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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52)화 (252/292)
  • 252화 

    이래서 레베카가 B 같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다 말했던 걸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상대와.

    프리드리히가 떠나자마자 시아는 재빨리 라크시스를 눈으로 찾았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은발은 어디에도 없었다.

    “즐기게, 레이디 켈튼. 미혼의 숙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아니겠나?”

    내내 무도회를 구경하던 밀레이나가 시아를 부채로 가볍게 건드리며 짓궂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곧장 상석에 앉아 시녀들과 무도회를 감상하는 황제를 향해 떠나갔다.

    시아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귀부인들, 선망의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는 어린 아가씨들. 푸들을 쓰다듬으며 흥미로운 상황을 보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황제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수많은 신사들까지.

    어쩔 줄 모르고 얼굴을 붉힌 시아를 남겨둔 채 또다시 다음 춤곡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발그레해진 뺨과 수줍게 다물어 버린 입을 보고 사람들은 그녀가 풋풋한 시절을 만끽하고 있다며 저마다 입을 모았다.

    그렇게 너덧 개의 춤곡이 지나갔을 때였다.

    의무적으로 춤을 춰야 하는 상대를 모두 해치운 시아는 황제의 비호하에 잔챙이의 춤 신청을 모두 거절할 수 있었다.

    “수고했네. 처음치곤 모양새가 나쁘진 않았군.”

    “감사합니다, 폐하.”

    마침내 황제의 시야에서 벗어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시아는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지친 몸을 이끌고 티 룸으로 가 주저앉았다.

    “다들 대단하단 말이야. 이렇게나 춤을 추는데 지치지도 않나?”

    시아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다과를 열심히 집어 먹었다. 당과 카페인을 들이부은 시아의 뇌가 다시 가동되면서, 그간 잊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라크는 어디 간 걸까?”

    무도회 초반엔 무대 근처 기둥에 라크시스를 봤던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빛나는 은발이 보이지 않았다.

    입장할 때만 해도 그가 계속 곁에 있을 것만 같았는데…….

    시아는 그도 알아서 춤을 추고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자신 대신 춤 상대로 선택한 숙녀가 누구인지 매우 궁금했으나, 그를 쫓아다니며 누구랑 춤을 췄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건 너무 속이 좁아 보일 테니,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 여긴 마도 시대잖아. 라크는 이곳의 귀족이고.’

    조용한 곳에 앉아있으니 최근 들어 그가 제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 떠오르고 말았다.

    라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누굴 보고 있을까. 자신에겐 기다려달라며 고백을 아꼈으면서, 다른 여자에겐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시아는 갑자기 울적해져서 또다시 케이크를 집어 먹었다. 크림으로 느끼해진 속을 차로 달래자 점점 속이 더부룩해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레이디이이!”

    “레베카.”

    “어쩜 이런 영광이 다 있을까요? 다들 레이디더러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켈튼 영애가 아니라 황녀라고요! 황제 폐하가 이토록 아끼신 숙녀는 레이디가 처음이에요.”

    시아가 티 룸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레베카는 춤이 끝나자마자 달려왔다고 했다.

    레베카는 제 또래의 숙녀들은 지금 온통 레이디 켈튼의 이야기뿐이라고 했다.

    “혹시 폐하의 숨겨진 딸이라든가, 아니면 생명의 은인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겠죠?”

    “하, 하하… 설마요. 폐하께서 어여쁘게 봐주신 것뿐인데요.”

    그렇게 말하며 시아는 속으로 뜨끔했다. 생명의 은인은 맞긴 하지.

    “처음엔 옌 경과 레이디를 이어주시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 규모의 무도회를 열어주신 걸 보면 정말 레이디를 총애하셔서 그러는 게 확실하다니까요.”

    “네에, 뭐, 그런 거랍니다.”

    시아는 호들갑 떠는 레베카를 한참 동안 진정시키곤 은근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레베카, 혹시 라크 못 봤어요?”

    “옌 경이요? 글쎄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 눈에 띄는 머리카락을 본 기억이 없네요. 무도회가 시작될 땐 분명 연회장에 계셨는데. 시가 룸에 계신 게 아닐까요?”

    “라크는 시가를 즐기지 않아서요.”

    “그렇다면 저도 잘 모르겠는걸요. 황제 폐하와 첫 춤을 추신 것까진 봤는데… 그러게요? 그 이후엔 춤도 추시지 않으셨어요. 레이디를 두고 먼저 돌아가시지도 않았을 거구… 진짜로 어디 가셨을까요?”

    황제와의 첫 춤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고? 그렇단 건 그가 다른 숙녀와 춤을 추지도 않고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뜻이다.

    어지간해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지키는 편인 그가 무도회 내내 없었다니. 시아는 문득 불안해졌다.

    그는 이 넓은 황궁에서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라크시스가 지금 혼자 있는 거라면.

    미궁에 갇힌 것처럼 생각이 진척되지 않을 때쯤, 불현듯 슈테른베슈테크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문득 이 시기에 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지더군요. 만약 지금의 제가 과거의 절 만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이 광경이 떠올랐죠.’

    검푸른 파도가 절벽을 치던 슈테른베슈테크의 어느 밤. 그는 유성우를 보여주겠다며 그녀를 성벽으로 데리고 갔었다.

