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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61)화 (261/292)

261화 

“이곳을 드나드는 손님들이 모두 귀족이기 때문이죠. 귀족이 아니라 해도 상당한 부를 가진 사람들일 테고요. 그들의 지갑을 열려면 그 수준을 맞춰 주어야 하겠죠.”

그렇게 말하며 라크시스는 객석을 턱짓했다. 누가 누군지 실루엣이 보이는 대로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는데, 시아는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아는 라크시스의 말을 경청하려 애썼다.

“스칼렛은 아직 안 왔나 봐요?”

“그런 것 같군요. 이상하네요, 스칼렛과 친하다는 부인들은 얼추 모인 것 같은데.”

“이번 암시장에 스칼렛도 초대받은 건 확실하다면서요.”

“초대와 참석이 같은 뜻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스칼렛도 어렵게 구한 암시장 티켓을 이렇게 날릴 리 없을 텐데요.”

고작해야 경매라고 생각했는데. 암시장의 규모는 실로 놀라웠다. 일단 지하에 이 정도 깊이를 파서 오페라 극장을 만들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이걸 누가 암시장이라고 생각하겠어.’

제복 차림의 우락부락한 경비들만 아니었다면 밀레이나 돔의 공연장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무대 밑에선 안대로 눈을 가린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기를 조율하고 있었고, 장막 뒤로는 화려한 무대장치들이 무대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미스터, 미스. 음료를 드시겠습니까?”

커튼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시아가 움찔했다. 은쟁반을 든 풋맨이 웰링턴 부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멜의 레드 루비 과육을 첨가한 칵테일입니다.”

“여기 두고 가시죠.”

풋맨은 부인을 애지중지하느라 음료가 들어오는 것도 본 척하지 않는 손님의 앞에 잔을 두고 사라졌다. 커튼이 닫히자, 노신사에게 안겨 있던 부인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갔어요?”

그러자 라크시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시아를 일으켜주었다.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매번 이렇게 제게 안겨주시면 저야 기쁘지만요.”

뎅―!

그때 아득한 곳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마치 블레어 스트릿의 시계탑에서 울리는 소리 같았다.

“아, 열두 시군요. 경매 순서의 맨 앞에 있던 작은 극이 이제 시작되나 봅니다.”

객석을 환히 밝히던 조명이 멀리서부터 하나씩 꺼지고, 몇몇 관객이 작게 탄성을 발했다. 그들은 무릎 위의 카탈로그와 경매 팻말을 만지작거리며 다가올 경매에 대한 기대감을 표하고 있었다.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뎅, 하는 여운을 관악기의 우렁찬 연주가 덮어버리고 마침내 동시에 온 극장이 암전되었다.

탁!

막이 닫힌 무대 위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내리쬔다. 조명 밑엔 아무도 없었고, 묵직하게 닫힌 장막은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나 오케스트라의 전주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현악기의 화려한 마무리로 마침내 전주가 끝나고 박수의 물결이 한 차례 객석을 훑고 지나갔다.

다시금 찾아온 정적. 여전히 무대 위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잘못된 것 아니냐며 다들 속닥이는 가운데 돌연 마루를 내딛는 구둣발 소리가 까랑까랑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아아, 나는 어리석었네.”

애절한 고음이 온 극장을 가득 메웠다.

“어리석도다, 어리석어! 파리니에여. 너는 어찌하여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 했는가!”

스포트라이트의 영역으로 발끝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찰랑이는 튜닉 자락, 화려한 허리띠, 자글자글하게 꼬아 풍성해 보이는 머리칼에 둥근 티아라까지.

가슴이 미어질 듯 후회하는 듯, 절절한 목소리에 사람들이 감탄한다.

완벽한 연기에 완벽한 고음! 마침내 노래의 주인공이 조명 안으로 완벽히 모습을 드러냈다. 멸망한 고대 왕국의 공주 파리니에로 완벽하게 분장한 오페라 가수였다.

