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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63)화 (263/292)
  • 263화 

    * * *

    무너져 가던 암시장에서 선택에 기로에 놓였던 그 날.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레이디, 정말 대단하세요!”

    “하하… 대단하긴요.”

    시아는 화장품과 장식들을 들고 분주하게 오가는 메이드들 사이에 앉아 있는 레베카를 보고 민망한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방 한가운데 앉아 시중을 받고 있는 레베카를 보니 그날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모르간 대성당에 결혼 공고가 붙은 지 꼬박 일주일. 마침내 레베카의 결혼식 날이 밝았다.

    성당으로 출발하기 전에 완벽히 준비해야 했기에 새벽같이 일어나 씻고,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했으나, 레베카에게선 지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시 탐정이 천직이었던 게 아닐까요? 모르간에 벌어질 테러를 막다뇨! 아, 그럼 탐정이라기보단 치안대나 경찰이…….”

    레베카는 시아의 가명이 떡하니 실린 신문을 펄럭이며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운이 좋았던 거죠. 저도 제가 그런 큰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걸요.”

    시아는 제 입으로 큰일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여전히 부끄러웠다.

    어쩌다 일이 이런 식으로 된 걸까.

    [로렌 허슬러가 알펜하임 시계탑을 지켜내다!]

    [온몸으로 폭탄을 막아낸 탐정, 그녀의 정체는 최고의 찬사를 받은 레이디?]

    초신성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섬광이 인 시계탑의 사진과 함께 신문 첫 면에 실린 로렌 허슬러의 삽화와 헤드라인이 그녀의 양심을 콕콕 찔렀다.

    시아는 왜인지 이틀 전의 일이 한 달도 더 된 것처럼 느껴져 아련하게 회상에 잠겼다.

    문제의 열두 시 사십팔 분까지 채 일 분도 남지 않았던 시각이었다.

    열을 맞춰 늘어선 가스등이 사방을 대낮처럼 비춘 공간. 거대한 태엽들이 얽히고, 사람보다 큰 시곗바늘이 대관람차처럼 궤도를 도는 가운데 바닥에서 동그랗게 바람이 일었다.

    이윽고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시아 켈튼 한 사람뿐이었다.

    오래된 건물 냄새와 모르간의 매연, 스산한 밤공기만이 스쳐 지나가는 곳에 도착한 시아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곳곳엔 불안정한 봉인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무지갯빛 연기가 얼룩처럼 남아있었다.

    ‘잘못 온 건 아니야. 그런데 여긴…….’

    짓다 만 건축물처럼 사방에 지지대가 있고, 등불을 밝힌 곳 너머엔 사다리와 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둥근 스테인드글라스의 가장자리를 따라 새겨진 열두 개의 숫자.

    시아는 곧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알아차렸다.

    ‘알펜하임 궁의 시계탑이잖아!’

    일기장에 적혀 있던 마지막 시간여행의 장소. 그곳에서 한밤중에 총성이 울렸다는 기록이 떠오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아는 재빨리 구조물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봉인의 기운도 짙어졌다.

    이윽고 아래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만신창이가 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코트는 찢겨 엉망이었고 칼에 베였는지 피투성이인 다리는 후들거렸으나 남자는 품에 안은 성물함을 놓지 않았다.

    ‘저 남자는 누구지?’

    희끗희끗한 머리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얼굴까지, 시아 또래의 자식을 둔 아버지 나이대처럼 보였다.

    시아가 남자를 주시하며 한참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남자의 뒤를 따라 느긋한 구두 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명줄도 질기지.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내 손에 죽었을 거야, 데이먼 포드.’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붉은 로브를 걸친 스칼렛이었다.

    시아는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성물함을 들고 도망친 남자가 데이먼 포드였단 말이야?

    ‘스칼렛, 그만하자. 당신,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이런 사람? 하!’

    칼날같이 몰아치는 스칼렛의 저주에 비틀거리기를 수차례, 데이먼은 어느새 시계를 등지고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그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상태였으나 성물함만은 꼭 안고 있었다. 마치 스칼렛에게 성물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부터 너 같은 남자랑 결혼하는 게 아니었는데.’

    ‘스칼렛, 제발.’

    ‘아니지, 다 똑같았어. 남자들은 모두 똑같았지!’

    스칼렛은 미친 사람처럼 웃어젖히며 저주로 데이먼을 공격했다.

    ‘지긋지긋해! 정숙한 아내라는 게 대체 뭔데? 젊고 아름다우면 요부고, 화려한 삶을 꿈꾸면 밝히는 여자가 되는 건가? 남편이 도박꾼이어도, 술독에 빠져 살아도 그저 묵묵히 물레나 돌리며 살란 뜻이냐고!’

    이윽고 데이먼에게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시아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광경에 경악했다. 거대한 저주의 기둥이 데이먼의 옆구리를 관통한 것이다.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 알았다면 진작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이러지 마, 스칼렛. 성물을 열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사람들이 죽는다고, 죄 없는 사람들이 너 때문에……!’

    ‘저들이 죄가 없다고?’

    스칼렛은 이죽이며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다 똑같아. 사랑을 맹세하고는 배신해. 길거리를 떠도는 여인에게 온정은커녕 어떻게 하면 붙어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지. 콘힐 공작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제 씨를 품은 날 죽이려 청부업자를 보냈어. 숨죽이고 살아가겠다고 각서까지 썼는데도 날 죽였다고!’

    스칼렛은 피를 토하는 것처럼 절규했다.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는 건 데이먼이었음에도 왜인지 스칼렛이 데이먼보다 괴로워 보였다.

    그 와중에 들린 ‘콘힐 공작’이라는 단어가 시아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당신,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아아악!’

