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 * *
“레이디, 제가 이런 편지를 받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타자기가 목적인 줄 알았는데, 레베카의 본론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시아는 찻잔을 홀짝이며 레베카가 내민 편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걸 어쩐담.’
편지의 발신인이 범상치 않았다.
시아는 라크시스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막스 블레어로부터]
“이건… 블레어가에서 온 편지네요. 막스 블레어라면 리암 블레어의 남동생, 맞죠?”
“참 뻔뻔하지 않나요, 레이디? 우리 레베카, 아니, 아가씨에게 모욕을 줄 땐 언제고 아가씨에게 약혼자가 생기니까 이제 와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니까요?”
갓 만든 푸딩을 내오던 에밀리가 돌연 흥분하여 끼어들었다. 로드리치 저택의 메이드 시절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요크 부인처럼 단정한 옷을 갖춰 입은 그녀는 마치 뮐러가의 실세처럼 보였다.
그 모습과 흥분된 목소리에 살짝 기가 눌린 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좀 그렇긴 하네요.”
“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별로죠. 완전 저질이에요. 어쩜 동생을 이용해서 우리 아가씨에게 다시 접근할 생각을 하냔 말예요! 레이디, 이럴 땐 부인들께 소문을 내서 블레어가를 아주 망신을 줘버려야 한다니까요?”
“이런, 뮐러가의 사용인은 주인의 손님에게 ‘요구’를 하는군?”
라크시스의 차분한 지적에 에밀리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다. 그간 레이디 켈튼과 레베카와 함께 셋이서 만나던 때의 습관이 그대로 나온 것인데, 고대 마법사의 눈엔 그것이 꽤나 건방지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에밀리, 진정해. 옌 경, 죄송해요. 지금 에밀리가 많이 흥분했나 봐요. 레이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레이디. 제가 정말로 무례를 저질렀어요.”
에밀리는 재깍 고개를 숙였다. 로드리치 저택에서 떠날 때, 루즈 부인이 했던 말이 떠오르고 만다.
‘에밀리. 넌 이제 일개 메이드가 아니야. 저택의 관리를 도맡은 부인은 주인의 얼굴이나 다름없단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거라.’
다행히도 레이디 켈튼은 에밀리를 너그럽게 용서했다. 용서라기보단, 시아가 에밀리와 레베카를 자주 봐왔던 사이여서 넘어간 것에 가까웠지만.
“괜찮아요. 에밀리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니까요.”
에밀리는 재차 감사 인사를 하고는 자책하며 떠나갔다.
더 이상 마냥 해맑은 어린아이일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긴 했지만, 하녀장은 에밀리가 원하는 지위가 아니었던가.
시아는 풀죽은 에밀리의 뒷모습을 보며 말없이 응원을 보냈다.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할 수 있고, 특히나 초보는 더더욱 그러니까.
어색해진 분위기에 시아는 괜히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라크시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막스 블레어는 리암이 아니잖아요. 라크, 어떻게 생각해요?”
형이 잘못했다고 해서 동생까지 미워해야 하냐는 뜻이다. 하지만 이곳은 마도 시대. 마도 시대의 신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가문의 명예는 숙녀의 명예이자, 신사의 명예입니다만 지금 미스 뮐러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군요.”
모호한 대답을 남긴 라크시스의 시선을 따라가니, 무릎께의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의 레베카가 있었다. 성을 내던 에밀리가 없어지자 한층 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끄덕임과 레베카를 번갈아 보다 불현듯 깨달았다.
‘설마 레베카가 막스 블레어를……?’
좋아해?
만약 그게 진짜라면, 관계가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절대로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본인도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결국 시아는 총대를 메고, 침묵을 깼다.
“그러고 보니 로렌시아 호 사건 이후 막스 블레어를 만나본 적도 없네요.”
라크시스가 대화를 거들었다.
“부상 당시엔 요양을 이유로 손님을 거부했습니다만, 회복되었을 즈음에도 막스 블레어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출혈이 많았던 게 역시 후유증을 남겼나 봐요.”
“출혈량은 많았지만, 그 당시 응급처치를 했던 건 저였습니다. 치유술을 받았다면 무리 없이 회복할 만한 상태였어요.”
아, 그래?
시아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로렌시아 호 사건 당시 저주의 진에 희생됐던 막스 블레어는 그 후 건강 문제를 이유로 모든 경찰 조사를 거부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로렌시아 호 사건의 진상은 미제인 상태로 남아 있는데, 충분히 회복되었을 거라니…….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의 블레어가를 생각한다면 막스 블레어가 만남을 거부한 이유도 추측 가능하죠. 리암 블레어는 오래전부터 카얄과 손을 잡은 상태였잖아요? 막스 블레어도 한패였을 가능성이 꽤 커요.”
“레베카를 위험에 빠트린 사건의 한 패… 라는 말씀이죠?”
“추측뿐이지만요.”
정말 답이 없다. 어째 레베카가 만나는, 혹은 좋아하는 사람이 다 이럴까. 하지만 시아는 내색하지 않은 채 대신 이렇게 물었다.
“레베카는 어때요?”
그러자 레베카가 사탕을 훔쳐먹다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네, 네? 뭐, 뭐가요?”
“레베카가 막스 블레어와 어떤 사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사람의 편지가 불쾌하진 않았던 거죠?”
“…그게…….”
레베카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고 우물거렸다. 만약 에밀리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답답해서 가슴을 쳤을 것이다.
결국 레베카는 찻주전자를 모두 비우고 나서야 새빨개진 낯으로 고백했다.
