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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55)화 (255/292)
  • 255화 

    * * *

    “숙녀분, 발을 이리로.”

    “신발 정도는 제가 신을 수 있는걸요.”

    “당신의 손은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잖아요?”

    시아는 뜨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도 시아는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도 시대의 드레스는 왜 이리 많은 걸 겹쳐 입는지……. 시아의 발에 순식간에 구두를 신긴 라크시스는 코르셋 때문에 끙끙거리는 시아를 돕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냥 있고 싶네요.”

    “당신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폐하께서 심히 곤란해지실 겁니다.”

    “그래서 지금 갈 준비를 다시 하는 거잖아요?”

    시아는 볼멘소리를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무도회는 한창이겠지만 주인공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터였다.

    “사실 저도 당신과 이대로 밤을 보내고 싶은데… 가지 말까요?”

    라크시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허벅지를 가볍게 치며 키득거렸다.

    “안 돼요. 일어나세요, 나의 피앙세.”

    “시아, 그런 행동은 어디서…….”

    라크시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치 나쁜 말을 배운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아는 먼저 일어나 라크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돌아가자고요.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어요. 라크, 절 데려다주실 거죠?”

    짓궂게 웃고 있는 저 얼굴도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라크시스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피워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분부대로 하죠, 나의 레이디.”

    이윽고 공간이동마법의 바람이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감쌌다.

    황궁의 테라스로 돌아간 시아와 라크시스는 함께 홀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황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시아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프리드리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레이디! 그동안 어디 계셨, 어머.”

    시아를 보고 반색하며 달려오던 레베카가 입을 가리며 멈춰 섰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오는 시아의 손에서 번쩍이고 있는 보석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자, 레이디 켈튼. 남은 곡은 저와 함께 추실까요?”

    “네에. 어디 실력 한 번 보여 주시겠어요?”

    수줍게 웃는 두 사람의 손이 서서히 얽혀든다.

    동이 틀 때까지 이어진 무도회에서 시아 켈튼의 손가락에 끼워진 사파이어 반지를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스칼렛이 무도회에 오려다 황궁 앞에서 거절당했다고요?”

    피로가 잔뜩 내려앉은 얼굴로 신문을 뒤적이던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엥? 정말요? 누님, 그런 소식은 어디서 들으셨는데요?”

    “이것 봐. 신문 사이에 이런 소식지가 끼어있는데?”

    시아는 글자가 빽빽한 작은 책자를 신문 사이에서 꺼내 들어 흔들었다. 때마침 응접실로 디저트를 들고 들어오던 요크부인이 분홍빛 책자를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역시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네요. 사교계 풍문 가장 빠르게 전달받을 수 있는 방법이지요. 안 그래도 주인님과 아가씨가 어서 신문을 보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책자가 궁금해서요? 그냥 먼저 보셔도 되는데. 다음부터는 마음껏 보셔요, 요크부인.”

    “아가씨는 어쩜 이리도 상냥하실까. 하지만 사용인이 되어서 주인님이 손대지 않은 신문을 함부로 건드릴 순 없지요. 아침 식사 정리가 끝나고 사용인들끼리 모여 소식지를 보는 재미도 은근 쏠쏠하답니다?”

    요크부인은 호호 웃으며 다기와 티 푸드를 내려놓곤 응접실을 떠났다.

    시아는 버슬이 달린 치마를 살랑살랑 흔들며 멀어져 가는 요크부인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곳에선 가십지를 안 보는 사람이 없단 소리지? 사교계의 모든 일들을 이 ‘레이디 마레’라는 익명의 저자가 매일같이 책자로 만들고, 그 책자를 온 제국민이 저렇게 매일같이 모여서 본단 말이지?

    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오늘 자 소식지의 마지막에 적혀 있던 한 문단 때문이었다.

    […사파이어가 사람의 손가락에서 자라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믿겠는가? 필자는 그 놀랍고도 진기한 일이 지난밤의 황궁 무도회에서 실제로 벌어졌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궁금하면 전말을 직접 확인해 보시라. 레이디 켈튼을 여러분의 티 파티에 초대하라는 말이다.]

    “왜 그러십니까, 시아. 어디 아픈가요?”

    “아뇨, 그…….”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있던 라크시스는 모노클을 벗고 시아의 옆에 다가와 앉더니, 그녀가 말도 잇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하.”

    “아하? 자네는 이게 그냥 아하, 라는 말로 끝날 일 같아?”

    소식지를 보고 괜히 울컥한 요르문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결혼이라는 중요한 일을 가족인 자신과 일절 상의도 없이 결정해 버린 시아와 라크시스에 대한 섭섭함 때문이었다.

    “심지어 무도회 중간에 나가서, 뭐? 레이디 켈튼의 새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어서 돌아와?”

    “요르문, 진정해. 그런 게 아니라…….”

    “누님도 너무하세요! 적어도 저한텐 알려 주셨어야죠. 법적으론 제가 누님의 유일한 가족이라고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알려 주려고 했는데…….”

    시아의 목소리가 점점 더 기어들어 갔다. 오늘 아침에 알려 주려고 했는데,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가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는 뒷말은 결국 끝까지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약혼식 카탈로그를 들고 온 라크시스가 시아의 어깨를 자신 쪽으로 슬그머니 당기며 질문했다.

    “시아, 이런 장식은 어떤가요? 당신이 지나갈 길 위로 꽃 덩굴을 늘어뜨릴지, 아니면 양옆으로 물길을 만들어 조명을 띄울지 고민 중인데.”

    “자네, 정말!”

    요르문은 결국 벌떡 일어나 라크시스의 앞으로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왜, 내가 자네의 사촌 누님에게 정성을 다하는 게 그렇게도 불만인가?”

