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참다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시아는 박스석을 빠져나오기 위해 커튼을 열었다. 그러나 커튼 밖에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 갈리프?”
“…카얄.”
“저 노예 아이를 도우러 갈 건가? 응?”
섬뜩한 목소리에 공기가 얼어붙는다.
그가 시아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시아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 박스석 난간에 등이 닿고 말았다.
카얄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시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의 불안정한 몸뚱이에서 흘러나온 어둠의 힘이 저주처럼 시아의 손목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시아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카얄은 시아의 입을 틀어막으며 시아를 난간에 눕히다시피 밀었다.
카얄이 속삭였다.
“이렇게 가 버리면 서운하지. 내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무대가 얼마나 많은데.”
그때였다.
“그대는 나, 아폴리오의 영광을 받으라!”
아폴리오의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 그와 발맞추어 절정에 달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려는 찰나.
탕―!
무대 위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악!”
현장을 목격한 파리니에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카얄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렸다.
시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얄의 중심을 걷어찼다. 손목과 입가에 느껴지던 압박이 약해짐과 동시에 시아의 몸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제기랄, 지금 당신이, 나를……! 갈리프, 제기랄!”
이윽고 시아의 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건 흔적처럼 남은 긴 은발 한 가닥이었다.
* * *
“라크!”
시아는 무대 뒤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라크시스의 어깨를 붙잡아 젖혔다.
“시아, 당신 어떻게 여기를, 그 머리가…….”
“총에 맞았어요? 어디 봐봐요, 총에 맞았냐구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시아는 라크시스의 몸을 황급히 훑었다. 라크시스는 벌벌 떠는 시아를 단단히 붙잡아 세우며 눈을 마주쳤다.
“진정해요, 시아. 총에 맞은 건 제가 아닙니다.”
“그럼 그 총소리는 뭔데요, 라크가 쏜 건 아니었잖아요!”
“시아.”
라크시스는 바닥을 눈짓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기절한 장정들 옆으로 선명한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총에 맞은 건 스칼렛이에요.”
대체 누가 스칼렛 로스를 쐈단 말인가?
시아는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말고도 누군가가 성물을 노리고 있었어요. 그자가 성물을 들고 도망쳤고요.”
“그게 누군데요?”
“저도 제대로 보진 못했습니다만, 어서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객석은 난리가 나 있었다.
경매고 뭐고 극장을 빠져나가려 비좁은 통로에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가수와 무용수들도 허겁지겁 무대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소란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총성이 울린 현장 자체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저주를 쓴다 뿐이지 스칼렛도 상당한 마력을 보유한 마법사니까요. 총상을 입었어도 회복되는 건 금방일 겁니다.”
라크시스는 저 멀리 이어진 핏자국을 보며, 시아를 향해 눈짓했다.
“도망친 남자는 금방 붙잡힐 거예요.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합니다.”
* * *
그러나 추적은 쉽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여기가 대체 어딘지.”
시아는 절망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암시장에 내려올 때도 길이 미로같이 복잡하다 느꼈는데, 내부자만이 알 수 있도록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이래서 보안이 철저하다고 한 것이었을까.
같은 길이 나오고 또 나왔다. 어딜 가도 짙은 암녹색 벽지에 어두운 마룻바닥, 희미한 벽걸이 등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시아의 치마는 그새 발목이 보일 만큼 짧아져 있었다. 구둣발에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이 자꾸만 밟혀 뜯어버린 탓이다.
“핏자국이 끊겨서 추적이 어렵게 됐어요. 이럴 바엔 차라리 가까운 지상으로 올라가 스칼렛의 저주를 감지하는 게 빠를 겁니다.”
“그게 낫겠네요.”
라크시스가 낸 해결책은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었다.
시아는 공간이동 마법을 시작하려는 라크시스에게 달라붙었다가, 그의 품에서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라크, 코트 안주머니에 기계 같은 거라도 있나요? 진동이 오는 것 같은데.”
시아의 말에 코트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라크시스가 불이 빛나고 있는 수화기를 꺼내 들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그것도 이런 긴박한 상황에 오는 전화는 대체 무엇일까.
이를 무시하려던 라크시스는 수화기의 부재중 전화 버튼의 불빛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
- 자네!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는가!
“요르문?”
- 열두 시 사십팔 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지금 당장 내가 알려 주는 좌표로 이동하게, 반드시 열두 시 사십팔 분 전엔 도착해 있어야 해!
수화기에서 쨍하니 터져 나오는 소리는 시아에게도 선명히 들릴 정도였다. 라크시스는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요르문,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면 앞뒤 상황을 알 수가 없다고. 게다가 이쪽도 꽤 급한 상황이야. 봉인을 놓쳐서 말이지.”
- 그래, 바로 그 봉인이 열두 시 사십팔 분에 내가 말한 좌표에 나타날 거야! 누님이 준 쪽지를 해독했다고, 내 말을 들어!
뭐?
시아가 놀라는 사이, 전화가 뚝 끊겼다. 라크시스는 수화기를 도로 품에 집어넣고,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막 열두 시 사십 분이 됐군요.”
“라크, 그 쪽지의 내용이 진짜일까요?”
평소였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쪽지가 가리킨 장소로 가 보자고 했을 시아였으나, 멀지 않은 곳에 성물과 이를 추격하는 스칼렛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쪽지의 내용이 진실이 아닐 경우 헛걸음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리 물은 것이다.
