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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48)화 (248/292)
  • 248화 

    “다 왔군.”

    밀레이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차가 세레타 지구 외곽의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등불과 장식으로 화려한 저택은 멀리서 보아도 무도회가 열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기 좋게 심어둔 정원수 너머로 노란 라버눔이 꽃가지를 늘어뜨려 아치형 길을 만들어 낸 저택은 시아도 익히 아는 저택이었다.

    “레이디 켈튼, 로젠버그의 무도회는 처음이지?”

    “네. 사실 무도회 자체가 처음이지만요.”

    로젠버그의 무도회에 간다는 사실은 레베카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로젠버그저에 도착하니 기분이 묘했다.

    이곳은 시아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인 마리 로젠버그가 살았던, 아니, 살게 될 저택이었기에.

    ‘지금의 로젠버그 저택엔 마리의 조상이 살고 있는 거겠지.’

    “술란에서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지? 이래서 숙녀들에겐 나이 지긋한 부인들이 필요한 게야.”

    밀레이나는 혀를 가볍게 차며, 시종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쌀쌀한 밤공기 사이로 스며든 꽃향기와 잔잔한 음악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한껏 들이켠 밀레이나는 녹슨 곳 없이 잘 관리된 동상들을 바라보며 시아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옌의 성과 저택들도 관리하게 될 테니 이번 기회에 잘 봐두게. 로젠버그는 고지식한 면이 있지만 그만큼 배울 점도 많긴 하니 말일세.”

    “제가 성을 관리하다뇨, 저는… 잠깐만요. 레이디 로드리치, 지금 성이라고 하셨나요?”

    “몰랐나? 그 유서 깊은 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옌 경이 말을 안 해줬, 큼…….”

    밀레이나는 시아의 등 뒤로 새파란 안광을 쏘아내고 있는 라크시스를 발견했다. 그는 밀레이나에게 시아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는 경고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어차피 그의 재산 규모는 밀레이나가 말하지 않아도 레이디 켈튼이 라크시스 옌과 결혼하게 된다면 전부 알게 될 터였다.

    혹시 지금껏 성을 방치해 둔 것을 들킬까 봐 그러나? 결혼 후에 레이디 켈튼이 성을 처음부터 손봐야 한다는 사실에 놀랄까 봐?

    “…아닐세. 나는 모르는 일이야.”

    시아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린 밀레이나가 자신을 가엾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를 흘끔거렸다는 것도.

    원흉은 아마도 시아의 등 뒤에 있는 남자일 터다.

    “라크, 혹시 레이디 로드리치의 머릿속에도 들어갔나요?”

    “설마요. 들어가라고 떠밀어도 들어가고 싶지 않은걸요.”

    밀레이나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문간에서 방문객 목록을 확인하던 시종이 헐레벌떡 안주인을 찾았다.

    레이디 켈튼과 라크시스 옌의 등장에 시작된 술렁거림이 순식간에 저택 전체에 번졌다. 이윽고 안주인인 레이디 로젠버그가 직접 손님을 맞이하러 문간에 나타났다.

    “네 분이 로젠버그에 찾아와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이렇게 영광일 수가.”

    “초대에 응하지 못했는데도 불쑥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 주게. 하지만 이 정도 손님이면 초대장 없이 데려온 것도 이해해 주겠지? 레이디 로젠버그.”

    “그럼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꽃장식이라도 더 해둘 걸 그랬네요.”

    레이디 로젠버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아와 라크시스의 화제성은 파티의 격을 높여주는 요소인데다, 이미 연인으로 소문난 사이라 결혼 시장에서의 경쟁상대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악사들이 춤곡 연주 준비를 막 마쳤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늦기 전에 말이죠.”

    레이디 로젠버그는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고 앞장서며 살랑살랑 걸었다.

    시아가 평소처럼 라크시스의 팔에 그녀의 손을 얹으려는 때였다.

    “옌 경.”

    밀레이나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라크시스를 가로막았다. 당황한 라크시스가 시선으로 재깍 반문했으나…….

    “레베카의 밤 나들이를 방해한 벌일세. 자네는 첫 번째 춤곡이 끝나면 들어오게.”

    밀레이나는 라크시스의 반문을 들어주지 않겠다는 듯 시아와 레베카를 떠밀며 저택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 버렸다.

    라크시스는 그렇게 문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고 말았다.

    * * *

    “대모님, 정말 저대로 두고 와도 괜찮은 걸까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아는 신사에겐 깨달음이 필요하지. 라크시스 옌은 아마 지금까지 초조함이 뭔지도 몰랐을 거다.”

    밀레이나는 거침없이 복도를 걸으며 웃었다.

    밀레이나를 선두로 시아와 레베카가 사람들을 가르며 지나가자 작은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시아는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앞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밀레이나는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며 긴장한 시아를 위로했다.

    “괜찮네, 레이디 켈튼. 로젠버그의 저택은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오면 순식간에 춤곡 하나가 끝나 있을 거야.”

    “…하지만 걱정되는걸요.”

    누굴 걱정한다는 걸까. 졸지에 에스코트 없이 입장하게 된 시아 자신? 아니면 홀로 밖에 남겨진 라크시스?

    밀레이나는 중의적인 물음을 캐묻는 대신 시아의 등을 가볍게 도닥였다.

    “걱정은 오히려 그가 해야겠지. 자네 같은 숙녀가 무도회에 나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다면 말이야.”

    밀레이나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시아 자신은 고작해야 알현식 한 번 한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렇다고 마도 시대의 숙녀들처럼 어릴 때부터 사교활동을 위한 교육을 받아온 것도 아니었다.

