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60)화 (260/292)

260화 

텅 빈 어깨. 그래, 그것 때문이었다. 자신에겐 잠깐일 테지만 라크시스에게는 칠십 년이나 될 기다림. 갑자기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건 그것 때문일 테다.

결국 시아는 라크시스의 품에 안겨 꺽꺽 울었다.

그러자 요르문이 슬쩍 다가와 라크시스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누님, 걱정 마세요. 이 녀석은 제가 돌볼 테니까요.”

“흑, 히끅. 고마워, 요르문.”

시아는 라크시스의 품 안에서 손을 내밀어 요르문의 손을 잡았다. 라크시스보다는 작은 골격의, 굳은살이 살짝 배긴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대신 제 걱정도 같이해 주실 거죠? 누님의 사촌 동생 말예요.”

“흡, 그럼. 당연하지, 흑. 미래엔 네가 동생일지 아버지일지 모르겠지만, 히끅.”

“윽. 징그러운 소리는 마세요, 누님. 우린 이미 누나, 동생 사이인데, 이걸 알고도 제가 누님께 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 있겠냐고요.”

요르문은 투덜거리면서도 피식 웃었다.

대공이 오든 말든 연구실에 처박혀 있었던 더러운 셔츠 차림 그대로인 요르문은 시아를 위해 수건에 대충 손을 닦고선 글자가 자잘하게 인쇄된 종이를 내밀었다.

“그러니 울지 마시고, 제가 알아낸 걸 좀 봐주시겠어요? 누님도 분명 흥미로워하실걸요?”

그러자 시아는 울음을 멈추고, 종이를 받아 들었다. 숫자와 문자가 뒤섞인 가운데 맨 마지막에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 776695 Adt58p 86Q23GkL000

FHSilq ADvptk KHFjuDwnhe

이것은 테스트 문구입니다 ]

“이게 다 뭐야……?”

“뭐긴요, 누님이 말도 없이 보내주신 암호해독 기계에서 나온 암호들이죠.”

암호해독 기계? 내가 그런 걸 보냈다고?

시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크시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연구실 한복판에 공간이동 마법이 시작돼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하지만 제가 누군가요? 마도 공학에 있어선 라크시스 옌보다도 실력 있는 사람이란 말예요. 마도 공학자도 아닌 사람이 만든 장치 정도는 식은 스튜 먹기죠.”

시아는 그제야 요르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냈다.

프레디 뮐러의 서재에서 발견됐던 거대한 타자기. 요르문이 말하는 암호해독 기계는 바로 그 타자기였다.

* * *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또다시 해가 뜨고 지고,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 찾아왔다. 이윽고 웰링턴가의 저택 앞에 수상한 마차가 멈춰 섰다.

가면을 쓴 풍채 좋은 노신사가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나이 어린 부인을 데리고 나타나자, 모자를 깊게 눌러쓴 마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마차가 한 차례 기우뚱 움직이고, 손님들의 모습이 마차 안으로 모두 사라지자 마부가 고삐를 놀린다.

말이 길게 울었다. 암시장의 손님을 태운 마차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차에 속도가 붙자, 시아는 가면을 벗어던지며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푸하! 들키는 줄 알고 진짜 긴장했네요.”

모두가 올가 웰링턴이라 믿었던 여인은 다름 아닌 올가로 분장한 시아였다.

“이런, 제 마법을 의심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연기해 본 적은 없단 말예요. 사소한 습관이나 손버릇 같은 게 달라서 들키면 어쩌나 싶었다구요.”

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올가에 따르면 암시장은 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만의 철저한 보안 절차를 통해 입장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카얄이나 스칼렛이 저주를 이용해 암시장의 사람들을 조종한다면 어쩌죠? 미리 마정석을 빼돌린다거나…….’

