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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57)화 (257/292)

257화 

요르문은 라크시스에게서 쇳조각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를 떠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요르문이 연구실에 틀어박히러 갔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인지한 시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요르문! 점심은 먹고 시작해!”

그러나 요르문은 이미 쇳조각과 함께 사라진 후였다. 시아는 멍하니 있다가, 이 상황이 민망한 듯 코끝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제가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차라리 두 시간 정도 늦게 말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랬다면 요르문이 적어도 식사는 했을 테니까요.”

“제가 여러모로 타이밍을 잘못 맞췄네요.”

한 번 연구실에 틀어박히면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요르문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한동안 그를 마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 아침에 함께한 식사가 마지막이라니. 라크시스의 말마따나 점심 식사라도 한 후에 말을 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라크시스는 시아를 위로하듯 어깨를 감싸안았다.

“미래의 요르문이 왜 당신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봅시다. 이걸 함께 풀어보라고 했던 건, 제가 이게 무엇인지 알아차릴 거란 생각을 했단 소리일 테고요.”

“그렇겠죠……?”

하지만 라크시스도 쇳조각의 정체를 알아본 것 같진 않았다. 대체 미래의 요르문 님은 자신에게 왜 이런 걸 주셨을까?

“요르문은 빙 돌려 말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당신에게 별다른 설명 없이 이것만 건넸다는 건 그도 이 조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혹은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었다는 뜻이겠죠.”

라크시스는 고민에 빠져든 시아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는 어느새 코트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의 손짓에 초대장이며, 각종 카탈로그가 책상에서 밀려났다. 라크시스는 눈이 휘둥그레진 시아의 어깨에 숄을 걸쳐주며 눈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잠깐 생각해서 풀릴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일단 아르카나부터 다녀올까요? 오늘 해결해야 할 과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니까요.”

* * *

느지막한 오후. 켈튼의 마차가 새 단장을 마친 뮐러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레이디! 오셨어요?”

시아가 왔다는 말에 레베카는 반색하며 뛰어나왔다. 밀레이나가 있었다면 뮐러가의 가주씩이나 되어서 경망스럽게 행동한다며 잔뜩 꾸짖었을 테지만, 밀레이나가 없는데 뭐 어떠랴.

시아가 반가웠던 레베카는 라크시스에게서 냅다 약혼자를 낚아채 팔짱을 꼈다.

“레베카. 잘 지냈어요?”

“저야 당연히 잘 지냈죠. 레이디도 잘 지내셨지요? 하긴 기습적으로 약혼하신 두 분만큼 잘 지내고 계실 분들이 어디 있겠어요. 약혼식 준비는 잘 되고 계시고요?”

가주와 손님의 입장에 복도에 열을 맞춰 서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에밀리는 당당히 하녀장의 자리를 꿰차고,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도 약혼식에 쓸 꽃을 보고 왔어요. 기간이 촉박해서 성을 모두 장식할 만큼의 양이 준비될진 모르겠지만요.”

“소문의 성이 드디어 공개되는군요? 아, 기대돼요! 마거릿 황제의 별장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게다가 레이디께선 이제 성의 주인이 되시는 거잖아요. 이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요!”

레베카의 재잘거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끝이 없었다. 시아는 한걸음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라크시스와 눈을 마주치곤, 다시금 레베카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 자신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탓이다.

진짜로 라크시스에게 성이 있었다고? 그런데 이젠 그 성이 자신의 것이라니?

‘진짜, 이 사람의 계획은 늘 상상을 초월한다니까.’

시아는 최근에서야 라크시스의 우스꽝스러운 가명의 성이 ‘랑케’인 이유를 알게 됐다. 라크시스 옌이 랑케르트 성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랑케르트 성이라니, 내가 알던 역사 속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성이었어.’

랑케르트 성은 노년이 된 마거릿 1세가 딸 에블린에게 황위를 물려준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다무스 양식으로 지은 성이었다.

