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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47)화 (247/292)
  • 247화 

    * * *

    “그런 연유로 오늘 밤에 무도회에 가게 될 것 같네요.”

    응접실에서 시아를 기다리던 라크시스와 요르문은 하얗게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주렁주렁 달고 온 그녀의 어깻죽지에 한 번, 그녀의 무도회 참석 선언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누님, 이렇게 갑자기요?”

    “아직 주문해 둔 드레스가 준비되지 않았는걸요, 시아.”

    “드레스라면 많잖아요. 작년 봄에 맞추고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것들 말이에요.”

    시아는 얼룩덜룩해진 재킷을 벗어 소파에 대충 걸쳐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잠깐 외출했다 돌아온 사이에 수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다.

    “시아, 정말로 가려고요?”

    “스칼렛 로스가 사교 행사라면 사족을 못 쓴다던데요. 귀부인들만 초대해 불법적인 유흥을 즐기는 파티를 열기도 한대요.”

    “그런 파티를 연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래서 스칼렛 로스를 만나러 가는 건가요?”

    라크시스는 느슨하게 다리를 꼬고 소파에 기대고 있었으나, 그의 손가락만큼은 초조하게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기보단 슬퍼하는 레베카를 달래주려는 거예요. 그런데 예전에 배웠던 춤을 다 까먹어서 어떡하죠? 가서 그냥 기둥 뒤에 서 있기만 해도 될까요? 무엇보다 전 초대장을 받은 적도 없는데 레베카를 이렇게 따라가도 될까요?”

    “제가 같이 가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모든 건 제게 맡기시면 되니까요.”

    “아, 그게…….”

    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갑자기 라크시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시아에, 라크시스는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시아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무도회를 가겠다고 선언한 직후부터 줄곧 느껴왔던 불안함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음… 라크 없이 오라던걸요.”

    찰나, 정적이 흘렀다.

    라크시스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요르문은 찰나 라크시스의 얼굴이 조각처럼 굳어버린 것을 그만 목격해 버리고 말았다.

    “시아. 숙녀분에겐 언제나 신사의 에스코트가 필요해요. 칠십 년 후엔 어떤지 모르겠지만.”

    “레베카가 그러는데 샤프롱으로 레이디 로드리치가 따라갈 거래요.”

    “미스 뮐러에겐 약혼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약혼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지금 이러는 거예요. 레베카가 저랑 라크처럼 사랑을 해보고 싶대요.”

    내내 시아의 말에 반박하던 라크시스가 처음으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멈췄다. 레베카에게 자신과 시아가 아주 지극한 관계로 보였다는 의미다.

    오직 둘만이 전부인 관계처럼 말이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만족감에 라크시스는 짙게 미소 지었다.

    “그런 거라면 제가 더더욱 당신을 에스코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사가 숙녀에게 경의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니까요.”

    그러나 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라크시스의 팔에 감긴 그녀의 손을 빼냈다.

    “라크,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전 진짜, 진짜로 어떤 소문이 돌아도 괜찮거든요? 그런데 사실 레베카가 조금 삐졌어요. 음, 그것도 라크한테요.”

    라크시스는 충격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미안하지만 무도회는 저 혼자 갈게요.’

    시아가 생략한 뒷말은 누가 봐도 그것이었다.

    요르문은 콧대 높던 친구가 누님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고 바보처럼 멀뚱히 서 있는 것이 웃겨서 미친 듯이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누님이 괜찮다잖아! 샤프롱도 같이 가겠다, 뭐가 문제야? 설마 라크 자네도 의처증이 있다든가 한 건 아니겠지?”

    “라크, 괜찮아요? 표정이 안 좋은데요.”

    눈앞에서 손을 휘휘 흔드는 시아 덕에 라크시스의 이성이 빠르게 돌아왔다.

    그는 레베카가 무엇 때문에 제게 빈정이 상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당장에라도 시아 켈튼과 결혼할 것처럼 굴던 사람이 그녀에게 청혼도 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뭐가요?”

    “당신도 제가 당신에게 추문을 더하는 것 같다고 느끼나요?”

    시아는 넋이 나간 것처럼 서 있다가 돌연 진지하게 제게 질문해 오는 라크시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자신이 빠르게 청혼을 하지 않아 당신은 실망했느냐, 혹 자신 때문에 곤란해졌느냐는 의미였다.

    시아는 고개를 도리질 치며 대답했다.

    “아뇨, 전혀요. 제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어서 그렇지 원랜 칠십 년 후의 사람이라고요. 염문설이니 뭐니 하는 말들도 레베카한테 처음 들어봤는걸요.”

    그러나 라크시스의 미간은 세상 근심 걱정을 다 담고 깊게 주름져 있었다. 시아는 그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펴면서 실실 웃었다.

    “저더러 괜한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한 건 라크면서. 제가 그런 소문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라크의 피후견인이 되지도 않았을걸요?”

    “…지당하신 말씀이군요.”

    “라크도 이런 고민을 할 때가 다 있네요. 내가 라크를 기다려주겠다고 했잖아요. 전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고백할 테면 해봐요. 물론 제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해버릴 수도 있지만.”

    “시아.”

    “그러니까 괜한 걱정은 하지 말아요. 이런 일로 고민하기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리고 사실 우리… 만난 지도 얼마 안 된 사이인 거 알아요?”

