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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65)화 (265/292)
  • 265화 

    * * *

    “…무슨 생각을 하셨는진 묻지 않겠습니다. 이러다 당신이 또 쓰러질까 봐 겁나는군요.”

    로비를 지나는 시아와 라크시스에게 뮐러가의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켈튼이야 주인 아가씨가 초대한 사람이라지만, 고대 마법사는 어째서 이곳에 있는가?

    시아는 저 때문에 부리나케 달려온 라크시스에게 못내 미안했다.

    새로이 발견된 암호 쪽지와 시아에게서 받은 금속 조각을 연구하기도 벅찬 일정 속에서 모르간 경찰을 내세운 차탈의 수사에도 협조를 해야 했기에 그는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평소였다면 시아 역시 그런 라크시스와 꼭 붙어 모르간 전역을 누볐겠지만.

    “미안해요.”

    오늘의 시아는 연한 분홍빛을 띤 드레스를 입은 채 신부 못지않게 공들여 꾸민 상태였다. 레베카의 신부 들러리를 서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뮐러 저택을 찾아가 레베카의 기분을 북돋아 주고 있었는데, 왜인지 결혼식의 주인공보다 더 걱정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제게 왜 미안해하십니까. 아무래도 당신을 혼자 두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군요.”

    “아무래도 체력 관리가 안 되나 봐요.”

    “체력 관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을 힘들게 하는 기억들 때문이잖습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진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당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기억들을 모조리 지워 버리고 싶군요.”

    라크시스는 타박인지 자책인지 모를 말들을 하더니, 시아의 손을 슬그머니 잡곤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과호흡 이후 정체된 채 시아의 혈관을 꽉 막고 있던 마력이 서서히 흐르기 시작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어깨에 고개를 살며시 기대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마지막 봉인을 찾아서 다행이네요.”

    “전 더 다급해졌고요.”

    시아는 제 정수리 위에서 들려오는 부루퉁한 목소리에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이렇게 토라진 표정도 지을 수 있다니.

    시아는 키득거리며 라크시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안 되면 나중에 하죠, 뭐.”

    “싫습니다. 결혼식은 못하더라도 약혼식은 치르고 싶어요. 지금 하지 못하면 당신을 칠십 년이나 기다려야 하니까.”

    시계탑에서 봉인을 찾자마자, 라크시스는 약혼식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봉인을 발견하고 나면 늘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시대로 돌아가 버리는 시아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아와 라크시스의 약혼은 레베카의 결혼식으로부터 사흘 후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가 모든 재력을 총동원해 블레어 스트릿의 부티크와 상가를 닦달한 결과였다.

    “언젠 참는 데 자신이 있다면서요.”

    “아무래도 칠십 년 후엔 연적이 많을 것 같아서요. 시간여행의 시작점에 도착하기 전까지 당신은 절 모르고 지낼 테니까.”

    라크시스는 살짝 불안한 눈빛으로 시아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시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라도 약속을 받아놓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는걸요.”

    “아, 정말. 아직도 헬릭스 황자 전하를 신경 쓰는 거예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니까요. 그냥 종종 절 챙겨주시기만 했지, 클럽 활동이니, 뭐니, 한 번도 같이 한 적도 없는데…….”

    “레이디! 얼른 타세요!”

    라크시스의 반박이 이어지기 전, 타이밍 좋게 레베카가 마차 앞에서 두 사람을 불렀다.

    뮐러가와 로드리치가의 마차는 죄다 모아 거리를 가득 메운 것이 장관이라면 장관이랄까.

    신부를 위한 물건들과 시중들 메이드, 들러리로 서게 된 하녀장 에밀리에 밀레이나까지.

    토라진 척을 해보려 했더니, 도리어 시아의 입이 삐죽 나왔다. 라크시스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라크시스가 믿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질투로 두근거렸던 심장이 한순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아주 만족스러워진 라크시스는 시아를 에스코트하며 마차로 향했다.

    “자, 일단 갈까요? 신부 들러리 때문에 식이 늦어진다면 그것도 문제일 테니까.”

    레베카의 결혼식이 열리는 모르간 대성당은 뮐러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식이 열리기 전까지 신부와 신랑은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전통 탓에, 레베카는 성당 안쪽의 대기실에서 다시 한번 화장을 고치며 기다리고 있었다.

    “레베카, 긴장돼요?”

    “…네. 조금요, 아니, 사실 많이요.”

    밖에선 시아가 마도 시대에 없던 사이 레베카와 친해진 미스 로젠버그와 미스 피셔가 들러리가 되어 하객들을 정해진 자리로 안내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콘힐 공작가 쪽의 하객들도 모여들면서 곧 성당 전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결혼 서약이 이루어지는 단상을 비롯해 성당의 모든 곳엔 금빛 리본과 풍성한 꽃들이 가득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악단의 조율 소리만 들어도 결혼식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밀레이나는 베일을 아직 드리우지 않은 상태로 바짝 얼어붙은 레베카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주름진 눈꺼풀이 온갖 감정을 담고 깜빡이고 있었다.

    “레베카. 넌 이제 클리포드 백작 부인이고 장차 콘힐 공작부인이 될 숙녀란다. 지금은 긴장되고 힘들겠지만, 훗날 네가 아이를 낳고 안주인으로 자리 잡은 후에 지금 이 순간을 되돌아보면 오늘만큼 행복한 날이 또 없을 게다.”

    “…네.”

    “콘힐 공작가의 일원이 된다고 해서 네 몸속에 흐르는 뮐러가의 피가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힘들면 언제든 내게 연락하렴. 레이디 켈튼에게도 말이다.”

    “…대모님.”