자신을 친딸처럼 여기고 길러준 에드먼드와 아스타를 기리기 위해 슈테른베슈테크의 성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비화가 얽혀 있기도 했다.

그리고 마거릿은 죽으면서 랑케르트 성과 영토를 딸 에블린이 아닌 라크시스에게 상속했다.

그 당시 봉건 가신들과 마거릿의 자식들은 견제 세력이 늘어나는 것을 걱정해 고대 마법사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내 비록 제국의 푸른 피라고는 하나, 나의 모국은 감히 다무스라 할 수 있으니. 고대 마법사는 다무스와 제국 모두의 평화를 위해 노력한 자이네. 경들은 나의 결정을 반대하지 말게.’

마거릿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리하여 랑케르트 성과 영지는 라크시스에게로 고스란히 넘어왔고, 랑케르트 시는 그 옛날의 관습을 존중하여 현재까지도 제후에게 속한 작은 공국처럼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명의 성을 다무스 식으로 지은 거였구나. 어쩐지 이름이 앞뒤가 안 맞는다 했어.’

랑케르트 성에 관한 일화는 제국인들에겐 이미 유명했다. 하지만 시간 여행 이후부터 마도 시대까지 일어난 변화를 모르는 시아에게는 굉장히 낯설고 충격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아의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레베카는 재잘거리며 시아에게 회사 홍보를 부탁하고 있었다.

“반지는 이미 선수를 빼앗겼으니 어쩔 수 없지만 다른 보석들은 꼭 뮐러 사의 보석을 이용해 주셔요. 최근에 동부의 사파이어 광산의 소유권도 가져왔거든요.”

사파이어 광산의 소유권을 가져왔다고?

이제 막 사업에 발을 들인 아가씨의 입에서 나온 엄청난 말에 시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수완이 대단한데요?”

“대모님 덕분이죠. 전 대모님이 일궈 놓으신 회사를 레이디 같은 유명인사를 통해 홍보해 보려 하는 거고요.”

아무리 밀레이나가 도왔다고 해도 말이지.

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걸 보면 레베카에게도 그녀의 운명이 있는 것 같았다. 뮐러가의 후계자로서의 운명 말이다.

“레이디가 뮐러 사의 보석을 몸에 걸치고 랑케르트 성에서 식을 올리신다면 아마 제국의 모든 레이디들이 따라 하려 할 거예요.”

“에이, 제가 황제 폐하도 아닌데 그런 일이 있겠어요.”

“못 믿으시겠다면 내기라도 하실래요? 누구의 말이 맞는지 말이죠.”

내기, 라는 말에 움찔한 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라크시스와의 소원 내기를 했던 밤이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하, 일단 저택을 안내해 줄래요? 말씀하셨던 기계부터 먼저 보기로 해요.”

그리하여 일행은 간단한 다과도 모두 생략하고 곧장 프레디 뮐러의 서재로 향했다.

프레디 뮐러의 서재는 요르문의 연구실과 닮아있었다. 태엽과 크랭크가 즐비한 마도 공학자의 방.

엄밀히 말하면 프레디 뮐러는 마도 공학자가 아니었음에도 두 사람의 서재에서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건, 프레디나 요르문 모두 연구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재에 들어서는 세 사람의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깨끗이 치워두긴 했으나, 오래전 카얄이 저택을 습격했던 흔적이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레베카는 아버지의 공간에 들어설 때마다 긴장이 된다고 했다.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자꾸만 생각이 난다며 말이다.

선을 그리며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 작은 먼지들이 빙글빙글 부유한다. 책장 가득 묵혀 놓은 책들에선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겼다.

레베카는 시아와 라크시스를 서재 한 편으로 이끌었다. 책상 옆에는 장롱 크기의 거대한 물건이 흰 천으로 덮여있었다.

“이거예요, 레이디.”

레베카는 천을 잡아당겨 문제의 물건을 보여 주었다. 그곳엔 검은 광택이 반질반질 빛나는 타자기가 거대한 기계에 매달린 채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자기처럼 생겼는데요? 물론 그것보단 복잡하게 생겼지만요.”

