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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46)화 (246/292)
  • 246화 

    “반지가 없는 걸 보니 아직인가 보네요.”

    “약혼은 안 했어요. 하지만 약혼을 했다고 해도 남장할 때 약혼반지를 끼진 않을걸요.”

    “옌 경도 참 너무하세요. 레이디 켈튼과 염문설을 뿌리고 다녀 놓고 청혼하지 않으시다니. 이러면 힘들어지는 건 여자 쪽이라고요. 레이디에게 추문이 얼마나 위험한데요.”

    “염, 염문설이라뇨.”

    기껏 숨을 진정시켜 놨는데. 레베카의 기습 공격에 시아는 또다시 침을 잘못 삼켜 기침을 해댔다.

    무슨 설이라고? 내가, 염문설?

    “안 되겠어요. 연애 상담을 받아야 할 쪽은 제가 아니라 레이디셨네요. 제가 당장 옌 경에게 가서…….”

    레베카는 마치 자신이 추문에 휩싸인 것처럼 분노하며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발을 쾅쾅 굴렀다. 그녀는 시아의 손을 잡고 당장에라도 켈튼저에 쳐들어 갈 것처럼 성큼성큼 걸었다.

    얼떨결에 끌려가던 시아는 레베카를 애타게 부르다, 제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서 반짝이는 커다란 보석을 발견했다.

    “자, 잠깐만요! 레베카, 혹시 약혼했어요?”

    그러자 레베카가 우뚝 멈춰서서 휙 돌아섰다.

    “진짜 너무하세요!”

    레베카는 제 얼굴을 감싸 쥐곤 그대로 길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가 펑펑 우는 시늉을 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시아와 레베카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서럽게 중얼거리는 말을 가만히 해석하고 있자니, 아마도 시아에게 지난 반년간 줄기차게 보냈던 편지에 레베카의 약혼 이야기가 쓰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밀린 편지를 읽는다고 읽긴 했는데, 워낙 많아 아직 다 못 읽은 시아는 입이 열 개라도 레베카에게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레베카.”

    “레이디는 제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해도 절대로 절 비난하실 수 없으실 거예요.”

    시아는 쪼그려 앉은 레베카의 등을 살살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베카는 시아를 홱 쏘아보았다. 우는 시늉을 하다 진짜 눈물이라도 났는지 그녀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진짜로 제 결혼식에 안 오시기만 해봐요. 그건 더 용서 못 해요.”

    시아는 레베카의 화가 풀릴 때까지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눈이 퉁퉁 부은 숙녀가 시아를 용서한 건 더 이상 거리의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잠시 바깥바람만 쐬었다가 돌아가려고 했던 시아는 결국 레베카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레이디 마거릿 두 잔 주세요.”

    오랜만에 방문한 카페 블랑은 작년과 다를 것 없이 레베카 또래의 여인들로 북적였다.

    시아는 레베카가 잘 먹었던 디저트들을 시켰다. 곧 과일과 크림이 잔뜩 올라간 디저트들이 하나둘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약혼자가 누구예요? 혹시 저도 아는 사람인가요?”

    “체스터 클리포드 백작이에요. 콘힐 공작의 장남이죠.”

    트라이플을 한 입 퍼먹고 한결 기분이 나아진 레베카는 아까보다 순순히 대답해 주었으나…….

    ‘모르는 사람인데.’

    마도 시대의 귀족에 대해 잘 모르는 시아로서는 그저 웃으며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리암 블레어 따위는 생각도 안 날 만큼 멋진 사람이에요. 얼마나 자상하고 따스한지. 무도회에서 만난 첫 순간 우리는 서로가 사랑에 빠졌음을 깨달았죠.”

    레베카는 마치 시를 낭송하는 것처럼 자신의 약혼자에 대해 연극조로 설명했다.

    일 년 전 그녀를 달래려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레베카는 상처받은 몸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시아는 결혼을 앞둔 친동생을 보는 것처럼 레베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레베카, 그렇게 좋아요?”

    “당연하죠. 지금쯤 리암 블레어는 땅을 치고 후회할걸요?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를 놓쳤는가, 하면서요!”

    다행이네.

    시아는 리암 블레어가 어떤 사람인지 레베카에게 더는 말하지 않았다.

    “레베카야말로 별일 없었어요?”

    “제국 분위기가 그다지 좋진 않지만, 전 괜찮아요. 만약 제가 뮐러가의 영애가 아니었다면 괜찮지 않았을 것 같지만요.”

    피부색 때문에 레베카를 배척하는 이들이 없진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뮐러가의 상속자가 가진 권위는 그녀의 몸 절반에 흐르고 있는 가멜인의 피를 이겼다.

    레베카는 이미 지나간 일을 이야기하듯 덤덤했다. 대신 무언가 할 말이 생각난 듯 갑자기 눈을 반짝이더니 시아에게 몸을 쑥 기울였다.

    “레이디 켈튼, 수도에 없었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죠? 작년의 시즌은 정말이지 엄청났다고요.”

    * * *

    놀란 시아는 들고 있던 스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미스 스칼렛 로스요?”

    “네에. 다무스 출신인 숙녀인데, 뭐랄까 굉장히 특이하더라고요.”

    레베카는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미묘한 웃음에서 시아는 특이하다는 말이 그리 좋은 뜻이 아님을 눈치챘다.

    “다무스인이라고 하면 고전적인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잖아요? 그런데 미스 로스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단 말이죠.”

    “사람을 출신지로만 판단하면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높죠.”

