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시아는 쓸쓸해 보이는 레베카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프레디가 암호까지 이용해 남긴 쪽지에 딸에 대한 걱정이나 안부를 묻는 내용은 없었으니.
‘아버지는 제가 레이디께 로켓 속 쪽지를 건네줄 것도 알고 계셨나 봐요. 타자기에 대해 물어볼지도요.’
‘…레베카.’
‘어쩌면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미래도 내다보셨을지 모르겠어요. 식장에 손을 잡고 들어갈 사람이 없었는데, 왠지 과거의 아버지가 제 곁에 계신 것만 같네요.’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레베카는 결국 시아의 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게 운 탓에 결혼식 당일인 오늘 눈이 퉁퉁 부어버려 밀레이나에게 잔뜩 혼났지만 말이다.
시아는 어제의 일을 까맣게 잊은 듯 평소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온 레베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날에 행복한 일만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문을 들추던 레베카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발을 가볍게 구르며 언성을 높였다.
“스칼렛 로스, 아니지. 스칼렛 포드가 범인이었다면서요? 어쩜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죠? 거짓으로 신분을 만들어 숙녀 행세를 하고 다닌 것도 모자라 뒤에선 그런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니!”
알펜하임 시계탑에서의 사건 직후, 모르간은 발칵 뒤집혔다.
국회의사당으로 이용되던 알펜하임 궁을 비롯하여 아르카나 인근 지역 지하 전체를 장악했던 암시장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지만, 암시장의 경매품을 얻기 위해 암시장 전체를 무너뜨려 사람들을 매몰시킬 뻔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다무스 출신 귀족 스칼렛 로스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암시장이 무너졌다면, 그 위의 알펜하임 궁과 시계탑을 비롯하여 수많은 건물들이 함께 내려앉았을 터다.
그것만으로도 분개할 만한데 스칼렛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사건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
“정말로 천박하고 경멸스러워요. 헨리 던로를 유혹하고 버린 것도 그 여자였다면서요? 재키 레이븐이라는 살인마 때문에 수도가 얼마나 흉흉했는지는 레이디도 잘 아시잖아요. 어쩜 사람의 껍데기를 쓰고 그런 짓을 저질렀냐는 말이에요.”
라크시스의 신고로 현장에 출동해 암시장의 참가자들을 포함하여 데이먼과 스칼렛을 체포한 경찰들은 스칼렛 로스의 비밀을 알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가 이단의 수장이었다니, 게다가 진짜로 아르카나의 코르티잔 출신이었다뇨!”
시아는 레베카를 말릴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숙녀답게 차분하게 굴라고 잔소리했을 밀레이나도 이번만큼은 말이 없었다. 분주하게 방을 드나드는 메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스칼렛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교계 여인들의 선망이었던 아가씨였다. 과감한 차림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평이 갈리긴 했어도, 레베카는 한때 뭇 신사들의 구애를 받았던 스칼렛을 부러워하며 눈물까지 흘린 적도 있었다.
레베카가 이토록 분개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잠깐이나마 그런 여자를 부러워했던 자신이 부끄러운 거다.
그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비단 레베카뿐만인 건 아니었다.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숙녀가 아니라, 천박한 창부라니.’
거리의 사람들은 스칼렛이 저지른 범죄를 증오하지만, 사교계의 사람들은 스칼렛이라는 여인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스칼렛을 붙잡은 장본인이 쉬이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이 한 마디가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시계탑에서 절규하던 스칼렛은 처절했다. 정작 사냥감처럼 쫓기고 있던 데이먼 포드는 침착했는데도.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어서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진 알 수 없었지만, 시아는 스칼렛도 어쩌면 카얄에게 희생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스칼렛이 저지른 범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불현듯 중세의 이자벨라 황녀가 떠올랐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던가.
카얄과 손을 잡은 스칼렛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착잡해진 시아는 가십지를 덮어 두고 모르간타임즈의 정치면과 사회면을 펼쳤다.
[노동당의 편에 선 노든 대공, 부패를 향해 본격적으로 검을 빼 들다.]
[끔찍했던 암시장의 비밀… 그 기원은 맨덜랜드의 유령선?]
[라크시스 옌은 차탈을 지지하는가? - 노든 대공의 앞날을 가로막는 자는 더 이상 없다.]
쏟아지는 제목들이 하나같이 노든 대공을 언급한다.
시아는 차탈의 추진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 틈을 놓치지 않는다니, 정말이지 대공은 타고난 정치인이라니까.’
라크시스에 의해 경찰에 암시장 사건이 접수된 직후, 이때다 싶어 내무장관의 지위를 이용해 맨덜랜드 사태와 암시장 사건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수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압박을 받은 모르간 광역 경찰청과 맨덜랜드 경찰은 밤잠도 못 자고 사건에 매달리고 있겠지만 말이다.