시아의 평가는 정확했다. 타자기는 타자기였으나, 그보다 훨씬 복잡한 장치가 달린 타자기.

규모로 본다면 타자기가 메인 장치는 아니었으나, 입력과 출력이 가능한 장치는 타자기가 유일했으므로 이를 타자기라 부를 수밖에 없어 보였다.

타자기엔 인쇄된 종이가 나오는 출력장치 외에도 작은 액정이 추가로 달려 입력한 글자를 볼 수 있었다. 타자기와 연결된 장롱만 한 기계 뒷면에는 무언가를 끼울 수 있는 텅 빈 공간도 있었다.

“켜 봐도 되는 거죠?”

“그럼요.”

타자기 뒤로 줄줄이 늘어진 선을 이리저리 연결하자, 버튼에 차례로 불이 들어왔다. 장롱만 한 장치의 한 면을 빼곡히 채운 바퀴와 선이 마치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는 것처럼 끝없이 이어지며 돌아갔다.

삐― 소리가 난 후 기계에서 안정적인 작동음이 들리자 시아는 조심스럽게 ‘안녕.’이라는 단어를 입력해 보았다.

[안녕.

= 1FT90Z]

어라?

“이상하죠? 글자가 누르는 대로 나오지 않더라고요. 제가 몇 번을 해봤는데도 그래요. 오래돼서 고장이라도 난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시아의 당황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레베카가 말했다. 그 후 몇 번을 더 단어를 입력해 보았는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라크, 감이 잡히는 거라도 있을까요?”

시아의 물음에 라크시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시아보다 한층 더 세세하게 타자기를 뜯어보더니 장치 뒤의 텅 빈 공간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이 뒤에 끼울 수 있을 만한 장치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미스 뮐러. 혹 이곳에 끼워져 있던 부품은 따로 없었습니까?”

“이런 걸 말씀하실까요……?”

레베카는 서랍 속에서 둥근 원판을 꺼냈다.

톱니바퀴를 닮은 원판의 가장자리엔 숫자열과 문자열이 새겨져 있었다. 원판은 마치 맞춘 것처럼 거대한 장치 뒤의 공간에 쏙 끼워졌다.

“맞는 것 같군요.”

“장식장 선반에서 발견했어요. 처음부터 이 기계와 같이 있었던 건 아닌데, 왠지 관련된 물건인 것 같아서 보관해 뒀던 거거든요.”

레베카에겐 공학도로서의 소질도 있는 게 아닐까. 어쨌거나 레베카는 설명서도 없는 저 거대한 타자기에 선을 연결해 기계를 켜보았다는 거니까.

시아는 라크시스와의 대화에서 의외로 막힘이 없는 레베카가 신기했다.

한참의 대화 끝에 라크시스는 결국 결론 내리기를 포기했다.

“미스 뮐러. 아무래도 여기서 살펴보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실례가 안 된다면 켈튼저로 가져가서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아버지의 유품이니 조심히만 다뤄주세요.”

데려온 시종도 없이 대체 이 큰 기계를 어떻게 가져가려고 그러지?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윽고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기함하고 말았다.

“…와, 이런 게 마법인가요?”

라크시스가 거대한 기계를 통째로 공간이동을 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스크롤을 쓰거나 마법사를 고용해도 이렇게 깔끔하게 물건을 옮길 수는 없는데. 게다가 비용도 상당하고 말이다.

여행을 떠나는 숙녀들의 짐이 얼마나 많은가. 캐리어 수십 개를 쌓은 마차를 끄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은 저 마법 하나로 금세 해결될 것이다.

“레이디, 진짜 부럽네요.”

“네?”

그러나 라크시스의 마법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시아로서는 이것이 놀라운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시아의 태도에 레베카는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며, 두 사람을 등 떠밀어 응접실로 내려갔다.

“아녜요, 레이디. 우리 이제 차나 한잔하러 가요. 사실 레이디를 만나면 이야기하고 싶은 게 또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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