‘그 정도로 뚫릴 보안이었다면 이리 번거롭게 티켓을 구하고 분장까지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미스 로스도 티켓을 구하기 위해 귀부인들과 친해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혹여 암시장이 열리기도 전에 봉인이 빼돌려질까 걱정했는데, 올가는 암시장의 운영 구조상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저주로 일꾼들을 조종해 봤자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거든요. 암시장의 수장이 누구인진 아무도 모르고요.’

그 후로 올가는 한참을 암시장에 대해 설명했는데, 결론은 스칼렛이나 이쪽이나 티켓이 없으면 암시장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왠지 차탈이 이미 암시장의 일꾼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기억을 모두 살펴본 것만 같은 뉘앙스였다.

어쨌든 올가는 시아와 라크시스에게 그들이 웰링턴 부부 행세를 해야만 암시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리하여 현재 시아와 라크시스는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스타일의 옷들을 입고 웰링턴 부부로 위장 중이었다.

라크시스는 마법으로 상대방의 인식을 저해하고 있기에 두 사람의 정체가 쉽게 드러날 일은 없을 거라곤 했지만…….

‘영화를 보면 이런 위장은 꼭 사소한 이유로 들킨단 말이야!’

마차에 오르기 전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던 마부의 눈빛이 어쩐지 섬뜩해서, 시아는 잔뜩 긴장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예의 여유로운 태도로 슬쩍 시아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러곤 아까 시아가 했던 것처럼 그녀의 팔을 제 팔에 슬쩍 감곤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웬걸요. 아주 자연스럽던데요. 이렇게 매달리는 거나.”

금실이 좋기로 유명한 웰링턴 부부를 연기한다고 했던 행동들이었는데.

시아는 못내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라크시스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라크.”

“이런 식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눈빛이 말이죠.”

결국 시아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이 삼켜졌기 때문이었다.

진득한 열기가 한차례 진정되고 나서야 시아는 라크시스를 겨우 떼어 낼 수 있었다.

“라, 라크. 우리 할 일이 있었잖아요.”

“그랬죠, 할 일.”

라크시스는 아쉬운 듯 시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럽게 코트 안주머니를 뒤졌다.

웰링턴 백작의 스타일을 흉내 내느라 바꿔입은 코트의 안주머니에도 공간 왜곡 마법은 어김없이 걸려 있었다.

대강 쑤셔 넣은 듯한 연구 결과지 뭉치와 간이형 깃펜이 마차 의자 위로 하나 둘 꺼내어진다.

그는 종이의 절반을 덜어 시아에게 건네곤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부터 하면 되겠군요. 무슨 일이라도?”

시아는 라크시스를 흘겨보며 입을 샐쭉 내밀었다. 아까까지는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굴었으면서. 하여튼 이럴 땐 정말 얄밉다니까.

마차 안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행선지를 알려 주지 않으려는 듯 창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내부와 외부가 단절된 마차는 어디로 가려는지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렸다.

마차 안의 두 사람은 라크시스가 마력으로 띄운 불빛에 의지해 수식과 숫자, 문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살피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프레디 뮐러는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걸까요?”

“놀랍긴 하군요. 이 정도 실력의 수학자가 수학을 따로 배우지 않았었다니. 갈리프도흐에서 알았다면 분명 그에게 수학을 해보라 권했을 겁니다.”

그들이 보고 있었던 건, 프레디 뮐러의 타자기에서 출력된 수많은 테스트 용지들이었다.

“군사적으로 사용해도 될 만큼 정교한 암호장치였어요. 매 순간 해독 방법이 달라지는 암호라니, 탐나는군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열과 문자열의 조합을 보며, 라크시스는 감탄했다. 시아는 요르문이 그려준 타자기의 내부 및 작동원리 설명을 읽으며 머리를 싸맸다.

“쪽지는 해독되고 있을까요?”

“두어 차례 암호화를 거친 문구이니 금방은 어렵겠지만, 요르문이라면 할 수 있겠죠. 집중하고 연구에 뛰어든 요르문만큼 능률 좋은 연구자도 없을 테고요.”

