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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56)화 (256/292)
  • 256화 

    시트리나 성녀는 국교회의 성자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성자는 성서에 등장한 것이 전부였는데, 성녀 시트리나는 생존과 죽음이 역사서에 모두 기록된 실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시간 여행으로 다무스의 역사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다무스엔 성녀의 이름을 딴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었겠지.’

    시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역사의 한 자락을 떠올렸다.

    카얄에 의해 다무스가 멸망한 후, 제국이 국교회의 전파를 위해 씨즐턴에 세운 성 시트리나 대성당. 시트리나 성녀는 슈테른베슈테크의 마녀, 백작 아스타와 싸우다 부상당한 기사들을 대성당에서 직접 돌보았다고 알려졌다.

    ‘이젠 이런 역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렸지만.’

    요르문은 상념에 빠진 시아를 일깨우며 다음 장을 펼쳐 보였다.

    “누님, 이 옆의 설명도 함께 보시겠어요?”

    […성녀 시트리나의 신성력은 놀랍게도 악마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성녀가 생전에 내내 지니고 다녔다던 성물은 마치 악마를 가둔 것처럼 검은 기운을 품고 있었고, 성물을 만지는 자를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다만 신실한 사제의 주도하에 성물의 기운을 쬔 마법사들은 마력이 급속도로 회복되었으니, 이것을 악마의 요사스러운 주술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하…….

    시아는 요르문이 왜 설명을 보면 감이 잡힐 거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요르문은 이제 한껏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껏 봉인이 왜 감지되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국교회에서 신성력 내지는 성력이라 부르는 힘도 실은 마력의 일종이거든요. 아마 사제 중에서도 마력이 상당한 자들이 불안정한 봉인의 기운을 억눌러 두었기에 지금껏 봉인의 파장이 감지되지 않았던 걸 거예요.”

    실제로도 책자에는 비슷한 경고가 적혀 있었다. 낙찰자는 성물을 보관함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며, 맨손으로 성물을 만지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등의 문구였다.

    문득 돋아난 소름에 시아는 팔을 문질렀다.

    말이 좋아 성물이지, 봉인이란 건 실은 폭탄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마력 덩어리이지 않은가? 지금껏 눈앞에서 터질 뻔한 봉인만 해도 몇 개인가. 심지어 오토마톤의 심장은 실제로 폭발하기까지 했고 말이다.

    “지금까지 봉인이 무사히 보존된 건 운이 좋았다고 봐야 되는 거겠지……?”

    “그렇죠. 성물이 광룡의 힘을 봉인한 물건이라곤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요.”

    시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요르문에게 되물었다.

    “요르문, 그런데 이게 정말로 봉인이 맞을까? 너도 알다시피 사실 난 시간 여행마다 불안정한 봉인 근처로 떨어졌단 말이야.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단 말이지. 아, 물론 봉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고 해서 조사를 안 하겠다는 소리는 아니고…….”

    “누님, 이러면 믿으시겠어요?”

    시아는 요르문이 책상 서랍에서 꺼내 든 종이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파장 감지기의 측정값이잖아?”

    프레디 뮐러의 바람 장미 파장 값인 -980mght의 그래프가 선명히 그려진 모눈종이가 시아의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요르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누님. 이건 여덟 번째 봉인이 확실해요. 이렇게 증거가 있으니까요.”

    * * *

    펜촉이 종이를 긁어내리는 사각사각 소리만이 서재에 가득하다.

    창문을 타고 따스한 햇볕이 마루를 비추는 가운데, 시아와 라크시스는 각자 책상과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종이 더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라크는 요르문이 봉인을 찾은 걸 알고 있었어요?”

    “봉인을 추적하는 건 알고 있었죠. 제가 한눈파는 사이에 암시장에서 조력자를 구한 건 몰랐지만요.”

    두 사람은 각자의 일에 집중한 채 가만히 대화를 이어갔다. 얼핏 보면 두 사람 모두 서류에 몰두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 많은 걸 대체 언제 다 보란 말이야.’

    시아는 끙끙거리며 라크시스를 흘끔거렸다.

    똑같이, 아니, 자신보다 배는 많은 서류를 보면서도 라크시스는 어떻게 저리 여유로울 수 있을까.

    “으아, 정신이 없네요. 할 일이 갑자기 산더미처럼 늘어날 줄 몰랐어요.”

    “그래서 약혼식은 제가 도맡아 하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라크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제가 가만히 있을 성격인가요? 무엇보다 우리 둘의 일인데, 같이 해야죠.”

    그렇게 말하며 시아는 씨익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웃는 건 웃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리 약혼했어요.’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준비할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뿐 아니라 암시장에 잠입할 계획과 저택으로 물밀듯이 날아드는 각종 초대장까지 처리해야 해야 한다니. 차라리 의술원에서 당직을 서는 게 속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누님, 쉬면서 하세요. 제가 간식을 좀 가져왔어요.”

    서재에 들어온 요르문이 시아와 라크시스 앞에 오이 아이스크림이 담긴 유리그릇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으,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시아는 오이 아이스크림을 한입 크게 퍼먹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시원한 게 입 안에 들어오니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것 같았다.

    라크시스가 분류해 놓은 귀족 목록을 비교하며 티 파티와 전시회, 무도회 초대장에 답장을 쓰던 시아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만약 요크부인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숙녀답지 못하다며 분명 기겁을 했을 터였다.