    데이먼에게 다가온 스칼렛이 구둣발로 그의 허벅지를 짓밟았다. 훤히 드러난 스타킹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암시장에서 총에 맞은 상처가 거의 아물지 않은 듯했다.

    시아는 그제야 스칼렛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데이먼은 신음을 흘리며 스칼렛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시곗바늘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자신과 아내의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지긋지긋한 악연도 이젠 끝이야. 너만 사라지면 끔찍했던 과거와도 완전히 이별하는 거겠지.’

    스칼렛은 손에 저주의 기운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그냥 두기만 해도 알아서 죽을 남자의 숨통을 꼭 제 손으로 끊어버리고 싶은 사람처럼 말이다.

    축 늘어진 데이먼은 이제 체념한 것 같았다. 그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흐릿하게 웃었다.

    ‘…스칼렛. 그 남자를 믿지 마.’

    스칼렛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순식간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 악물고 참으며 데이먼의 숨통을 끊어버릴 마지막 저주를 완성했다.

    ‘네가 할 소린 아닌 것 같네.’

    스칼렛은 데이먼의 힘없는 팔에서 성물함을 낚아챘다. 그러곤 그의 바로 앞에 서서 손을 휘둘렀다.

    곧 그녀의 손에서 저주의 기운이 떠나갔다.

    구조물 뒤에 숨어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시아의 몸이 본능적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의 뜀걸음 한 번마다 새하얀 마력이 일렁거렸다. 검붉은 머리칼이 안쪽부터 은빛으로 차오르고, 마력이 휘감긴 손이 스칼렛의 저주를 막기 위해 내밀어진다.

    그러나 스칼렛이 한 발 더 빨랐다.

    ‘잘 가. 데이먼.’

    칼날처럼 벼려진 저주가 데이먼의 목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데이먼이 품에서 총을 꺼내 스칼렛을 겨눴다. 그러곤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스칼렛.’

    스칼렛의 큼직한 눈망울에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이 비쳤다.

    데이먼을 향한 그녀의 저주는 시아의 손에 가로막혔으나, 미처 막지 못한 총알은 스칼렛의 복부를 그대로 관통했다.

    스칼렛이 쓰러지면서, 손에서 미끄러진 성물함이 열렸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 불안정한 마력을 마구 풍기며 성물함에서 빠져나온 마지막 봉인이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른 순간.

    ‘터진다!’

    새하얀 섬광이 시계탑을 장악했다.

    아르카나 전역에 원반처럼 퍼져나간 빛이 사그라든 곳엔 유리가 모두 깨져 엉망이 된 시계탑과 쓰러진 남녀, 그리고 기다란 은발을 늘어뜨린 채 두 손을 꼭 모아쥐고 있는 시아가 있었다.

    회상을 마친 시아는 당시의 촉감을 떠올리며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사실 프레디 뮐러가 남긴 쪽지대로 일이 이루어질 줄은 정말 몰랐어.’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 시아의 손에 봉인이 들어오는 동시에 거대한 시침이 철컥, 하고 사십팔 분을 가리켰던 것이다.

    프레디 뮐러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시아는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뮐러가의 가보로 내려오던 봉인을 통해 미래를 봤다더니, 봉인이 나타날 시간과 장소를 정말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특정해 내지 않았는가.

    만일 프레디 뮐러의 쪽지가 없었다면, 시아는 카얄이 제시한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디 있을지도 모를 스칼렛의 뒤를 쫓으며 폭발 직전의 봉인을 찾아 헤매거나, 암시장에 갇힌 수많은 사람들을 지키거나.

    하지만 그중 무엇을 선택했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봉인을 손에 넣고, 무너지려는 암시장을 지킨 것도 모두 프레디 뮐러의 쪽지 덕분이었다.

    ‘내가 시계탑에 있는 동안 라크가 지하 공간을 떠받치지 않았다면, 나도 죽었을 거야. 암시장이 무너졌다면 그 위의 시계탑도, 거리도 모두 무너졌을 테니까.’

    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건 열두 시 사십팔 분이 되기까지의 찰나, 두 사람의 생각이 통한 덕분이었다.

    시아는 기적처럼 손발이 맞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상황이 예정된 미래라면, 프레디 뮐러가 본 미래에서 나와 라크시스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암시장에서의 사건이 있었던 날 밤 이후, 요르문은 내내 켈튼저의 연구실에 처박혀 있었다.

    프레디가 남긴 숫자 쪽지에 여덟 번째 봉인에 대한 정보 외에 또 다른 단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3521년 3월 31일, 00:48. 여섯 번째 사도의 봉인.

    51° 30' 2" N, 0°7' 29" W, 278ft.

    뮐러 다이아몬드 본사의 로열하트 전시대 밑으로.]

    쪽지의 내용을 알아낸 이후, 시아와 요르문은 레베카의 도움을 받아 뮐러 사를 방문했다. ‘설마 여기에 쪽지가 숨겨져 있겠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는 다이아몬드 ‘로열하트’의 전시대 밑을 들자, 진짜로 프레디 뮐러가 남긴 또 다른 암호 쪽지가 있었다.

    보안이 철저해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는 다이아몬드의 전시대에 프레디 뮐러가 어떻게 쪽지를 숨길 수 있었는지, 프레디 뮐러가 이렇게까지 꼭꼭 숨겨둔 쪽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다들 궁금해 했었지만…….

    ‘제가 드린 쪽지 덕분에 레이디께서 알펜하임 시계탑을 지키셨다니, 아버지께서 미래를 내다보셨다는 말이 진짜인 거네요?’

    레베카는 그 말을 끝으로 쪽지에 대해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저 후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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