서재의 장식장에서 발견되었던 원판 형태의 부품은 숫자와 문자가 뒤섞인 암호를 해석하는 데 이용되는 변환장치 중 하나였는데, 여러 가지 형태의 암호 중 오로지 숫자로만 이루어진 암호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원판은 없었다.

굳이 그런 암호를 만들어 볼 이유도, 해석해 볼 필요도 없었지만…….

‘이거라면 혹시 이 쪽지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타자기가 암호해독 기계라는 말에 시아가 내민 쪽지가 화근이었다.

레베카가 아버지의 유품에서 찾아낸 숫자가 적힌 쪽지. 지금껏 해석되지 못한 쪽지의 비밀이 어쩌면 이 타자기로 풀릴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제안한 것이었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마침 잘 됐어요, 누님. 안 그래도 이 기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암호의 가짓수가 얼마나 될지 궁금했는데, 쪽지도 해독할 겸 겸사겸사 새 원판을 만들어 보자고요. 제가 대조표를 드릴게요. 시간 날 때 한번 봐주시겠어요?’

이러더니 요르문이 저와 라크시스에게 종이를 한가득 떠넘긴 것이 아닌가.

시아는 쪽지 내용은 별것 아닐 거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요르문은 시아에게서 가져간 조각 연구도 잠시 미뤄둔 채 타자기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도와주실 거죠, 누님?’

도와주고 싶지만, 머리가 안 따라준다. 제아무리 갈리프도흐 출신 의술사라지만, 이런 쪽 재능까진 없었다.

“전 수학과는 거리가 먼가 봐요.”

결국 시아는 끙끙거리며 종이를 내려놓았다.

“요르문이 알아서 하도록 두죠. 연구 같은 건 우리가 없어도 잘하는 사람이니까.”

라크시스는 웃으며 종이들을 정리했다. 이에 시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밖이 보이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도착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라크시스는 가면을 챙기며 시아의 어깨에 숄을 걸쳐주었다.

“일단은 암시장에 집중합시다. 우리는 지금 웰링턴 부부이니까요. 그들이 속게끔 연기를 해야겠지요.”

“그러니까 레이디 웰링턴은 평소에 로드 웰링턴과 이렇게 지냈다는 말이죠……?”

“그럼요. 로드 웰링턴이 나이 어린 부인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사교계의 모두가 알고 있는걸요.”

이윽고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자, 얼굴이 새빨개진 귀부인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헛기침을 하는 노신사가 탈 때와는 다르게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시죠. 두 분.”

웰링턴 부부는 역시나 듣던 대로였다. 마부는 부부가 마차에서 내려 사라질 때까지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 * *

사방에서 황금빛이 쏟아진다. 미르타의 유화로 천장을 장식하고, 거대한 샹들리에가 극장을 빛낸다.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보석이 무거워 보였지만, 그만큼 더욱 화려한 빛을 뿜어낸다.

가면을 쓴 남녀들이 하나둘씩 붉은 벨벳 좌석들을 채운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썼다고는 하나, 그들이 몸에 두른 장신구며 귀한 옷감을 살피면 누가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모여앉은 귀부인들이 다가올 경매를 기다리며 카탈로그를 넘긴다. 이 층의 드레스 서클, 그중에서도 무대와 가까운 박스 석에 자리를 잡은 시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암시장이라고 해서 굉장히 위험한 곳일 줄 알았는데, 작은 오페라 극장같이 생겼네요?”

마부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건물은 허름한 여관처럼 생긴 곳이었다.

손님이 없고 무장한 경비들만 가득하다는 점에서 평범한 여관은 아니었으나, 티켓을 보여주고 신분을 확인받은 후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 한참 지하로 내려간 시아와 라크시스가 맞닥뜨린 건 어두침침한 공간이 아닌, 이런 지하에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한 화려한 오페라 극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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