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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59)화 (259/292)

259화 

에밀리가 이 현장에 있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레베카의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라면, 레베카의 추억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불미스러운 일은 한 번도 없었어요. 오히려 도련님은 절 여러 번 도와주셨죠.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걸 구해 주신다든가, 빨래 바구니를 슬쩍 같이 들어주신다든가…….’

레베카는 막스를 떠올리며 그에게 따라붙었던 수식어를 시아에게 이야기해 줬다.

바람둥이.

시아는 바람둥이라는 단어를 한참 곱씹었다. 막스 블레어에게 참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시아는 청첩장을 손가방에 넣고, 좁은 마차 안에서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막스 블레어가 레베카에게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 게 수상하긴 하네요. 막스가 레베카에게 연심이 없다면, 다른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단 뜻이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죠.”

“블레어가에서는 저희 쪽의 초대를 늘 거절한다면서요?”

“당신과 날 피하고 싶은 거겠죠. 아무래도 블레어가에 카얄과 스칼렛이 있으니.”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다.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서고, 계단을 준비시킨 마부가 바깥에서 문을 열었다.

밤거리의 어둠 속에서도 켈튼저는 환했다. 아마 야행성인 켈튼저의 주인이 저택의 불을 밤새 밝히기 때문일 것이다.

라크시스가 먼저 내려 시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붙잡고 마차의 계단을 밟아 내리는데, 라크시스가 여상히 입을 열었다.

“어쩌면 막스 블레어가 형제를 배신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 * *

저택에 들어선 시아와 라크시스는 이 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응접실에 멈춰 서야만 했다.

“라크, 자네!”

피곤함에 절어 있는 얼굴의 요르문이 웬일로 연구실에 있지 않고 로비에서 기다리나 했더니…….

시아는 투박한 차림으로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를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대공, 전하? 레이디 웰링턴까지… 왜 여기에…….”

“늦었군, 라크시스 옌. 오랜만이네, 레이디 켈튼.”

라크시스에겐 불퉁하게, 시아에겐 그보다 살짝 덜 퉁명스럽게 인사한 차탈은 다 식어 버린 차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의 바로 옆에서, 올가는 주인과 달리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밝은가 했더니, 손님이 와 있었군요.”

“자네는 왜 이렇게 늦게 다니나? 한참 기다렸잖나.”

라크시스는 대공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코트를 하인에게 건네곤 시아를 에스코트했다. 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던 시아로선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대공 전하, 혹시 오늘 방문하시기로 하셨었나요?”

그러자 차탈 대신 올가가 나섰다.

“실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레이디 켈튼. 암시장 잠입과 관련하여 급히 알려드려야만 하는 정보가 있어 늦은 시간에 방문 연락을 드렸습니다만, 이미 외출하신 뒤라 소식 전달이 늦어졌던 것 같습니다.”

아하, 그런 거였구나.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암시장 관련 정보라고요……? 두 분께서요……?”

“네,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레이디 켈튼.”

“그렇다는 건… 요르문, 설마 암시장의 조력자가 대공 전하와 레이디 웰링턴이라는 거야?”

놀란 시아에게 요르문이 상황을 채 설명하기도 전이었다. 올가는 챙겨온 손가방을 열어 빳빳한 봉투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시아의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이번 암시장 입장 티켓입니다. 레이디 켈튼과 옌 경, 두 분께서 내일 밤 열릴 암시장에 들어가실 때 필요한 물건이지요.”

* * *

“누님, 그러니까…….”

안절부절못하는 요르문 앞에서 시아는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았다. 갑자기 몰아쳐 온 정보가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다.

“라크랑 내가 암시장에 들어가서 여덟 번째 봉인을 가져와야 한단 소리지? 그런데 지금까지 그 계획을 돕고 있었던 게 대공 전하와 레이디 웰링턴이었고?”

“누님, 화나셨어요……?”

시아는 재깍 손사래를 쳤다.

“아니, 화가 난 게 아니라 놀라서 그래. 그러면 대공 전하도 광룡의 봉인이나 마도 시대의 종말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야?”

또다시 발작을 일으켜 뒤엉켜 버린 차탈의 마력 흐름을 봐주고, 배웅까지 마친 라크시스는 응접실로 되돌아오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불빛을 내고 있던 수화기를 뒤늦게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시아와 함께 뮐러 저택에 방문한 사이에 부재중 전화가 왔었던 모양이다.

“그렇진 않습니다. 그들은 봉인을 그저 강력한 저주가 담긴 마정석 정도로 알고 있으니까요.”

요르문은 우물쭈물 시아의 눈치를 보았다.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의 소식을 남의 입을 통해 듣는 서운함이 어떤 건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아는 그녀의 말마따나 정말로 화나진 않은 것 같았다. 암시장에 나타날 봉인을 찾으러 가야 한단 건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요르문은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애초에 암시장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대공 때문이었어요, 누님.”

맨덜랜드 사태 이후, 차탈은 불법 노예 매매 사건 조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대외적으로는 남대륙 신민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는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대공은 맨덜랜드의 유령선 사건과 노예 매매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시에 황혼 국교회의 뒤를 캐내고 있었거든요.”