    ‘이 시대의 라크는 별을 좋아했나 봐요.’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길 좋아했습니다. 마력의 흐름은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따라 곧잘 달라지곤 했거든요.’

    쏟아질 듯 그렁그렁 맺힌 별들이 밤을 가득 채웠던 그 날. 유성우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별이 끝없이 떨어지고 쌀쌀한 바람이 성벽을 훑었다.

    라크시스는 조용히 온기를 불러내 시아의 곁에 둘러주곤 이렇게 말했다.

    ‘…이때의 전 꽤 방황했었습니다. 홀로 태어나 아주 오랜 시간을 덧없이 살아오면서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상태였어요.’

    이 대화가 왜 갑자기 생각났는진 시아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연회장 어딘가에 있다면 별을 보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베카. 저 라크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레이디?”

    시아는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티 룸을 빠져나와 연회장의 모든 테라스를 돌아다녔다.

    그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황제나 시아가 자신을 찾을 때 금세라도 갈 수 있도록 그리 멀리 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아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이곳은 손님방만 백 개가 넘는 황궁이었다는 것이다.

    테라스를 열어젖히길 수십 번. 황궁에서 대담하게 밀회를 즐기던 남녀와 눈이 마주쳐 버린 민망한 상황도 여러 번.

    마침내 시아는 연회장이 속한 황궁 서관 삼 층의 마지막 테라스에 도착했다.

    ‘찾았다.’

    문을 열지 않아도 그가 라크시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테라스의 유리를 가린 새하얀 실크 커튼 너머의 실루엣. 이젠 눈을 감고도 똑같이 덧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된 그 실루엣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시아는 가만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관에 가득 핀 장미의 내음이 쌉싸름한 밤공기와 함께 훅 밀려들었다. 고요한 밤. 열기가 가득하던 무도회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

    소음이 차단된 테라스의 밤하늘 아래, 라크시스는 달빛을 받으며 홀로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뒤를 돌았다.

    마력이 충만한 은발 밑으로 시아를 발견한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라크시스는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어 시아를 테라스 난간으로 이끌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날 봐줄까, 하는 그런 생각.”

    쓸쓸해 보이던 뒷모습과 다르게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오히려 평소 그녀가 알고 있던, 능글맞은 신사로 돌아와 시아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눈길을 둘 곳이 없어 애꿎은 정원이나 보고 있는데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아.”

    아…….

    순간 호흡이 멈췄다.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

    “날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냐니…….”

    “이 정도 얼굴이면 봐줄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라크시스가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그 손길만큼은 오만하고 잘난 평소의 모습 같았으나, 커다란 손에 가려진 그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시아는 그걸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어느새 그녀의 한쪽 손등을 가져다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가 말할 때마다 숨결이 느껴진다. 그에, 솜털이 오소소 서버렸다. 그림처럼 움직이는 붉은 입술에 온 신경이 쏠린다.

    그런 시아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라크시스는 이제 짙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남자로 보이지 않던가요?”

    시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의 입술이 손등에 닿아버리자, 시아는 결국 주전자가 끓는 것처럼 작게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라크, 왜 이래요? 아깐 괜찮다면서.”

    “제가 언제 괜찮다고 했던가요?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는데.”

    거짓말. 분명 무도회장에 입장할 때 라크시스는 제 입으로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아는 라크시스가 괜찮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역시 제게 거리를 둔 게 아니었다. 그도 자신 때문에 초조해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질투가 납니다. 시아.”

    시아의 손등에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의 손길에 실크 장갑이 벗겨지고, 어느새 맨손이 되어버린 손등 위로 또다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당신의 시간을 모두 독점하고 싶어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라크.”

    시아의 부름에 라크시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귀가 붉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뒤이은 말을 입에 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처럼.

    “대위가 당신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군요. 그도 좋은 남편감이죠. 공국의 후계자인데다가 군인 출신이라 건강할 테고, 외모도 준수한데다 당신과 관심사도 겹치죠.”

    아…….

    시아는 그제야 라크시스가 며칠간 제게 왜 그렇게 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해하다 못해 헛웃음이 다 났다.

    “라크, 제가 조건을 보고 라크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랬다면 당신은 처음부터 제게 달려들었겠지요. 빈혈을 핑계로 제 앞에서 쓰러지거나, 손수건을 돌려주겠다며 만나자고 하거나.”

    이럴 땐 또 재깍 대답을 잘한단 말이야.

    시아는 라크시스의 얼굴을 양손에 담고 그의 눈매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름을 펴주었다.

    “거 봐요. 본인 잘난 건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신 앞에만 서면 늘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아요.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느껴지는데도, 어쩔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 남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자존심 하나는 세서 시아가 혹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며칠을 홀로 속앓이를 해놓고는 말이다.

    결국 자신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끄러운 고백을 해오는 이 사랑스러운 남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심장 소리가 가슴을 울린다.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

    당장에라도 그와 입 맞추고 싶다. 저 요망하고 귀여운 남자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이 남자가 귀여워 보이는 지경이 됐다니, 나도 중증이구나.’

    시아는 라크시스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곤 테라스에 비스듬히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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