    시아는 키득거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라크시스와 시아는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된 사이는 아니었다. 그간 수많은 일들을 함께 겪은 탓에 감정이 빠르게 깊어졌던 것뿐, 시아가 시간 여행을 한 일수를 셈해 보면 두 사람은 만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사이였다.

    라크시스는 한숨을 쉬며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어쨌든 저도 따라가야겠습니다. 당신이 좋지 않은 소문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전 상관없지만, 레베카에게 핀잔들어도 전 몰라요.”

    시아는 벌써부터 레베카의 따가운 질책이 들리는 것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라크시스는 크라바트를 가다듬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런 건 괜찮습니다. 당신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야.”

    * * *

    “정말이지 눈치 없이 끼어드는군.”

    “제가 원래 눈치가 좀 없습니다, 레이디 로드리치.”

    밀레이나는 콧방귀를 뀌며 부채를 펼쳐 들었다.

    예정에 없던 불청객 때문에 로드리치가의 마차는 졸지에 만석이 되었다. 대녀와 오붓하게 마차를 타려던 계획이 틀어진 밀레이나는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이럴 때 보면 신사가 아니라 뒷골목 건달 같단 말이지. 안 그러니, 레베카?”

    “레이디 켈튼, 제가 혼자 오시라 말씀드렸잖아요.”

    레베카는 라크시스를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체통 없는 짓이라며 곧바로 밀레이나에게 혼나긴 했지만, 레베카는 그러거나, 말거나 속이 시원한 표정이었다.

    “옌 경. 폐하께서 왜 레이디 켈튼에게 무도회를 열어주려 하시는지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아니, 자네는 모를 거야. 안다면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을 테니까.”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벙긋거려 라크시스에게 물었다.

    ‘개회식 날의 행차에서 폐하를 구해 드렸기 때문에 무도회를 열어주시는 것 아니었나요?’

    라크시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까딱일 뿐이었다.

    밀레이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시아 켈튼과 라크시스 옌을 이어주려 이 나라의 황제까지 직접 나서는데, 막상 두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처럼 구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누구의 생각이 진실인지는 황제만이 알 터다. 황제는 아마 이 모든 논란을 예상하면서도 시아를 위한 무도회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한편 레베카는 지난번에 우느라 미처 전하지 못했던 근황을 신이 나서 시아에게 말하고 있었다.

    “레이디 로드리치에게 회사 경영을 배우고 있단 말씀이세요?”

    “이젠 엄연히 제 회사니까요. 회사의 주인이 되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 좀 그렇잖아요? …사실 아직은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긴 해요.”

    아까까진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렸으면서 뒤늦게 배시시 웃는 모습의 레베카는 영락없는 열아홉의 아가씨였다.

    “뭐든지 처음은 있는 법이잖아요? 레베카는 영민하니까 금방 배울 거예요. 무엇보다 레베카의 스승님은 레이디 로드리치잖아요?”

    “맞아요. 대모님은 최고의 경영자시죠. 솔직히 어지간한 신사분들은 대모님 발끝에도 못 미치실걸요. 아, 맞다. 제가 뮐러 저택에서 살고 있다고 말씀드렸나요?”

    “정말요? 축하해요. 그 저택은 레베카에게 고향 같은 곳이잖아요.”

    시아는 진심으로 레베카의 뮐러 저택 입성 소식을 반겼다.

    지금껏 그녀가 프레디 뮐러의 딸로 태어나 겪은 고생이 얼마나 많았던가. 카얄에게 노려져 비행선에서 살해당할 뻔하기도 했고,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었지.

    그런 그녀가 뮐러 저택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니, 시아에게도 이는 감회가 남다른 일이었다.

    “고향은 사실 로드리치 저의 메이드 숙소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내 비어있던 집이었는데, 얼마 전 보수 공사를 끝내서 마침내 들어가게 됐어요.”

    레베카는 머뭇거리다 슬쩍 운을 뗐다.

    “신기한 물건들이 많던데 나중에 한번 놀러 오세요. 아버지가 오래전 연구에 사용하시던 기계들이 꽤 남아있더라고요. 손님을 초대할 만큼 예쁘게 단장해 두진 못해서 레이디가 보시기엔 삭막할 수도 있겠지만…….”

    “레베카, 제 사촌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잊은 건 아니죠? 태엽과 계기판 바늘이라면 익숙하답니다.”

    시아에게서 생각보다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레베카는 반색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도 있긴 해요. 서재에서 신기한 기계를 발견했는데 도통 용도를 모르겠어서요.”

    아하, 본론이 이거였구나?

    시아는 본심을 빙 둘러 표현하려고 애쓴 레베카가 못내 귀여웠다.

    “그렇다면 조만간 요르문과 라크와 함께 뮐러 저택으로 놀러 갈게요. 두 사람이면 아마 레베카가 궁금해하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해요, 레이디.”

    레베카는 그제야 고민이 해결된 듯 해맑게 웃었다.

    시아는 레베카가 말한 기계가 무엇일지 슬슬 궁금해졌다. 어지간히 복잡하게 생기지 않고서야 레베카가 이렇게 알아봐달라고 할 리가 없을 텐데.

    ‘기계를 살피다 프레디 뮐러의 연구자료라도 발견하면 좋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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