음지에서 벌어지는 노예 매매를 집요하게 파고든 결과, 차탈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제국의 중심인 수도 모르간의 지하에서 아주 대담하고도 위험한 암시장이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밀렵된 동물의 가죽이나 뼈, 희귀한 애완동물에 샤샤리아보다 중독성이 강한 약, 유실된 미술품과 보석 그리고 사람까지.

제국법이 금지하는 모든 물건들이 암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암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제국의 고위 관료와 귀족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의 은밀한 유흥거리를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도리어 차탈이 보복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얄의 뒤를 쫓는 것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차탈이 푸념하는 식으로 이 이야기를 요르문과 라크시스에게 했었는데, 두 사람이 문득 스칼렛과 어울려 다니는 귀부인들을 떠올리곤 그들의 명단과 암시장 참석자의 명단을 대조해 볼 것을 차탈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래서 레이디 웰링턴이 우리를 도와줬다고?”

“네. 스칼렛과 어울려 다니는 귀부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장신구로 위장한 마류 탐지기를 선물해서 대신 자료를 모아다 준 거예요. 사교 클럽에도 잘 안 가는 제가 어떻게 다음에 열릴 암시장의 카탈로그를 얻었겠어요.”

정말이지 뜻밖의 조력자였다.

라크시스와 차탈이 반목한 이래, 차탈의 사람인 레이디 웰링턴에게서 이런 호의를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스칼렛과 가까이 지낸 후로 레이디 웰링턴의 입지도 약해졌다고 해요. 황제 폐하께서 스칼렛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신다 해서요.”

요르문의 말이 끝났지만 시아는 대답 없이 암시장 입장 티켓을 만지작거렸다. 마도 시대의 숙녀로 지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곳의 여인들에게 명예와 친분이 중요하단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올가 웰링턴은 바로 그 두 가지를 희생하면서 시아 일행을 도운 것이다. 심지어 라크시스 옌과 관련된 이들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왠지 우리가 신세를 진 것 같네.”

“레이디 웰링턴이 그러더군요. 이걸로 빚은 갚은 셈이라고.”

라크시스는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시아를 제게 기대게 했다.

“빚, 이요?”

“차탈의 발작을 치료해 준 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 레이디 웰링턴이 한밤중에 켈튼저의 문을 두드리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그녀가 그렇게 엉망인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난 것도 처음이었죠.”

라크시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스크롤을 썼는지 시종도 없이 홀로 켈튼저에 찾아온 올가 웰링턴의 몰골은 비에 젖은 생쥐처럼 정말이지 엉망이었다.

발작이라면 황궁 치유사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라크시스의 말에 올가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없이 몸을 수그렸었다.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발 주군을 살려주십시오.’

황궁 치유사 대신 라크시스를 찾아왔던 올가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의 발작은 카얄의 저주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를 황궁 치유사에게 보였다간 대공이 사특한 마법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번져 나갈 수도 있었으니까.

올가 웰링턴의 출신은 지금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쩌다 차탈의 종복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크시스는 그녀의 충성심 하나만큼은 뭇 기사들 못지않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라크시스의 말을 가만히 경청하던 시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전 사실 레이디 웰링턴이 저희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싫어하긴 합니다. 남들 앞에서 대놓고 티를 내지 못할 뿐.”

“아하하…….”

시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싫어하긴 하는구나. 하긴 주변에 사람만 없으면 순식간에 쌀쌀맞아지는데, 그걸 모를 수가 없지.

라크시스는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잘 됐습니다. 이번 암시장 건만 무사히 끝나면 당신의 시간 여행도 별 탈 없이 마무리될 테니까요.”

“라크.”

그가 일어나자, 그와 닿아 있던 어깨가 비어 휑하니 추워진 기분이다. 갑자기 밀려든 쓸쓸함에 시아는 굳은 얼굴로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봉인이라면, 시간 여행이 마무리된다.

정말 이젠 끝인 거구나.

“시아. 내가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했잖아요? 아, 이런.”

길었던 여정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옆에 앉아 행커치프로 그녀의 눈물을 조금씩 훔쳐주었다.

“당신을 울리려던 건 아닌데.”

“원래 저도 이런 식으로 울진 않는데, 이번 봉인이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그냥, 갑자기…….”

난데없이 시작된 시간 여행이었으나, 칠십 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여행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알고 있던 과거를 맞닥뜨리는 즐거움, 생생한 역사를 몸소 느껴 본 짜릿함.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까지.

칠십 년 후로 돌아가면 이곳에서 마주했던 모든 것은 빛바랜 사진처럼 변해 과거를 장식할 것이다. 요크 부인도, 레베카도, 밀레이나도……. 마법사가 아닌 자들은 모두 수명이 다해 있겠지.

“봉인을 손에 넣으면 원래 시대로 돌아가게 되겠죠?”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긴 잠을 자고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칠십 년 후로 돌아가 눈을 뜨면 내가 옆에 있을 거예요. 당신은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되고, 응?”

시아는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흑백의 과거가 되어 버리는 시간, 하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킬 것이다. 칠십 년 후에도 그가 살아있다는 건 다행이었으나…….

“하지만 라크는 칠십 년이나 절 기다려야 하잖아요.”

“참는 데 자신 있다고 했잖아요. 수천 년을 죽은 듯이 살아왔던 접니다. 한 세기도 채 안 되는 시간은 제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 시아의 눈물샘이 터졌다.

평소엔 그렇게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럴 땐 왜 이렇게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걸까. 영원히 못 만나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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