    밀레이나의 주름진 손이 흰 장갑을 낀 레베카의 손을 가만히 도닥였다.

    “여기 있는 모두가 네 편이니까. 에밀리까지 말이다.”

    그러자 레베카의 치장을 마지막까지 살피고 있던 에밀리가 그녀의 가슴을 탁탁 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럼요, 아가씨. 전 평생 아가씨를 모시면서 살 건데요. 전 죽어도 아가씨 편이에요. 아, 이젠 클리포드 백작 부인이라 불러드려야 되나?”

    결국 레베카는 또다시 살짝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아 역시 하마터면 덩달아 눈물을 흘릴 뻔했다. 만약 라크시스가 곁에 있었다면 괜히 울컥해서 그의 옷깃을 적시며 펑펑 울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 다 됐어요. 이젠 그만 좀 울어요. 화장으로 가리는 것도 한계가 있지.”

    잔뜩 번진 분을 다시 발라준 에밀리가 투덜거리며 떨어져 나왔다. 밀레이나는 흐뭇하게 레베카를 빙 둘러보았다.

    “어디 새신부 차림을 한 번 보자꾸나. 네 가지는 모두 챙겼지?”

    제국인들은 관습과 전통만큼이나 미신을 신경 썼다. 그러니 이런 관습과 미신은 결혼식에서도 당연히 신경 써야 했다.

    식장에 들어서는 신부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했는데.

    “오래된 것, 새로운 것, 푸른 것, 빌린 것. 다 됐구나.”

    오래된 것으로는 밀레이나가 결혼했을 때 쓰던 베일을 썼고, 새로운 것으로는 켈튼가에서 레베카를 위해 뮐러 사의 다이아몬드를 사서 손수 주문 제작을 요청한 티아라를 썼으며, 푸른 것으로는 에밀리가 손수 만든 푸른 리본을 드레스 속 허리에 둘렀고, 마지막으로 빌린 것으로는 황제가 빌려준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착용했다.

    밀레이나의 확인이 끝나자 에밀리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럼요. 구두에도 육 실랑을 넣어두었는걸요.”

    행운과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동전까지, 정말이지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한 준비였다.

    뿌듯해하는 에밀리에, 레베카가 키득거리자 때마침 밖에서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곧 식이 시작됩니다, 주인님.”

    신부를 제외한 들러리와 하객들보고 어서 제자리에 앉아 대기하란 뜻이다.

    “알았어요. 갈게요, 갈게. 레베카, 이 에밀리가 장담하는데, 넌 분명 행복하게 잘 살 거야. 과거의 놈팡이들 같은 건 보란 듯이 잊어버리라구. 그럼 이따 보자?”

    에밀리는 투덜거리면서도 레베카의 베일을 예쁘게 씌워주곤, 새하얀 눈풀꽃 부케를 들려주며 레베카에게 응원을 보냈다.

    한 박자 늦게 일어난 밀레이나도 대기실을 나서다 레베카에게 되돌아왔다.

    “레베카. 새로운 시작은 누구에게나 떨리는 일이지. 숙녀에게 결혼이라는 건 특히나 그런 법이고.”

    밀레이나는 에밀리가 씌워준 베일을 다시 한번 매만져 주고는 부케를 든 레베카의 손을 꼭 쥐었다.

    “의젓하게 오너라. 내가 네 아버지 역할을 다해 줄 테니.”

    “대모님.”

    아버지 역할이란 바로 신부와 함께 식장에 입장하는 것이었다. 집안에 남은 남자가 없는 레베카에게 밀레이나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대부도 아닌 대모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선다, 라. 마도 시대가 된 이래, 제국 사교계에서 최초의 일이 될지도 몰랐다.

    “나가서 기다리마. 우리는 함께 들어가자꾸나. 레이디 켈튼? 지금 나가지.”

    “아, 네.”

    시아는 레베카에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대기실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레이디!”

    다급한 외침에 뒤를 돌아보자 레베카가 황급히 시아에게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시아는 손을 펴보았다. 꾸깃꾸깃한 종이 안에는 글씨가 가득했고, 그 안에서 말라 바스러진 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죄송해요, 레이디. 저 대신 버려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레베카의 눈시울이 붉었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 * *

    그러나 결혼식은 시작되지 않았다.

    “시작이 늦군요.”

    신부 측 손님석 맨 앞줄에 라크시스, 시작 시간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요르문과 함께 나란히 앉아 있던 시아는 지연되는 식순에 걱정하기 시작했다.

    “레베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시아 외에도 모여든 하객들 모두가 굳게 닫힌 신부 입장문을 뒤돌아보느라, 성당의 의자에서 고개며 몸을 돌려가며 낑낑대고 있었다.

    문 가까이에선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대는 화동들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신부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악사들도 현에서 활을 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하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점차 커졌다.

    요르문은 연구에 관한 생각을 하는 중인지 사람들이 소란스럽든 말든 혼자 단상을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걱정스레 문을 바라보고 있는 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문제가 생긴 건 신부가 아니라 신랑인 것 같긴 합니다만.”

    “신랑 측이요?”

    “저길 봐요. 신랑 들러리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신랑이 아직까지 식장에 도착하지 않은 것 같군요.”

    진짜였다. 그가 가리키는 곳엔 정장을 갖춰 입고 나란히 기다리던 신사들이 허둥지둥 전화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식장을 빠져나갔는데, 아무래도 말을 타고 신랑을 찾으러 간 듯했다.

    “신랑이 식장에 없다뇨? 그럼 지금 체스터 클리포드가 레베카와 결혼하기 싫어서 도망간 거란 말이에요?”

    시아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물음을 토했다.

    리암 블레어 때문에 고생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체스터 클리포드 때문에 행복해야 할 날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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