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라크, 혹시 오래전에 했던 소원 내기, 기억해요?”
“…예.”
“라크답지 못하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내 보기로 했었잖아요. 이젠 알겠어요?”
그는 잠시 멍한 얼굴로 시아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귀가 터질 듯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알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의 제가 가장 저답지 않은 것이겠지요. 당신으로 인해 흐트러지고, 여유를 잃어버린 이 모습이요. 당신을 놓칠까 봐 초조해하고, 그러면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당신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자꾸만 이성을 놓아버리는 제가 바로 당신이 말한 ‘라크시스답지 않은’ 사람일 테지요.”
라크시스는 민망해했으나, 그의 고백은 거침없었다.
마치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단어 하나, 발음 하나 어그러지는 것 없이 완벽한 답변을 했다. 시아는 그의 화술이 오늘도 어김없이 실력을 보였다고 생각했으나…….
‘이건…….’
시아의 기억에는 없고, 라크시스의 기억 속에만 남은, 오래전의 라크시스가 시아에게 이미 했던 고백이었다.
“정답이네요.”
시아는 설핏 미소 지으며 라크시스의 콧잔등을 살짝 건드렸다.
“하지만 라크가 졌어요. 왜인 줄 아세요? 내기의 기한은 3520년 봄까지였거든요.”
“…어떤 소원을 바라십니까?”
시아가 제게 소원을 청한 건 처음이었다.
바싹 말라 버린 입술로 질문을 마친 라크시스는 시아를 가만히 쳐다보며 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바짝 졸아든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다니며 숨을 옥죄고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녀는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뱃고동 같은 심장 소리가 온몸을 쿵쿵 울린다. 잔잔한 바람이 흔적을 남긴 침묵 속에서 라크시스는 시아의 입술이 열리길 기다렸다.
일 초가 영겁처럼 느껴지고,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기분에 라크시스의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을 무렵이 돼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키스해 줘요.”
“…시아.”
“라크가 저로 인해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귀엽지만, 라크는 여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시아는 장난스럽게 라크시스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오직 라크시스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라크가 불안해하면 저도 불안해진단 말예요. 서로의 마음이 확실한데 왜 가슴을 졸이고만 있어요.”
“시아.”
라크시스의 목소리가 낮게 들끓었다. 그는 말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오직 시아의 이름만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제게 키스해 주세요, 라크시스 옌.”
장미 향을 실은 바람이 불어왔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허리를 천천히 감싸안았다. 휩쓸리는 잔머리를 넘기고, 제 볼을 어루만지던 시아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그의 손가락이 틀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시아는 라크시스가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에게선 은은한 숲 향이 났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콧날이 제 코끝에 스치는 순간까지도 눈을 감지 않았다. 오기일까, 호기심일까. 그의 숨이 시아의 입술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라크… 흡!”
휘몰아치는 바람이 시아와 라크시스를 집어삼켰다. 두 사람의 발밑에는 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공간이동 마법이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품에 안긴 채 그에게 매달렸다. 이윽고 바람이 가라앉은 테라스에는 살랑이는 흰 커튼과 달빛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 *
“이걸 참으려고 했다고요.”
“하지만 실패했죠. 보시다시피.”
시아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는 라크시스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라크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붉은 장미가 만개한 옌의 저택의 정원에서는 황궁 정원과 똑같은 향이 바람에 실려 풍겨오고 있었다.
방 안 가득하던 습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라크시스는 소파에 던져둔 베스트를 대충 팔에 끼우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찻주전자에 물을 부었다.
“목이 마를 텐데.”
시아는 그의 손가락 끝에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마법은 언제 보아도 신기했다.
이윽고 라크시스의 손이 닿은 주전자가 끓기 시작했다.
“자, 레이디.”
“고마워요, 라크.”
라크시스가 우리는 차는 언제나 담백하고 깔끔했다.
시아는 차가운 우유를 부은 레이디 마거릿으로 목을 축였다. 부드러운 우유가 넘어가자, 잔뜩 부어있던 식도가 진정이 되는 것만 같았다.
“혹시 추운가요?”
“아뇨. 지금 딱 적당해요.”
시아는 뜨거운 초콜릿이 담긴 머그를 쥐듯 찻잔을 감싸 쥐곤 설핏 웃어 보였다. 오소소 부는 바람에 끈적하던 열기도, 아까까지의 들뜸도 한층 가라앉는 듯했다.
“그래도 그러고 있으면 감기에 걸릴 겁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옆에 나란히 앉아 그녀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어 주었다.
시아라면 온몸을 가득 채운 마력 때문에 어지간해선 아플 일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라크시스는 소파에서 담요를 끌어와 그녀의 무릎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틀어 올리자, 요크부인이 매만져 줬던 모양새와 매우 비슷한 머리가 되었다.
시아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만져 보더니 감탄했다.
“라크는 손재주가 좋은 것 같아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전 뭐든지 잘한다고.”
“그래서 아까도 그렇게……?”
라크시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라크시스는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돌리곤, 갑자기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쿠션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아에게서 거의 등을 돌린 채였다.
“장난이에요.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줄이야.”
“…당신에게 들으니 그런 겁니다. 애초에, 전 당신 외엔…….”
“알았어요. 나의 신사님. 이리 와 봐요.”
시아는 키득거리며 등 돌린 라크시스를 돌려세웠다.
그는 시아의 손길에 맥없이 끌어당겨졌다. 그가 방심하는 사이, 시아는 라크시스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부딪혔다.
“제 실력은 이게 전부인데. 앞으로 라크에게 잘 배워야겠는걸요?”