“확인해 보지 않는 것보단 확인해 보는 게 낫겠죠. 시간에 맞춰 공간이동만 해봐도 쪽지가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좋아요, 그럼 어서 나가요.”
그렇게 시아가 라크시스에게 안겨 공간이동마법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돌연 바닥과 벽, 천장을 타고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중심을 잃은 시아가 라크시스를 붙잡고 휘청인 순간, 벽에 걸린 가스등이 일제히 훅 꺼졌다.
그리고 다시 등불이 밝아졌을 때.
“무대를 즐겨주지 않으니 서운한걸.”
복도 저편에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카얄이 나타났다.
카얄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복도에서 평온하게 서 있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게 많다고 했잖아.”
카얄이 손을 내젓자,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시아의 멱살이 허공에서 붙잡혔다.
“큭!”
“시아!”
라크시스가 재빨리 손을 저어 카얄의 마법을 끊어냈으나, 시아는 여전히 켁켁거리고 있었다.
“정말로 인간이 되어버렸잖아? 고작 이런 마법에 당하다니, 마음 아프게.”
“…미친놈.”
시아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카얄을 노려보았다. 카얄은 아랑곳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아 켈튼. 그거 알아? 이곳의 길은 수십 갈래로 나 있지만 입구는 딱 하나라는 거. 불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외부인이 업장에 드나드는 걸 원하지 않거든.”
“그래서, 뭐가.”
금이 간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페라 극장과 이어진 통로에서 어렴풋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아직까지도 극장을 못 빠져나갔단 말이야?
“난 말이야. 죄를 저지른 인간은 죗값을 받고, 선하게 산 인간들은 당신의 축복 속에 환생한다고 믿었어. 그래서 당신을 믿고 천칭으로 영혼을 인도했었지.”
천칭…….
카얄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단어에 시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은 그가 말하는 천칭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천칭의 접시 위에 있던 빛 알갱이들이 모두 인간의 영혼이었단 소린가?
“하지만 진실은 달랐어. 같은 인간을 죽이기까지 한 영혼은 어째서인지 새 생명을 받았고, 배를 곯다 죽은 어린아이는 지옥에 가게 되더군. 당신은 천칭에 오르는 걸 심판이라 했는데 말이야. 참 이상하지?”
“…알아듣게 말해. 난 시아 켈튼이라고.”
“오, 그래. 가엾은 인간 시아 켈튼.”
카얄은 키득거렸다.
“내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무대가 있다고 했잖아?”
“시아,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갑니다. 지금은 사십오 분이에요.”
헛소리를 상대하고 있는 시아에게 라크시스가 작게 속삭였다. 시아는 그가 보여준 회중시계를 흘긋 넘겨보며 말했다.
“라크, 공간이동 마법을 곧바로 쓸 수 있나요?”
“지금 둘이서 뭘 그렇게 속삭이는 거야? 날 앞에 두고선. 내가 준비한 무대가 있다고 했잖아, 시아 켈튼.”
카얄의 외침에 시아가 이를 갈며 외쳤다.
“시간 끌지 마. 당신이 스칼렛에게 시간을 벌어주려고 이러는 거 다 알아.”
“맞아. 내가 스칼렛에게 부탁했지. 성물함을 인간들이 가장 많이 모인 자리에서 열어달라고. 예상치 못한 훼방꾼이 있었던 듯하지만, 그런 건 스칼렛에겐 문제가 아닐 테고.”
카얄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선 자리에서 금이 가고 있는 벽들을 둘러보며 여상히 말했다.
“이곳은 곧 무너질 거야. 하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겠지. 내가 하나뿐인 출입구를 막았으니까.”
“뭐?”
“시아 켈튼. 잘 생각해 봐. 이곳에 모인 자들은 불법적인 상품을 거래하려고 했던 자들이라고. 이들이 노예를 사서 뭘 하려고 했는지 알아?”
카얄의 손을 감싸고 있는 검은 가죽 장갑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를 막아서다 죽은 암시장 일꾼들의 피였다.
제아무리 철저한 요새도 적을 안으로 들이면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 스칼렛이 암시장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곳은 카얄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아는 보안이 철저하다고 해서 방심했던 것을 후회했다.
‘카얄은 우리가 봉인을 찾으러 올 걸 예상했던 거야. 스칼렛이 봉인을 암시장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내게 이런 선택지를 제안하려고 했던 거라고.’
시아는 신음을 삼켰다.
카얄의 발밑에서 검은 기운이 마구잡이로 피어올랐다. 그 탓인지, 안 그래도 금이 가 있던 벽들이 더 빠른 속도로 흔들리며 더 많은 돌멩이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째깍.
회중시계의 시침이 사십육 분을 가리켰다. 시아의 머릿속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카얄은 제게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목숨을.
“내가 준비한 건 여기까지야. 봉인의 폭발에 휘말릴 인간들을 택할지, 범죄자들을 택할지는 네 선택이야.”
그 말을 끝으로 카얄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시아.”
라크시스의 긴장 어린 목소리에 시아는 회중시계를 바라보았다. 요르문이 말한 열두 시 사십팔 분이 되기 약 일 분 전이었다.
“라크, 제가 무얼 부탁할지 알죠?”
라크시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 속에 오가는 무언의 동의.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 이만한 신뢰가 또 어디 있을까.
이윽고 시아의 발밑에 공간이동 마법의 푸른 빛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시침이 사십칠 분을 가리키는 순간, 시아의 모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