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 * *
“대공 전하, 오랜만이네요.”
시아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화음 가득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으나, 차탈은 그녀의 인사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렇군. 그날 이후에 거의 보질 못했으니까.”
그날이라 함은 황제의 암살 시도가 있던 의회 개회식 날을 뜻했다.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던 건 시아가 그날 이후로 줄곧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보이시네요.”
“덕분에.”
첫 춤곡의 박자에 맞춰 차탈이 시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그녀의 손에선 라크시스 옌과 똑 닮은, 청량하고 편안한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발작에 시달리고 있는 차탈로선 시아의 마력이 기꺼웠다.
그녀의 정체에 관해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했다.
“춤을 춘 것도 오랜만이야. 그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었거든.”
왼손은 각자의 허리춤에, 오른손은 상대를 향해 직각으로 들고선 신사와 숙녀가 서로의 손등을 맞댄다. 서로의 시선을 가르는 것처럼 날을 세운 손을 사이에 두고 남녀는 천천히 스텝을 움직여 돌기 시작했다.
시아와 차탈의 시선이 엇갈린다. 그러나 그 시선은 지극히도 사무적이라, 누구도 그들의 관계를 오해할 수 없었다.
“별일은 없으셨죠?”
“별일이 있었다면 올가를 통해 전했겠지.”
“발자크 로스는 여전히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있고요?”
시아의 물음에 차탈은 잠시 고민했다. 스칼렛 로스가 사교계에 데뷔한 이래 그들 남매가 따로, 혹은 함께 황제를 알현하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리나가 나처럼 저주에 걸린 것 같아보이진 않았어.’
차탈은 황제가 오히려 스칼렛을 멀리하려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하긴, 제국의 어느 숙녀보다도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알리나에게 스칼렛 같은 유형의 숙녀는 그다지 호감형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저주의 앞에서 취향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뇌하고 조종하면 그만일 텐데, 스칼렛은 황제의 환심을 직접 사보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한 일이지. 그들이 내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알리나도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황제의 곁엔 마법사들이 많으니 저주를 썼다간 들킬 거라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고.”
“그래도 폐하께서 무사하시다니 다행이네요.”
“그렇다고 제국의 상황이 좋은 건 아니야. 얼핏 보기엔 아무 일 없어 보여도 거리에선 여전히 매일같이 창문이 깨져 나가고 있지. 보고받는 시위나 폭동도 점점 늘어가고 있고.”
차탈은 시아를 빙그르르 돌렸다. 최근에 무도회에 몇 번 다녀와서인지 시아는 제법 능숙하게 스텝을 밟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알리나와 의회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곤 하지만, 보수당과 총리가 공격적인 태도로 나오고 있어서 분위기도 좋지 않지.”
“리암 블레어 말인가요?”
“그래. 아무래도 총리는 식민전쟁을 원하는 모양이야. 하지만 이렇게 서대륙을 도발하는 건 위험해. 자칫 잘못했다간 가멜은 물론이고 제국까지 전쟁터가 될지도 모르니까.”
차탈은 맨덜랜드 사태 이후, 제국의 안보를 이유로 갖가지 법안들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고 했다.
제국에 들어오는 서대륙인들과 가멜인들에 대해 보안 검색을 강화한다든가, 그들이 제국에서 수상한 행동을 보일 경우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이유를 불문하고 구속 또는 처벌할 수 있다든가 하는 내용이었다.
최근엔 이들 국가에 대한 관세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고 했다.
시아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한 가운데 때마침 첫 번째 춤곡이 끝났다.
“자세한 건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하지. 보는 눈이 많으니 말이야.”
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에게 인사를 마친 남녀가 대형에서 하나둘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와인잔을 들어 보였다.
그녀와 안면을 트고 싶어 하는 귀부인과 어린 영애 몇을 만나 가벼운 대화를 하고 나자 금세 두 번째 춤곡의 순서가 다가왔다.
* * *
“또 만났군요, 레이디 켈튼. 우린 이번에도 두 번째로군요.”
산 넘어 산이라더니.
시아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드레스 자락을 쥐고 나긋하게 몸을 숙였다.
“다시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할켄타인 소공작.”
그러자 프리드리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알고 계셨군요?”
“모른 척하기엔 공께서 너무 유명하셔서 말이에요.”
시아는 귀부인들이 하듯 눈을 내리깔고 조그맣게 웃음소리를 냈다.
올가에게 미리 들어두지 않았더라면 프리드리히가 정말로 타국의 장교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시아는 차탈 다음으로 그녀와 춤을 추게 된 프리드리히의 지위를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일국의 후계자이니, 왕자나 다름없지 않은가.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차탈과 올가에게서 현재 서대륙과 제국 사이의 관계를 들은 바가 있었으니 프리드리히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그가 소공작이 아니었어도 함부로 대하진 않았을 테지만.’
“전처럼 프리드리히라고 불러주십시오. 레이디께 할켄타인 공이라 불리는 건 왜인지 어색해서…….”
“하지만 제가 공을 감히 어떻게 함부로 부를 수 있겠나요.”