“배우다니, 시아, 그…….”
라크시스의 입가가 불그스름했다. 시아의 화장이 그의 입술에 문질러져 번진 탓이다.
셔츠 단추를 풀어 헤친 채, 엉망이 된 남자의 얼굴에 시아가 또다시 버드 키스를 했다.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라크시스에게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시아의 손에서 빈 찻잔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윽고 시아의 몸이 침대 위로 넘어갔다. 그녀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숨과 숨이 얽혀들었다.
시아와 라크시스가 저택에 도착한 이래, 오랜만에 만난 주인을 보고 신이 났던 정령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정령이 사라진 자리엔 따뜻한 물이 담긴 은 대야와 깨끗한 수건, 목을 축일 물이 가득한 주전자와 물잔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밭은 숨소리가 잦아든 저택은 고요했다. 고요함을 달래려는 듯, 황동 풍향계만이 지붕 위에서 빙그르르 도는 중이었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지친 모습으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시아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깝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머리요. 라크가 기껏 예쁘게 만져줬는데, 다시 엉망이 되어버렸잖아요?”
“다시 해드리면 되는걸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히곤, 그녀의 뒤로 돌아가 긴 생머리를 다시 매만지기 시작했다.
훤히 드러난 뽀얀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에서 라크시스와 똑 닮은 은빛 기운이 맴돌았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마력이 서린 머리카락보다도, 황제가 시아의 목에 걸어 준 에메랄드 목걸이를 신경 쓰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긴 목에 걸린 목걸이는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든 보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시아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오래전에도 시아의 목에 이렇게 귀한 보석이 걸린 적이 있었다. 슈테른베슈테크에서 아스타가 에드먼드를 도발하기 위해, 그에게서 선물 받은 목걸이를 보란 듯이 시아에게 걸어두었던 때.
큰 키에 비해 뼈대가 얇은 시아는 이런 보석들이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칠십 년 후에는 숙녀가 이런 식으로 치장을 하는 일이 흔하진 않은 모양이지만, 라크시스는 황제에게 에메랄드 목걸이를 돌려주고 나면 다시금 허전해질 그녀의 목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녀의 약지도.’
시아의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손가락은 길고 아름다웠다. 사람의 뼈를 맞추고, 살을 꿰매며 온갖 험한 일에도 기꺼이 뛰어들던 그녀의 평소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라크시스는 시아의 머리를 틀어 올리던 손길을 우뚝 멈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크?”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가 일어나자 침대가 한 차례 출렁였다. 시아는 널브러진 리본을 머리카락에 대충 둘러 감으며 라크시스가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안 그래도 묻고 싶었어요. 라크, 대체 뭘 준비했길래 지금껏 그렇게 뜸을 들였어요? 결국 고백도 전에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잖아요?”
그러나 라크시스는 책상 서랍을 연 채,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대답도 없이 손을 놀리고 있었다.
소지품은 모두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놓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대체 뭐길래 저렇게 한참을 책상 앞에 서 있는 걸까?
곧 시아에게로 돌아온 라크시스는 그녀의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릎을 꿇었다.
“시아.”
“라크, 왜 갑자기…….”
“제게 잠시 손을 빌려주시겠습니까.”
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손을 빌려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채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바라고 그에게 마음을 준 건 아니었는데도, 벅차오른 감정에 순간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기다리며,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렇게 또 그의 가슴을 졸이게 할 순 없었다.
시아는 물막이 씌워진 눈을 깜빡이며, 라크시스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숨소리가 순간 멎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시아의 손을 받치고, 그의 온기가 고스란히 묻은 반지를 시아의 네 번째 손가락에 천천히 끼웠다.
“이건…….”
라크시스의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잔잔한 다이아몬드를 두른 큼직한 사파이어가 그녀의 손가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랑합니다, 시아 켈튼.”
시아의 주변에 별이 하나둘 떠 올랐다. 고대 마법사의 마력이 주인의 의지에 반응해 반딧불이처럼 아름다운 빛무리를 하나둘 띄워 낸 것이다.
“당신을 만난 후로 전 비로소 살아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만났던 사람은 아득한 세월을 살아오며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마법사에 불과했어요.”
그날의 고백. 오래전 시아 켈튼에게 내보였으나, 그녀의 기억에선 사라져 버린 그의 마음.
다시 한번 그녀에게 고백한다면, 처음보다 더 나은 고백을 하리라 다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고, 그때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고백이 라크시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멋대로 튀어나온 고백에 당황했지만, 곧 스스로의 미숙함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고백은 사실 라크시스가 시아에게 하고팠던, 그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던 진심이었기에.
“당신 덕분입니다. 시아. 당신 덕분에 전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라크.”
이제 시아는 황금빛 은하수 속에 있었다.
시아는 주변을 떠다니는 자그마한 마력 알갱이들이 신기한 모양이었지만, 라크시스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한 밤하늘을 보는 것처럼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이젠 당신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내게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알려 준 유일한 사람이죠. 시아 켈튼. 당신은 내게 있어 빛이고, 생명이며, 삶의 의미 그 자체입니다.”
시아의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시아는 환하게 웃으며 눈 가득 차올라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뭐라고, 삶의 의미씩이나.’와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라크시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난번과 다르다. 제 눈앞에 있는 건 그의 고백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던 지난날의 시아 켈튼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을, 지금의 그녀도 제게 똑같이 느끼고 있었기에.
라크시스는 시아의 손을 잡아들곤, 새하얀 손등에 입을 맞추듯 뜨겁게 고백했다.
“레이디 시아 켈튼. 제가 당신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