    소파에 던져 놓은 손가방이 등에 배겼다. 칠십 년 후에서 가져온 물건 중 유일하게 깨끗한 상태로 보존된 시아의 소지품이었다.

    시아는 몸을 꼼지락거리며 등 뒤에 깔린 손가방을 빼내곤, 무언가가 생각난 듯 가방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 쪽지에 적힌 숫자는 무슨 뜻일까?”

    시아가 꺼내 든 건 프레디 뮐러의 유품에서 나온 숫자 쪽지였다. 레베카가 내내 목에 걸고 있던 로켓 목걸이에서 나온 쪽지였는데, 숫자의 의미는 지금까지도 알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누님, 아직까지도 그걸 고민하고 계셨어요? 바람 장미에 관련된 단서였겠죠. 저희는 이미 프레디 뮐러의 연구들을 모두 확인했잖아요?”

    “가방을 열 때마다 보이니까 그렇지. 아, 맞다. 요르문. 이게 뭔지 알아?”

    시아는 쪽지를 도로 집어넣고 가방을 뒤져 또다시 무언가를 꺼냈다. 별달리 의도를 가지고 꺼낸 물건은 아니었으나, 요르문의 반응이 뜻밖에 진지했다.

    “어, 이게 왜 누님께 있어요?”

    “뭔지 알아?”

    어느새 라크시스도 시아가 꺼낸 물건을 확인하러 가까이 와 있었다. 시아의 손에 들린 건 한 뼘이 채 안 되는 크기의 쇳조각이었다.

    “황궁 동관 공사 현장에서 나온 조각이에요. 마력 동력원에 박혀 있었다던 그 조각이요. 공사가 끝나고 인부들이 버린 줄 알았는데.”

    “아, 그래?”

    숙녀의 가방에서 어찌하여 이런 쇳조각이 나오게 되었는가. 조각의 출처를 밝히려면 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수국관에서 시아가 갈리프의 존재를 확인했던 그 날. 카얄에게 공격받고 피투성이가 되어 옌의 저택으로 몸을 숨겼던 갈리프를 요르문이 만났던 바로 그 날.

    이 쇳조각은 갈리프에게서 요르문으로, 요르문에게서 다시 시아에게로 넘어왔던 물건이었다. 물론 시아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쇳조각을 받아 들어 살피던 요르문이 돌연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잠시만요. 누님, 이건 핏자국 아니에요?”

    핏자국이라고? 시아는 얼른 쇳조각을 도로 받아 들어 살폈다.

    진짜네. 마치 사람을 찌른 것 같은 핏자국인데……. 요르문 님이 이런 걸 내게 주셨다고? 그것도 마도 시대로 돌아가게 되면 모두와 함께 이 조각을 보라고 하셨단 말이지?

    “누님, 이게 뭔지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나도 잘 몰라, 왜 핏자국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는데…….”

    “누님.”

    요르문은 시아를 단호하게 불러세웠다. 이거 마치 미래의 양부에게 혼나는 기분이다. 뜨끔하며 요르문의 눈치를 보던 시아는 결국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다, 요르문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게, 실은…….”

    * * *

    “미래의 제가 누님께 이걸 줬다고요? 그것도 같이 풀어보라면서? 그 얘기를 왜 지금 하세요!”

    “미안.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어.”

    시아는 요르문의 눈치를 보았다. 일부러 안 알려 주려던 건 아닌데.

    라크시스도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쇳조각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봤다.

    그가 턱을 괴고 조용히 물었다.

    “시아, 이걸 준 요르문은 당신이 시간 여행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죠.”

    “네. 제가 요르문 님께 시간 여행을 한단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거든요.”

    “그럼 이게 시간 여행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젠장, 조각은 공사 현장에서 사라지고 없다고요.”

    요르문은 짧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방 안을 서성였다. 이 조각이 공사 현장에서 사라졌다니, 시아의 머릿속에 문득 불길한 추측이 떠오르고 만다.

    “혹시… 카얄이 동관 공사로 노리던 게 이 조각이었을까요?”

    시아가 말을 맺자마자 요르문과 라크시스의 시선이 일제히 시아를 향했다. 오고 가는 눈빛 속에 담긴 건 오로지 침묵뿐.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관에서 봉인이 발견되진 않았으나 시아가 기억하는 과거에서도, 시간 여행으로 바뀐 마도 시대에서도 결국 동관 공사는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것도 카얄에 의해서 말이다.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건 라크시스였다.

    “하지만 특별한 게 없었던 조각이라고 들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마도구라거나 마력을 품은 광석이었다면 요르문이 단번에 알아보았겠지요.”

    “전 마력 동력원의 안정에만 신경 썼죠. 누님이 거기서 사고가 일어난다고 했었으니까요. 만약 사고가 일어난다면 봉인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고요.”

    “핏자국이 있는 걸 보니, 칠십 년이 흐르는 동안 이 조각에 누군가가 깊게 찔린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많고 많은 무기 중 왜 하필 이런 평범한 쇳조각을 이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군요.”

    “분명 뭐가 있는 거예요. 저주나 봉인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카얄이 당장 조사해 봐야겠어요, 누님. 간만에 머리를 좀 쓰겠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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