    “둘 다 진정해요. 요르문, 라크?”

    “이런 식이면 내가 발견한 건 이야기 안 해줄 거야!”

    빼액 소리친 요르문은 결국 심각하게 삐져 버려서 시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시아는 요르문의 옆으로 다가가 팔짱 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요르문. 내가 잘못했어. 네가 내 유일한 가족이란 건 당연히 알고 있어. 내가 중요한 결정을 상의도 없이 성급하게 내려 버렸네. 미안해, 요르문. 응? 그러니까 나 한 번만 봐주라, 응?”

    어째 미래의 양부를 달래는 기분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로 맞긴 한가 보지.

    시아는 요르문에게 매달려 한참 애교를 부렸다. 결국 요르문은 잔뜩 토라진 표정을 풀고 슬그머니 시아를 돌아보았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두 사람에게 그리 화나 있지도 않았다. 라크시스가 자꾸만 도발을 하여 열을 받게 된 것일 뿐.

    애초에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온 제국민이 아는 상황이니만큼 시아와 라크시스를 반대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누님, 정말로 제게 미안하세요?”

    “응. 진짜 미안해. 요르문, 내가 정말로 미안해.”

    “…그럼 저 한번 안아주세요.”

    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안아달라니, 어떻게?

    “가족끼리 포옹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누님이 절 토닥여 주신다면 진정이 될 것 같은데.”

    “알았어, 그 정도야 뭐.”

    시아는 거침없이 요르문을 꼭 끌어안았다. 진짜 동생에게 하듯 그의 등을 쓸어내리고 찬찬히 토닥여 주었다.

    “좀만 더요.”

    “응, 알았어.”

    시아는 난데없이 어리광을 부리는 가짜 친척 동생에 의아해하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아이 달래듯 등을 쓸어주는 게 뭐가 어렵겠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시아는 보지 못했다. 그녀의 등 뒤에 앉아있던 라크시스에게서 새파란 안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시아에게 안긴 요르문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라크시스에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인 탓이었다.

    “저 이제 괜찮아요. 화 다 풀렸어요, 누님.”

    “…그래?”

    시아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요르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본인이 화가 다 풀렸다는데, 거기서 무어라 말하겠는가. 다만 그녀가 도로 소파에 앉았을 때 흉흉한 기운을 풍기며 미간을 구기고 있는 라크시스의 모습에 괜히 멈칫거렸을 뿐이었다.

    “요르문, 그래서 뭘 발견했는데?”

    “여덟 번째 봉인이요.”

    “뭐?”

    시아는 경악했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안 하려고 했단 말이야?

    “정확히는 여덟 번째 봉인일지도 모르는 보석이지만요. 예전에 스칼렛 로스가 친하게 지내는 귀부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셨잖아요?”

    요르문은 잔뜩 꾸겨진 소책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분명 제국어로 쓰인 글인데, 알 수 없는 내용투성이였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건 순서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숫자 몇 개와 개미굴처럼 얽힌 지도 한 장이었다.

    “이게 다 뭐야……?”

    이런 류의 책자를 본 경험이 있는지 라크시스는 요르문이 내려놓은 책자와 지도를 보자마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요르문은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며 책자 뒤에 숨겨진 티켓 한 장을 시아에게 내밀었다.

    “암시장이에요, 누님. 스칼렛은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만이 초대받아 참석할 수 있는 경매장 티켓을 얻으려고 했던 거라고요.”

    * * *

    “이건 이번 암시장에서 나올 경매품 목록이에요. 툼르칸 제도의 무지개 얼룩 앵무새, 가멜에서 밀렵된 코끼리 상아에 음, 그, 노예도 경매장에 오르네요. 이다음에 보시면…….”

    시아와 요르문, 라크시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사용인들의 시선을 피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하에 세 사람이 요르문의 서재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

    소책자는 마치 평범한 카탈로그처럼 각종 상품들의 사진과 설명을 싣고 있었다. 다만 그 상품들이 모자나 드레스, 보석처럼 평범한 물건들이 아닌 제국에서 거래가 금지된 상품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아, 이거예요.”

    잔뜩 구겨진 소책자를 한참 넘기던 요르문이 커다란 보석 사진을 발견하곤 페이지를 멈췄다.

    “시트리나 성녀가 죽은 후 성녀의 시신에서 발견되었다던 보석이에요. 맨덜랜드의 교회에서 보관하고 있었다가, 마거릿 1세가 국교회를 탄압하던 시절에 유실되었다는 성물이죠.”

    동그란 모양이 마치 진주를 닮았다. 보석이라고는 하나 흑백 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검은 얼룩이 심했다.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르문, 그런데 이 보석이 봉인이라는 증거가 있어?”

    타당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요르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시아를 향해 소책자의 설명을 가리켰다.

    “설명을 보시면 누님도 감이 잡히실 거예요. 이게 봉인이라는 걸요.”

    [성녀 시트리나의 위업은 국교회의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역병이 창궐한 지역에 발 들이기를 마다하지 않고, 병자의 몸에 깃든 악마를 구마하여 주신의 뜻을 몸소 대지 위에 실현시켰던 진정한 성인. 그러나 어째서 성녀 본인은 지독한 역병에도 늘 무사한 건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신성력 혹은 마력으로 불리는 위대한 힘이 성녀를 수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가 없으나 성녀의 사후 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성녀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비로소 알아내게 되었으니…….]

    “그러니까 시트리나 성녀가 봉인을 지닌 채로 맨덜랜드 등지에서 활동했다는 말이지?”

    “그런 셈이죠. 성녀가 어떻게 봉인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파괴되지 않은 봉인의 마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치료했던 모양이에요.”

    신기한 일이다. 파괴되지 않은 봉인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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