    ‘초조한 건 오히려 내 쪽일 텐데.’

    라크시스 옌은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완벽한 사람이었다. 재수 없는 성격이 약간의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그런 건 자존심이 높다는 말로 포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초조해야 한다면 그런 그를 좋아하게 된 자신이야말로 초조해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시아의 생각은 무도회장에 들어서며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시아와 레베카가 주최자인 레이디 로젠버그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신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춤을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제가 라크와 남부에 갔다는 소문을 못 들은 걸까요?”

    “그 소문 때문에 더 궁금한 거겠죠. 레이디, 원래 남의 케이크가 더 커 보이는 법이라구요.”

    “다들 궁금한 거겠지. 고대 마법사가 이렇게나 목을 매게 만드는 숙녀가 대체 누군지 말이야.”

    “그렇지만 여기 있는 남자 중에 레이디께 구혼할 만큼 용기 있는 신사는 없을 거예요. 켈튼 저의 두 신사분이 구혼을 허락하겠어요? 저택에서 쫓아내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밀레이나의 조언(조언이라 쓰고 선별이라 읽어야 하겠지만 말이다)에 따라 신사 서넛의 이름을 댄스 카드에 올렸을 때였다. 밀레이나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시아를 툭 쳤다.

    “오, 레이디 켈튼. 저길 좀 보게. 누가 다가오는지 말이야.”

    훤칠한 키의 남자였다. 곱슬기 있는 더티 블론드를 말끔히 빗어넘긴 남자는 가슴팍에 휘장을 가득 매단 장교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짧게 다듬은 수염이 남성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떡 벌어진 어깨만큼이나 거대한 그림자가 시아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인사드립니다. 프리드실 공국의 프리드리히 할켄타인이라 합니다. 레이디 로드리치, 오랜만에 뵙는군요.”

    프리드리히는 밀레이나와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반가운 인사에 밀레이나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도는 걸 보니.

    “오, 할켄타인. 오랜만일세. 그대가 제국에 왔단 소식은 들은 적이 없는데? 황제 폐하께선 알고 계신가?”

    “알리나 폐하께선 알고 계십니다. 지금은 황궁 동관에 머물고 있으니까요.”

    시아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 시늉을 하면서 레베카에게 복화술로 물었다.

    “레베카, 누구예요?”

    “어머, 레이디. 모르세요? 저분은…….”

    그러나 레베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프리드리히가 밀레이나에게 선수를 쳤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앞에 앉아계신 아름다운 숙녀분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이런, 내가 눈치가 없었군. 시아, 이쪽은 프리드리히 할켄타인이네. 프리드실 공국의, 흠… 대위이지. 미스터 할켄타인? 이쪽은 레이디 시아 켈튼일세. 내가 각별하게 아끼고 있는 아가씨이지.”

    중간에 레이디 로드리치가 잠시 말을 더듬은 것 같은데…….

    그러나 시아의 의문은 피어오르기도 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시아 켈튼이라는 이름을 들은 프리드리히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반달처럼 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한껏 들떠 있었다.

    대체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소개를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프리드리히에 시아가 불안함을 느낄 때였다.

    “레이디 켈튼, 당신과 두 번째 춤곡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뭐해요! 어서요!”

    레베카의 성화에 시아는 얼떨결에 프리드리히의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가 시아의 댄스 카드에서 두 번째 춤곡 칸 옆에 이름을 적고 난 후였다.

    “그런데 두 레이디께서는 수행원이 없는 듯하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레이디 켈튼을 수행해도 괜찮을지.”

    이런. 프리드리히가 첫 번째 춤곡 칸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당황한 시아가 또다시 입꼬리를 잡아당겨 웃는 시늉을 하며 밀레이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레이디 로드리치.”

    “그건 자네 마음대로 하게. 어차피 지금은 옆에 아무도 없잖나? 옌 경과는 정반대의 매력을 지닌 신사를 만날 기회도 흔치 않고 말이야.”

    밀레이나는 이 상황이 그저 재미있는지 부채를 펼쳐 들어 살랑살랑 흔들 뿐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밀레이나가 자신을 제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아에게 허락을 얻기 위해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프리드리히가 시아를 바라보고, 시아의 머릿속이 온갖 생각들로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레이디 로드리치. 레이디 켈튼, 미스 뮐러.”

    “마침 주최자가 이쪽으로 오는군. 그것도 새로운 눈요깃거리를 데리고 말이야.”

    후, 살았다.

    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디 로젠버그가 데려오고 있는 남자가 어떨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프리드리히만큼 부담스럽진 않을 터다.

    시아 일행 앞에 도착한 레이디 로젠버그는 곧 과장스럽게 웃으며 그녀가 데려온 신사를 내보였다.

    그러나 레이디 로젠버그의 소개를 듣는 순간 시아는 놀라 굳어버리고 말았다.

    “수행원 없이 방문해 주신 숙녀분들께 에스코트할 신사분을 찾아드리는 것도 안주인의 일이지요. 레이디 켈튼? 이쪽의 신사분은 미스터 알버트 조지 랑케랍니다.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레이디 켈튼을 에스코트해 줄 거예요.”

    제국에 하나뿐인 은발을 보란 듯이 드러내 보이며 다가온 수상한 신사 알버트 조지 랑케. 이 얼마나 익숙한 모습인가.

    ‘라크?’

    알버트 조지 랑케는 보험사정관으로 위장할 때 썼던 괴상한 가명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저 은발 신사가 라크시스 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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