그녀도 오케스트라 단원과 마찬가지로 안대를 쓰고 있었다. 시아는 가수를 유심히 살펴보다 입을 틀어막았다.

“저 사람은 달시 오브리딘이잖아요?”

“알고 계시는군요? 당신이 오페라에 흥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흥미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게…….”

“진짜 파리니에가 나타났다고 해도 믿겠어! 역시 달시 오브리딘이야.”

그녀의 노래에 곳곳에서 속삭임이 일었다.

그러나 시아는 달시 오브리딘을 보며 불안감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달시 오브리딘의 최후는…….

‘극장 매몰사고로 달시 오브리딘은 죽었다고 했어.’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당장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묵직했다.

이런 넓은 공간을 지하에, 그것도 중심을 떠받치는 기둥 없이 만들어 두었다는 것 자체가 시아를 괜히 긴장되게 했다.

하지만 그 매몰사고가 오늘은 아니겠지…….

시아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달시의 노래를 감상했다. 어쨌거나 칠십 년 후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음악이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욕심을 부리다 신의 농간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었다는 고대의 신화.

의도하고 선정한 극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암시장에서 불법을 저지르는 이들이 이런 극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아아, 나는 잃었네. 나의 조국, 나의 부모, 나의 연인 히포클레데키스! 나의 어리석음으로 하룻밤 꿈처럼 침몰해버렸네, 한낱 물거품처럼 모두 사라져 버렸네!”

“오! 파리니에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여. 왜 그런 말을 하시오? 그대 곁엔 내가 있는데.”

이윽고 묵직한 중저음의 발성이 막 뒤에서 울렸다. 동시에 장막이 천천히 열리며 연기가 확 피어올랐다.

붉은 배경을 뒤로 하고 무너진 신전과 피투성이 시체 더미를 형상화한 무대장치가 나타났다.

무용수들이 비틀비틀 춤을 추다 시체 더미 위로 쓰러졌다. 역설적이게도 조명은 햇살처럼 눈 부시고 강렬했는데, 시체 더미를 밟으며 마찬가지로 안대를 쓴 남가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자요. 나는 태양의 신이요, 광명의 신이며, 병마는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시와 노래는 내게 아양 떨며 춤을 추지. 나의 전언은 미래가 되고 현재가 되니 그 누가 나의 위용을 이길 수 있으랴!”

“오, 아폴리오여. 태양의 주인 아폴리오여. 나 이제 감히 신을 농락한 벌을 받겠으니. 제발 나를 저승으로 보내주시오. 지옥의 왕 앞에 심판받게 해주시오!”

처절하게 용서를 비는 파리니에 공주의 뺨을 태양신 아폴리오가 쓸어본다. 안대 속에서 큰 눈망울을 껌뻑대며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쏟아 내어도 파리니에는 음정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경매를 잊은 손님들은 극에 몰입해 모두 고개를 빼내고 있다. 손님들이 오페라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무대 뒤에선 다가올 경매품들을 차례로 준비하고 있었다.

황금 갈기 사자, 무지개 얼룩 앵무새, 코끼리 상아, 흰털표범, 남대륙 가멜 부족장의 딸… 그리고 성녀 시트리나의 성물.

라크시스가 속삭였다.

“시아, 보입니까? 바로 저게 오늘 우리가 손에 넣어야 할 성물이에요.”

성물의 상태를 살펴볼 순 없었다. 아마 성물함에 얽힌 이야기와 함부로 성물함을 열지 말라는 주의 문구 때문인 듯했다.

대신 흰 장갑을 낀 자들은 성물함을 무대 뒤에 준비해 둔 바퀴 달린 받침대에 올려두고 거대한 유리 덮개를 씌웠다. 그 위를 검은 벨벳 천으로 한 번 더 덧씌워서는 경매 순서에 맞게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상품을 줄 세워 두었다.