    “하긴, 레이디도 술란 출신이라고 말씀하시고 다니시니까요. 제 생각이 짧았네요. 어쨌든 문제는 그게 아니라, 미스 로스가 작년 사교계 시즌에 열었던 파티가 있었는데요.”

    레베카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해 그대로 이야기했다. 스칼렛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시아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다들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는 거죠? 거기서 뭘 했는진 기억을 못 하고요?”

    “샤샤리아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래요. 귀부인 중에 애연가로 소문난 분이 있는데 샤샤리아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고 했어요.”

    레베카는 스칼렛의 파티엔 아무나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녀와 친분을 쌓은 사람 중에서도 초대장을 받은 소수의 귀부인만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중독성 강한 황홀함의 경험 탓에 귀부인들 사이에선 스칼렛의 파티에 초대받는 것을 일종의 자랑거리로 여긴다고 했다.

    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증세를 들어보니, 귀부인들이 경험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샤샤리아보다 중독성 강한 약물에 의한 현상 같았다.

    “혹시… 레베카도 그 파티에 가본 적이 있나요?”

    “아뇨. 전 뭔가 무섭더라고요. 파티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못 한다는 게. 게다가 아무에게나 파티 초대장을 주지도 않는다고 했잖아요? 전 받아보지도 못했는걸요.”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약물 중독의 심각성을 모르던 과거에는 사람들이 약물의 효과에만 집중했지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으니까.

    시아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사실 건강을 생각하면 그런 덴 안 가는 게 좋아요.”

    “레이디 켈튼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게 맞는 거겠죠.”

    “제 말은 음, 그렇다기보단…….”

    “레이디 켈튼이 맞아요. 미스 로스의 파티 때문에 사이가 나빠진 이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누구는 초대받았는데 누구는 초대받지 못해서 말이죠.”

    레베카는 시아의 걱정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시아는 약물 중독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려다 곧 그만두었다. 레베카가 자신의 말을 괜한 잔소리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미스 로스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기도 해서 어울리지 않으려는 귀부인들도 있어요.”

    “무슨 소문인데요?”

    레베카는 트라이플을 먹던 스푼을 내려놓더니, 누가 들을세라 시아를 향해 몸을 기울여 소곤거렸다.

    “그녀가 코르티잔 출신이라는 거예요. 십 년도 더 된 일이라고는 하는데, 어떤 신사분이 미스 로스를 사교 클럽에서 봤대요. 늦은 시간에 코르티잔들을 클럽으로 불렀는데, 그때 봤던 얼굴이라지 뭐예요?”

    “…아하하, 그래요?”

    시아는 맞장구를 친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한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스칼렛의 과거를 알고 있던 탓이었다.

    “레베카, 십 년 전이면 미스 로스는 어린아이였을걸요. 십 년 전에 코르티잔으로 일을 했단 소문은 진짜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이런 소문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소문이 돌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숙녀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요.”

    그러나 이렇게 말해 놓고도 레베카는 막상 소문 자체의 진위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스칼렛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졌다.

    “레베카, 왜 그래요?”

    “그런 소문이 돌았는데도 이상하게 미스 로스는 인기가 많단 말이죠. 그녀를 영지로 초대하는 귀족들이 꾸준히 있거든요. 다들 그녀를 자신의 파티에 초대하고 싶어서 다들 안달 나 있는 것처럼 굴어요.”

    레베카의 큼직한 눈에 또다시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나기 시작했다. 결국 레베카는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미스 로스는 확실히 예쁘고 매력적이긴 해요. 누구나 홀릴 만큼요.”

    “레베카.”

    “있잖아요, 레이디. 저, 사실 약혼을 잘한 건진 모르겠어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단 것도 거짓말이고요. 그이가 잘해 주기는 하지만 절 사랑하는 것 같진 않아요. 이만하면 결혼 상대로 충분하다 생각하는 거겠죠.”

    꼭꼭 숨겨 왔던 속마음은 어째서 레이디 켈튼만 마주하면 터져 나오는 걸까.

    레베카는 결국 볼썽사납게 훌쩍거리며 이제까지 속앓이하던 마음을 모두 토해 냈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시아가 자리를 옮겨 레베카의 등을 감싸고 눈물을 닦아주자, 서러움이 폭발했다.

    “솔직히 말해서 제게 매일같이 편지를 보내주던 B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제가 만약 가멜 혼혈인이 아니었다면 리암 블레어는 편지에 쓰던 것처럼 저를 아끼고 사랑해 줬겠죠?”

    “레베카.”

    시아는 차마 웨스트스트릿 168번지에서 봤던 리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가 이단과 범죄에 연루되어있다는 것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도 스칼렛 로스를 경멸하던 그 눈빛이 잊히지 않아서였다.

    그것은 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상대를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리암이 지독한 차별주의자라면, 분명 레베카도 그런 식으로 볼 터였다.

    “모르겠어요. 저도 레이디와 옌 경 같은 사랑을 해보고 싶은데. 아녜요. 이젠 그 말도 취소할래요. 둘이 그렇게 오랫동안 남부에 있었으면서 고대 마법사님은 청혼도 안 하고… 어떻게 레이디 같은 숙녀를 내버려 둘 수가 있냐구요. 미워요, 미워어…….”

    결국 레베카는 시아에게 매달려 눈물, 콧물을 모두 뺐다.

    시아는 당황했다. 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신문배달원과 그를 정부로 둔 어린 아가씨로 오해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베카, 우리 자리를 옮길까요?”

    그러나 레베카는 우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벌게진 눈으로 시아를 올려다보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되겠어요. 레이디 켈튼, 오늘 저랑 무도회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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