람처럼 아버지만을 부르짖는 체스터에 배불뚝이 경찰은 피식 웃으며 그가 허둥대는 꼴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부하 경찰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경감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다 데려가!”

결국 레베카 뮐러와 체스터 클리포드의 결혼식은 신랑이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연행된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는 제국 사교계에 두고두고 남을 희대의 구경거리였다.

시아는 순경들을 시켜 제국의 거물들을 경찰서로 데려가도록 지시하고, 현장을 마무리 짓고 있는 배불뚝이 경찰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슈나이더 경감님.”

그녀의 목소리에 낯익은 얼굴이 반색하며 미소를 지었다. 못 보던 사이에 콧수염을 깔끔하게 다듬어, 머리가 벗겨져 가는데도 왜인지 젊어진 것처럼 보였다.

배불뚝이 경찰이 장난스럽게 낄낄거렸다.

“오랜만입니다, 미스 허슬러. 아니면 레이디 켈튼이라 불러드릴까?”

그는 다름 아닌 슈나이더 경감, 시아의 두 번째 시간여행에서 만났던 경찰이었다.

“아무렇게나 불러주세요. 이젠 경감님, 아니, 작가님 때문에 정체를 숨기지도 못하게 됐는걸요.”

“그때 그 까마귀 가면 장의사는 잘 지냅니까?”

“그럼요. 이젠 켈튼 코퍼레이션의 수석 연구원인걸요.”

시아는 잠시 놀란 눈을 했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슈나이더가 메이슨 비렌체의 안부를 다 묻다니. 한 땐 메이슨 비렌체를 공동묘지를 파헤치는 시신 도굴꾼으로 착각하고 체포까지 했었는데 말이다.

슈나이더는 더 이상 시신 도굴꾼엔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여상히 감탄사를 뱉었다.

“와, 출세했구먼? 거참,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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