시민들은 언론에서 비치는 대공의 모습에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한때 스칼렛 로스를 손님으로서 저택에 머물게 했던 리암 블레어와 함께 보수당이 한패로 묶여 욕을 먹기 시작하면서, 가멜 무장군의 맨덜랜드 습격 사태로 고꾸라졌던 노동당은 다시금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번 암시장 사건으로 리암 블레어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암시장에 연루된 귀족들의 상당수가 보수당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의회의 의석을 많이 잃었으니 리암 블레어는 아마 총리 재선도 힘들 터다.
맨덜랜드의 유령선 보급에 그토록 많은 돈을 쏟아부으며 카얄에게 협조했는데, 결국 남은 건 불명예와 텅 빈 통장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의 비밀도 곧 밝혀지겠지.’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웨스트스트릿 168번지에서 그토록 많은 단서를 확보했는데도 리암의 죄를 확정 지을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함부로 수사를 진행하기 힘들었던 것이, 수차례 세탁을 거듭한 돈엔 알리나 황제의 개인 계좌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족 여인에겐 그녀의 이름으로 보육원 및 무료급식소에 정기적으로 후원할 수 있도록 지급되는 예산이 있다는 걸 교묘히 악용한 것이다.
차탈은 시아와 라크시스가 가져다준 증거들을 보며, 리암 블레어의 진짜 모습을 세상에 공개하려면 아주 긴 싸움을 치러야 할 거라 말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지.’
시아는 신문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레베카.”
“네에?”
“아유, 아가씨! 레베카! 자꾸 움직이면 머리를 만지기 힘들다구!”
시아의 부름에 따라 레베카의 고개가 돌아가자 에밀리가 잔소리를 했다. 시아는 입꼬리를 당겨 미안하다는 뜻으로 미소를 짓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발자크 로스가 누구인지는 정말로 기억이 안 나요?”
“발자크, 로스요? 그 여자에게 가족이 있었던가요? 만약 있었다면 제국에 절대 발붙이고 살지 못할 거예요. 제국민들이 가만히 두겠냐고요. 맨덜랜드 사태까지 일으킨 장본인의 혈육인데요.”
그랬다. 진짜 문제는 다름 아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발자크 로스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이상한 건, 한때 그의 저주에 휘둘려 고생했던 차탈은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를 내내 곁에서 보필했던 올가 웰링턴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어쩌면 마법사들에겐 그의 마법이 통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라크시스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스칼렛의 정체가 들통나자, 카얄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것이라 말했다.
‘우리가 자신이 제안한 선택지 때문에 암시장에서 갈등하리라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스칼렛을 경호하던 자들이 경찰서에서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무엇이 무너져도 상관없다. 시아 켈튼과 라크시스 옌이 갈등하다, 암시장과 시계탑 모두가 붕괴되면 더할 나위가 없다.
무너진 게 무엇이든 가멜 무장군을 위시한 서대륙의 테러로 위장하면 그만이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말을 들은 순간 카얄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렸다.
‘…전쟁을 일으킬 셈이었구나.’
수도가 서대륙의 테러로 인해 공격당하는 순간, 제국과 서대륙의 전쟁은 불가피한 일이 된다. 카얄의 계획은 제국에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도 시대 제국의 병력은 서대륙을 압도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황실 마법사단에 요르문과 차탈을 위시한 대마법사들. 마지막으로 사도의 현신이라 불리는 고대 마법사 라크시스 옌까지 있으니.
‘하지만 절대로 전쟁은 안 돼.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결말을 초래하는데…….’
제아무리 라크시스가 서대륙의 폭격을 막아낸다 한들 사상자는 분명 발생할 것이다.
피해가 적다고 해서, 희생자들의 삶까지 상처가 적은 건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죽음도, 죽은 이와 그 가족들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나 다름없으니까.
시아는 칠십 년 후, 아르카나에 벌어졌던 서대륙의 테러를 떠올렸다.
불바다가 된 거리, 참혹한 몰골의 사람들, 자신을 지킨 탓에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된 기사 로건.
대체 카얄은 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 것일까. 봉인을 모으던 건, 광룡으로서의 힘을 되찾기 위한 일 아니었던가?
설마 광룡이 되지 못한 화풀이를 죄 없는 사람들에게 하려 했던 건가?
생각을 곱씹으며 아르카나 테러의 광경을 되새김질하자 숨이 턱 막히며 헛구역질이 났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레이디? 레이디!”
갑자기 쓰러져 버린 시아에 레베카가 비명을 질렀다.
재빨리 시아를 받아 든 밀레이나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시아의 몸을 소파에 눕히곤 다급하게 외쳤다.
“레이디 켈튼, 괜찮은가! 에밀리, 어서 의사를 부르지 않고!”
“대모님! 제가 갈게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메이드들은 모두 얼어붙은 상태였다. 레베카는 틀어 올리다 만 머리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채 바로 옆 방인 서재로 뛰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의 다이얼을 돌린 지 채 십 초도 지나지 않아 공기를 가르며 라크시스가 나타났다.
“시아!”
“옌 경, 레이디 켈튼이 갑자기 쓰러졌다네. 평소 지병이라도 있었던 겐가? 얼마 전 사건으로 무리라도 한 모양인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시아에 라크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과호흡을 목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안아 들고 옆방으로 사라졌다. 레베카와 밀레이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시아를 걱정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