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 * *
라크시스는 시아의 옆에 나란히 앉아 그녀의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푸른 보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요? 너무 예쁜데요. 제가 태어나서 본 보석 중에 가장 예뻐요, 라크.”
라크시스는 시아의 손을 지분거렸다. 오늘만 해도 이 손등에 몇 번이고 키스를 했던가. 만약 그의 입술이 닿은 곳마다 자국이 남았다면, 시아의 손등은 아마 입술 자국으로 빼곡했을 것이다.
“당신을 닮은 보석을 고를까 하다가…….”
“하다가?”
“유치하게도 당신에게 날 닮은 물건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리더군요. 제가 당신을 연모하는 만큼 당신도 날 생각해 주길 바랐어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고 있었잖아요. 굿나잇 키스, 기억 안 나요?”
시아는 수줍게 웃으며 라크시스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라크, 음… 이 반지는 언제 준비했던 거예요?”
“…….”
“라크?”
라크시스가 침묵을 지킬수록 시아의 말수도 점점 줄어갔다.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반지를 오래전부터, 그것도 자신에게 주려고 준비해 뒀단 말인가.
시아는 떨떠름하게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번쩍번쩍 광채를 뿜고 있는 사파이어가 갑자기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건… 그전부터 준비해 뒀다는 거네요. 대체 언제부터… 제가 로렌시아 호에 나타날 때인가요?”
“…….”
“그것보다 더 오래전이에요?”
내내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라크시스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무스로 떠났던 시간 여행부터? 아니면 그전부터?”
시아의 질문이 점점 빨라졌다. 그녀의 고개도, 몸도 라크시스를 향해 기울다 못해 거의 안겨있는 것처럼 가까워졌다.
대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이 반지가 만들어진 순간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에선 이런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그땐 진짜 서로 남남이었는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추궁하는 시아에 결국 라크시스는 백기를 들었다. 그는 얕은 한숨을 쉬며, 시아를 살며시 끌어안아 품에 가두었다.
이윽고 아련하게 흘러나온 라크시스의 대답이 시아의 어깨에 고였다, 연기처럼 흩어졌다.
“아마 당신은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시아에게는 없는 기억. 정확하게는 그녀에게만 존재하지 않는 라크시스의 세월 속.
오토마톤의 심장이 폭발한 날, 다친 라크시스를 따라 저택으로 온 시아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후 (물론 라크시스를 뺀 그 누구도 시아의 대답이 거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라크시스는 그녀에게 제대로 구애하리라 결심했다. 지금 시아의 손가락을 장식하고 있는 푸른 보석은 그때 준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동부의 사파이어 광산에서 품질과 무게에 있어 기록을 갱신한 사파이어가 채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라크시스는 그 길로 광산을 소유한 회사에 연락하여, 황실 보석이 될 뻔한 희대의 사파이어를 어마어마한 웃돈을 붙여 사두었다.
당시 라크시스 옌이 문제의 사파이어 주인이 되었다는 기사가 널리 퍼져 한바탕 소문이 또 돌았지만, 그것은 시아에겐 없는 평행 시간 선의 기억이었다.
“그래서 대체 언제부터 준비해 둔 거예요?”
“참는 데 자신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시아는 제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아스라이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한숨을 가늘게 쉬는 라크시스에, 그의 등을 가만히 도닥였다.
“내가 말을 말지. 그래요, 제가 졌어요.”
라크시스는 한참을 시아에게 기대있었다. 그녀가 그의 무게를 벅차 하는 것처럼 보이자, 라크시스는 그제야 떨어져나왔다.
“그래서… 마음에 드나요?”
“당연하죠. 라크가 준 건데요.”
시아는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쫙 펼치며 반지를 바라보았다.
“라크의 눈이랑 닮았어요. 깊은 호수 같기도 하고, 설원의 맑은 하늘 같기도 하고.”
자신과 닮은 보석을 골라 선물했다는 말이 진짜인지, 사파이어는 라크시스와 정말로 닮아있었다.
흔하지 않은 커팅에 라크시스 옌처럼 결점 하나 없는 깨끗한 보석. 그러나 시아를 담은 마음처럼 깊고 푸르러, 한없이 빠져들 것만 같은 빛깔.
시아는 반지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서서히 주먹을 쥐며,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의술사로 평생 일해도 못 벌 정도로 큰 돈이 손가락에 매달려 있으니 조심스러워지기는 하지만요.”
“이런. 이런 걸로 조심스러워진다면 앞으로 어떡하려고 그래요.”
라크시스는 시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시아는 품에 기대 속삭이듯 말했다.
“전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라크만 있으면 되니까.”
“좀 더 욕심을 가져봐요, 레이디 켈튼. 당신은 황제의 찬사를 받은 최고의 레이디인데.”
“그렇다면 라크를 욕심내도 되나요?”
“전 이미 당신 것인데.”
아, 역시 이런 말은 부끄럽다니까.
시아는 라크시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한 번 고삐가 풀린 두 사람은 더는 거칠 것이 없었다. 가벼운 입맞춤은 어느덧 애틋한 열기로 변했다.
진득한 부딪힘 끝에 시아에게서 떨어져 나온 라크시스는 시아의 뺨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나직이 미소 지었다.
“시아, 의견을 구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어떤 건데요?”
“당신이 제 구혼을 받아주셨으니, 앞으로의 일정은 제게 맡겨 주셨으면 하는데.”
“일정이라면.”
“당장은 약혼식부터랄까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당신이 이 시대에 머무는 기간이 너무나도 짧아서…….”