“그렇다면 차라리 대위라고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러다 실수로 프리드리히라고 불러주시면 더 좋겠지만요.”
시아는 프리드리히의 리드를 받으며 뭉근한 왈츠 스텝을 밟았다.
군인의 투박하고도 단단한 손이 시아의 허리를 받친다. 시아와 프리드리히는 광을 낸 마루를 가로지르며 천천히 원을 그렸다.
“레이디는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칭찬 감사드려요. 대위님께서도 오늘따라 더 멋지신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까?”
프리드리히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시아의 허리를 감은 채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화제의 숙녀와 공국의 후계자가 선보인 낭만적인 춤에 곳곳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프리드리히는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레이디께선 의술사라고 하셨죠. 제국에선 여인들이 쉬이 선택하지 않는 직업이라 들었습니다.”
“제가 원해서 시작한 일인 걸요. 프리드실 공국은 의학이 발달한 나라라고 들었어요. 인재가 많은 거겠죠.”
“서대륙은 제국 본토만큼 마법사가 많지 않으니까요. 사람의 힘으로 사람을 치료해야 하니 그렇게 됐나 봅니다.”
“치유술이 효과가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누구나 마법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사람을 살리는 건 값비싸고 확실한 마법이 아니라, 당장 끓어오르는 열을 내려줄 수 있는 해열제 한 알일 거예요, 대위님.”
프리드리히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파리스 교수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레이디께서 의학에 관심이 많으시다고요.”
“맨틀러 교수님이요……?”
난데없이 등장한 이름에 시아는 당황했다. 파리스 맨틀러 교수라니.
물론 시아는 파리스를 모르지 않았다. 의술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면서 해부학의 어머니이자 히포레스 훈장의 주인공인 파리스의 업적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외웠으니까.
그러나 시아와 파리스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였다.
파리스 교수와 얽혀 있을 만한 구석을 굳이 찾아보자면, 역병 의사 가면을 쓰고 다니던 무렵의 장의사 메이슨 비렌체가 갈리프도흐 의과 대학을 드나들면서 파리스에게 시아의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를 거라는, 그 정도랄까.
“파리스 맨틀러 여사, 아니, 맨틀러 교수님을 아세요?”
“평소에 의학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군인으로 살다 보니 사람의 생사를 눈앞에서 볼일이 많았어서 관심이 생겼나 봅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프리드리히는 정말로 의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해부학에도 관심이 많아, 프리드실 공국의 해부학 학회에 참석했다가 맨틀러 교수와 안면을 텄다고 했다.
하지만 시아는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프리드리히와 맨틀러 교수가 서로 아는 사이란 건 알겠는데, 맨틀러 교수가 자신을 알고 있을 만한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아가 그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레이디, 공국에 오시면 원하는 공부를 자유로이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동굴 같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시아는 프리드리히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시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금도 하고 싶은 공부는 여기서 충분히 하고 있는걸요.”
“하지만 프리드실 공국은 시신을 해부해도 손가락질받지 않는 곳이니까요.”
공국은 제국 국교회의 영향권 밖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프리드리히는 설핏 미소 지으며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맞춰 시아의 몸을 뒤로 기울였다.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 도로 올라오며 시아는 프리드리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챘다.
다시금 프리드리히를 마주 보게 된 시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위님. 제가 그렇게 마음에 드세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네. 그렇습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운명을 느꼈어요.”
“운명이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하시는 게 아니에요.”
“그런 점이 레이디의 매력인 겁니다. 제가 당신에게 반하게 된 이유 말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시아에게서 이런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용기 내어 말을 이었다.
“다들 저더러 목적이 있어 제국을 방문한 게 아니냐고 하는데, 목적이 있긴 했었죠. 아내 될 사람을 찾고자 하는 것 말입니다.”
“프리드실 공국도 아름다운 숙녀분이 많지 않나요? 공국과 가까운 서대륙의 여러 왕국에도 많을 테고요.”
“단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고자 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프리드리히는 이제 시아에게 완전히 빠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이런 고백을 하는 걸까?
“대위님과 전 이제 겨우 두 번 만나본 게 전부인 걸요.”
“사람을 만나보다 보니 알게 되더군요. 사람은 생각보다 첫인상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리고 제 눈은 꽤 정확한 편이고요.”
어느덧 두 번째 춤곡도 끝나가고 있었다. 화려한 화음이 하나둘 줄어가고, 절정을 이뤘던 분위기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고대 마법사가 레이디를 아낀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소식이 없는 건 레이디께서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이겠지요.”
“대위님.”
“그러니 제게도 기회가 있다고 믿어보려 합니다. 그럼, 마저 좋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마침내 마지막 음이 춤의 종지부를 찍었다.
프리드리히는 그 사실이 못내 아쉽다는 듯 시아에게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가슴께에 손을 올려 인사하고는 미련이 남는 것처럼 미적미적 떠나갔다.
시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헬릭스 이후 제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헬릭스야 한때 짝사랑하던 사람이었다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그런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