어느덧 구름 같은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줄지어 군무를 추기 시작했다. 안대를 쓰고도 능숙한 몸짓이 마치 오랫동안 눈을 가린 채 훈련받아온 사람들 같았다.

붉은 배경은 사라진 지 오래요, 천장에서 내려온 석조 기둥 장치가 순식간에 무대를 신들의 신전으로 바꾸어 놓는다.

“파리니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아. 나는 위대한 태양신이며 무엇도 날 거스르지 못하니.”

아폴리오의 주변을 천사들이 날아다녔다. 부유 마정석을 이용해 공중을 부유하는 무용수들이 반짝이는 꽃가루를 뿌리며 환상적인 은하수를 만들어 냈다.

어느새 아폴리오는 황금관을 쓰고 신단에 올라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무대를 유심히 지켜보던 시아가 갑자기 라크시스를 불러세웠다.

“라크. 잠깐만요. 저 뒤를 봐요!”

무대 장막 뒤, 조명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무용수의 손짓에 경매품을 지키던 경비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쓰러지는 경비들을 살피러 오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그녀의 주변엔 동료 무용수들이나 암시장의 일꾼들도 없었다. 이윽고 검은 옷의 장정 셋이 무용수의 근처에 나타났다.

곧 그녀가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을 풀고, 안대를 벗어 던졌다.

오페라 글라스를 들여다보던 시아는 경악했다. 동그란 렌즈 안에 비친 얼굴은 다름 아닌 스칼렛이었다.

붉게 칠한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녀의 지시에, 뒤따라온 장정 셋이 검은 벨벳 천을 걷고 유리 덮개를 열었다. 스칼렛은 성물함을 직접 열어 물건을 확인했다.

그 순간 불안정한 마류가 극장 전체를 덮쳤다. 시아의 손가방에 있던 마류 탐지기가 이상 마류를 감지하고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진짜 봉인이 맞았어.”

무지갯빛 연기가 몽롱하게 퍼져나가자 사람들의 입매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연기에 취한 동물들이 흥분하여 우리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동물들의 울음소리에 무대가 소란해졌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봉인에서 흘러나온 이상 마류 때문이었다.

스칼렛은 장정들이 가져온 붉은 로브를 뒤집어쓰고는 성물함을 닫아 장정들에게 챙기라 지시했다.

붉은 로브를 입은 여인과 수행원들. 그들이 선 모습을 보자마자 시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붉은 옷의 강령술사!’

설마, 지금까지 모든 일들이…….

시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던 오페라글라스의 렌즈 너머로 비릿한 웃음이 비쳤다.

스칼렛은 시아와 라크시스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아의 바로 옆에서, 폐쇄된 극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바람이 불었다. 라크시스의 공간이동 마법이었다.

“라크!”

그가 떨어뜨린 가면이 바닥에 채 닿기도 전, 지팡이를 든 라크시스가 성물함을 든 장정을 후려쳤다. 박스석에 남은 시아는 그들의 격렬한 몸싸움을 목격하고 말았다.

동시에 고조되던 연주가 마침내 절정에 달하면서, 현악기의 날카로운 음을 끝으로 선율이 뚝 멈췄다.

“파리니에, 그대가 바라던 것을 주노니!”

좌중이 고요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무대를 넘어 사방으로 흐른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운데, 스포트라이트가 받침대를 비춘다. 감히 태양을 원했던 인간 공주의 몸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스러지는 클라이막스의 바로 그 대목. 아폴리오가 파리니에의 머리 위에 황금관을 씌우기 직전.

무대 뒤에는 라크시스가 여전히 장정 셋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그의 마법을 왜곡시킨 스칼렛은 공격을 피해 유유히 자리를 뜨고 있었다.

‘제발, 왜 이번엔 공간이동이 안 되는 거야!’

시아는 제 몸에 흐르는 마력에게 황제 암살 사건 때처럼 공간이동을 시켜달라고 간절히 외쳤다. 그러나 혈관을 타고 끓어오르던 마력은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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