약혼식이라. 잘게 떨리던 시아의 눈동자가 잠시 멈칫하다, 이내 눈매와 함께 부드럽게 휘었다.
시아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이런 식으로 결혼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칠십 년 후의 스물여덟 살 시아 켈튼은 의술사로서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고 있었다. 집안에서 정해 준 상대와 결혼하게 생겼다며 울고불고하던 친구 마리안 로젠버그를 보고, 고지식한 가풍 때문에 젊은 나이에 고생하는 그녀를 안타깝게 여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요르문 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실까.’
만약 그녀가 청혼을 받았다며 미래의 양부에게 약혼자를 보인다면, 양부는 틀림없이 테이블을 뒤엎으며 결혼을 반대할 것이다.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결혼이라니!
양부는 아마 마법사로서의 긴 수명을 내세워, 시아가 죽는 날까지 자신이 애지중지 보살펴 줄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시아의 앞날을 가로막는 남편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이다.
그런 상상에 시아는 잠시 웃었다. 그녀가 갑자기 웃자 불안해진 라크시스가 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시아, 혹시 원하는 약혼식이 따로 있었다면…….”
아, 제 눈치를 살피는 라크시스도 사랑스럽다. 이젠 그의 모든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이토록 마음이 가는 상대라면 함께해도 되지 않을까.
시아는 그와 맞닿은 살갗에서 전해져 온 온기에 가슴 깊이 차오르는 충족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이 되든, 어떤 모습을 하든 이해하고 사랑할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테지.
“마음대로 해요. 상관없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전 라크만 있으면 돼요.”
“시아.”
“사랑해요, 라크.”
시아는 라크시스의 어깨에 팔을 감고 그를 깊이 끌어안았다.
라크시스가 그녀를 마주 안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없어.”
“무엇이 없다는 겁니까?”
시아는 벌떡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왔다. 이 시대의 흔한 주택 양식이 아닌, 갈리프도흐처럼 고대 마도 시대의 석조 기둥으로 천정을 받친 방이 뒤늦게 눈에 들어온 탓이다.
시아는 방을 가로질러 텅 빈 벽 앞에 멀거니 멈춰 섰다.
“시아, 왜 그러십니까?”
“…라크, 원래 여기에 초상화가 걸려 있지 않았어요?”
“그 초상화는 떼어낸 지 오래입니다. 당신이 제게 그림에 대해 물었을 때부터, 초상은 이 자리에 없었어요.”
떼어낸 지 오래라고?
시아는 황급히 벽을 살폈다.
그래, 오래전 오토마톤의 심장이 켈튼 저에서 폭발했던 그때. 심각한 부상을 입고 몸을 피하려던 라크시스의 공간이동 마법에 휘말려 그의 저택으로 떨어져 버렸던 그때. 바로 이 방에서 시아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은발 여인의 초상화를 발견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 초상화에 대해 라크시스에게 물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제가 초상화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었다고요?”
그러나 라크시스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시아의 기억 부재를 언급했다.
“당신은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시간 여행의 부작용일지도 모르겠군요.”
그의 태연한 낯 뒤에서 쓸쓸함이 언뜻 비쳤다. 기시감이 드는 표정에 불현듯 아까 라크시스가 했던 말이 떠오르고 만다.
‘아마 당신은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반지를 언제부터 준비했느냐는 물음에 망각된 시간을 홀로 기억하는 사람처럼 아스라한 한숨을 내쉬던 라크시스.
시간 여행 내내 라크시스와 함께했던 시간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음에도,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시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중세의 시간을 바꿔 버리고 나서 제가 그 후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군요.”
그녀에겐 이자벨라의 딸이자, 에드먼드와 아스타가 정성스레 길러낸 마거릿 황녀가 제국의 마거릿 1세로 즉위했던 기억이 없었다.
그 말인즉, 다무스로의 시간 여행 이후 마도 시대로 돌아올 때까지의 기억이, 그것도 라크시스와 함께했던 아주 중요한 기억이 그녀에게 없단 뜻과도 같았다.
‘설마 라크시스가 그때 내게 이미 고백했던 거야?’
그리고 내가 그를 거절했고? 그것도 나랑 닮은 초상화 때문에?
시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하얗게 질려가는 시아의 손을 붙잡고 뒤에서 끌어안았다.
“중요한 건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시아 켈튼이라는 것이고, 그 사람이 방금 전, 제 구혼을 받아준 당신이라는 사실이죠.”
언제부터 뒤에 있었던 걸까. 그가 다가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갈리프와 라크시스의 관계 때문에 지난날 혼자 끙끙 앓으며 고민해 왔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리고 라크시스는 지금까지 시아가 무슨 고민을 해왔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를 안고 위로했다.
시아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제가 당신을 울린 것 같은데.”
“아녜요. 그냥, 그냥…….”
라크시스는 시아가 진정할 수 있도록 한참 동안 안고 있었다.
그의 나지막한 음성과 편안한 온기가 기꺼웠다. 이 사람은 자신을 이토록이나 바라고 있었는데, 옛날의 자신은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니. 그것도 그가 이미 떠나보낸 인연에 전전긍긍해 하면서.
라크시스는 손수건으로 시아의 뺨을 닦아주었다. 재킷은커녕 셔츠도 제대로 안 입어 놓고선 행커치프는 어디서 뽑아온 건지.
그녀의 신사는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마법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제가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시아.”
그의 한 마디에 눈물은 곧 웃음으로 바뀌었다. 시아는 젖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으며 라크시스에게 화답했다.
“나도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라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