“막스 도련님은 제 첫사랑이었거든요.”
* * *
저녁 만찬까지 대접받은 시아와 라크시스는 결국 배가 잔뜩 부른 채로 레베카의 선물까지 한가득 받고 마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귀한 와인과 찻잎에 시아를 위한 부채와 장갑까지. 뮐러사에서 보석을 넘어 의류까지 사업을 확장시키는 중이라는 말에, 시아는 선물을 건넨 레베카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
‘그리고 여기……. 레이디, 와 주실 거죠?’
시종들을 시켜 켈튼의 마차에 선물을 싣게 한 레베카가 마지막으로 봉투를 건넸다. 시아는 그 봉투를 받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 축복 가득한 결혼식에 귀하를 초청하오니,
로드 체스터 클리포드와 미스 레베카 뮐러
*
로드 막시무스 프레드 콘힐의 아들과 미스터 프레데릭 뮐러의 딸의 결혼식에 귀하께서 참석해 주시기를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
일시 - 3521년 4월 1일 수요일.
장소 - 모르간 대성당. ]
레베카는 막스에 대한 고민 상담을 언제 했냐는 듯 배시시 웃었다. 약혼자에 대한 감정과 별개로, 결혼을 앞두고 느끼는 설렘에 푹 빠진 것처럼.
‘혹시 지난번에 제가 토라진 일로 마음이 상하셨던 거라면 죄송해요. 하지만 레이디께서 제 결혼식에 꼭 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청첩장을 받아 든 머릿속은 복잡했으나, 시아가 할 수 있었던 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레베카를 축하하는 일뿐이었다.
‘설마요, 제가 그런 걸로 마음이 상했을 리가요. 결혼 축하해요, 레베카. 꼭 갈게요.’
“시아, 괜찮아요?”
“그럼요, 전 괜찮아요. 그런데…….”
시아는 청첩장을 만지작거렸다. 약혼했다는 소식을 안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결혼을 하는구나.
열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지만, 마도 시대에서 이렇게 친하게 지냈던 숙녀가 없었기에 시아는 레베카의 결혼 소식에 마치 절친한 친구가 떠나가는 것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앞둔 만큼 사교계의 여러 사람들이 레베카의 청첩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베카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대부분 알고 있을 테고.
‘그런데도 막스 블레어는 레베카에게 만나달란 편지를 보냈지.’
“미스 뮐러가 걱정되십니까?”
“그냥요. 막스 블레어가 첫사랑이라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결혼 전에 편지를 받았으니 마음이 어떻겠어요.”
켈튼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시아는 한숨을 푹 쉬며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아까 전 에밀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흥분했던 것이 백번 이해가 된다.
‘레베카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 했었는데. 지금의 약혼자와는…….’
사교 활동을 해야 할 땐 저택에 처박혀 있었으면서, 왜 이제야 나타나서 레베카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든단 말인가.
라크시스는 그런 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막스 블레어는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죠. 그 탓에 여러 숙녀들과 염문설을 뿌리기도 했습니다만, 실제론 과장되거나 왜곡된 소문이었다고 합니다.”
“아, 그래요?”
라크시스는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아르카나 거리를 바라보며 막스 블레어를 회상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곤 하는데, 글쎄요. 제가 만났던 막스 블레어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거든요.”
“혹시 본인이 일부러 그런 이미지를 만든 건 아닐까요?”
“평판이 중요한 사교계에서 굳이 그런 소문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결혼 생각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서늘한 바람이 마차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라크시스는 창을 닫고 시아의 어깨에 제 코트를 둘러주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막스 블레어는 결혼 생각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군요. 약혼녀와 만나기로 한 자리에 코르티잔을 끼고 나타난 적도 있었으니까요.”
윽…….
시아는 대번에 싫은 표정을 지었다. 약혼녀와 만나는 자리에 누굴 데려왔다고? 하지만 그런 소문에 비해 막스 블레어에 대한 라크시스의 평가는 의외로 후했다.
“하지만 그 덕에 막스 블레어는 파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겐 다행인 일이었죠. 막스 블레어의 약혼녀에게 큰 빚이 있었거든요. 블레어가에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큰 빚이요.”
시아는 막스에 대한 판단을 내리길 포기했다. 소문이야 어쨌든 자신은 막스 블레어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다만 레베카가 하필이면 안 좋은 소문이 무성한 남자를 좋아했었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런 남자를 레베카가 오랫동안 좋아했다니.”
“사람 마음은 원래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라크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시아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라……. 하긴, 시아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칠십 년 전의 마법사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아는 변명하듯 막스를 감싸던 레베카를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마치 의문의 남자 B에게 편지를 받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로드리치가에 오시면 늘 제게 잘해 주셨어요. 그땐 제가 뮐러가의 후계자가 아니라 갓 일을 시작한 어린 메이드였는데도요. 블레어저에서 가져온 간식을 후원에서 몰래 나눠주시기도 하셨죠.’
‘레베카.’
‘늘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분이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저택에 오셨던 신사분들 중 메이드들이 훔쳐보지 않았던 분은 없었죠. 사용인들이야 어차피 그분들과 가까워질 접점도 없으니, 다들 이런저런 상상을 하곤 했는데.’
‘…….’
‘막스 도련님만은 제게 다가오셨어요. 루즈 부인은 높으신 분들 놀음에 놀아났다가 피를 보는 건 저희들이라고 했지만, 세상의 어떤 여인이 친절한 신사를 마다할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