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헤이든은 은쟁반과 페이퍼 나이프를 든 채 주인 아가씨가 어서 우편을 확인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아는 상자에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와, 이게…….”
로드리치가에서 온 편지가 한 묶음, 레베카에게서 온 편지가 한 묶음. 나머지는 레이디 시아 켈튼의 어마어마한 인맥(사실 시아 본인은 그 인맥이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과 이어지고 싶어 했던 귀족들의 무도회 및 각종 행사 초대장이었다.
대부분은 켈튼저가 아닌 시아 켈튼의 소유라고 알려진 술란의 저택으로 보내진 편지들이었다.
시아는 혀를 내두르며 편지를 하나씩 확인했다.
“이건 미술관 전시 티켓이고, 이건 조정 경기 관람 초대장이고… 작년 날짜 것이 대부분이네요. 이거, 답장 없이 이렇게 뒀어도 괜찮은 편지들 맞아요?”
“대부분은 괜찮습니다. 사교계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당신이 병에 걸려 나와 함께 술란에 내려갔다고 믿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러니까 라크시스의 말은, 레이디 켈튼에게 편지를 보냈던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는 이유를 충분히 알아서 납득해 줬을 것이란 뜻이었다.
시아는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에 삐걱거리며 라크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신 변명해 준 건 고마운데, 이 시대 사람들은 제가 몸이 아파서 라크와 술란에 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던가요?”
“당연히 믿지 않죠. 수도엔 당신과 제가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라 알려져 있으니 더더욱이요. 아마도 우릴 불건전한 관계로 오해했을 겁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가 불장난을 즐기러 갔다고 생각할걸요.”
“잠, 잠깐만요. 뭐라고요?”
“레이디 켈튼이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아무래도 그녀와 그녀를 뒤따라 남부로 내려간 남자의 관계가 많이 달라져야겠지요. 예컨대 두 사람이 약혼한 사이라든가, 아니면 결혼한 상대라든가.”
라크시스는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편지 더미에 묻힌 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은 시아에게 몸을 숙이며, 인사를 하듯 굽힌 팔을 내밀었다.
“혹시 레이디 켈튼께서는 달리 마음에 둔 신사가 있으신지?”
“아닌 걸 알면서 그래요!”
주방장이 새로 구워낸 스콘을 응접실로 들여오던 요크 부인이 때마침 그 모습을 보곤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 두 분 참 보기 좋아요. 구설에 더 오르기 전에 어서 약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지요? 주인님도 이젠 흔쾌히 허락하실 거여요. 안 그런가요, 주인님?”
“몰라, 이젠 맘대로 해.”
요르문은 진저리를 치며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요크 부인은 그런 주인에게 아가씨의 사촌으로서 무책임한 태도라고 잔소리를 하고선 빈 접시를 치웠다.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헤이든은 시아를 향해 공손하게 은쟁반을 내밀었다.
“이건 주인님께서 특별히 보관하라고 하신 편지입니다, 아가씨.”
라크시스는 어느새 시아의 옆에 앉아있었다. 시아는 졸지에 요르문과 라크시스 사이에 낀 상태로 헤이든에게서 편지를 받아 들었다.
“황제 폐하께 온 편지네요.”
“아무래도 이것만큼은 제가 함부로 놔둘 수가 없어서 말이죠, 누님.”
은은한 광택이 도는 빳빳한 봉투 위로 황실의 문장이 선명히 찍힌 붉은 인장이 도드라졌다. 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열어 볼까요?”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적으셨는진 저도 궁금하군요.”
라크시스가 전에 없던 관심을 편지에 보였다. 그도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적잖이 궁금했던 듯했다.
시아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갈라 편지를 꺼냈다.
[친애하는 레이디 켈튼에게.
지난 행차에서 그대가 보여준 기지 덕분에 목숨을 건졌네. 제국의 군주이자 해리의 어머니로서 다시 한번 큰 감사를 표하지.
그 보답으로 황궁에서 그대를 위한 무도회를 열어줄까 하네. 그대가 어서 쾌차하길 바라. 라크시스 옌의 춤 솜씨를 볼 기회가 드문데, 그대 덕을 한 번 볼까 싶기도 하고.
봄이 찾아온 황궁 정원의 모습이 꽤나 아름다워. 몇 주가 지나면 장미가 황궁을 붉게 뒤덮겠지. 세월이 흐르니 나도 군주가 아닌 나와 이야기를 나눠줄 말벗이 필요하게 되었음을 느끼네.
아마 그대도 분명 황궁의 풍경이 마음에 들 거야. 함께 차를 마시며 궁을 구경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걸세.
부디 건강하게 지내게.
알리나 디아우스 세페란테로부터. ]
편지를 읽은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만히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던 시아가 손을 조금씩 떨며 침묵을 깼다.
“…저, 엄청난 편지를 받은 거 맞죠?”
“황제가 스스로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무니까요.”
라크시스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황실에서 황족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한 무도회를 열어주겠다고 하는 경우는 지금껏 한 번도 없었죠. 말벗이 필요하다는 건 당신에게 황제의 시녀가 될 최고의 영예를 주겠다는 것인데…….”
그도 예상치 못한 편지에 당황한 듯 자꾸만 애먼 턱을 매만졌다.
시아는 멋쩍게 콧잔등을 긁었다. 마도 시대의 귀족이 아닌 자신이 생각해도 보통 호의가 아닌데, 평생을 이곳의 귀족으로 살아온 라크시스가 보기엔 얼마나 함축된 의미가 많은 편지일까.
“하, 하하… 이거 거절할 순 없는 거겠죠?”
“거절할 순 있습니다. 다만 영원히 황제 폐하와 척을 질 각오를 해야 하겠지만요.”
와. 보통 각오가 아닌데.
시아는 입술을 양쪽으로 잡아당겨 웃는 둥, 마는 둥 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애매한 반응을 본 라크시스가 조심스럽게 선택지를 추가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거절해도 좋습니다. 당신은 이곳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폐하께선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보답을 거절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할 분도 아니시기는 합니다만.”
“하지만 계속 잠든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스칼렛 로스를 만나려면 사교 활동을 해야 할 텐데, 그렇게 된다면 황제 폐하께 틀림없이 들킬걸요.”
애초에 마도 시대에서 레이디 켈튼의 신분을 만들어 둔 이유는 다름 아닌 사교 활동 때문이었다.
원래는 발자크 로스라는 가명 밑에 숨은 카얄을 만날 때 쓰려고 했던 것이었으나, 카얄은 멀리 떨어진 테라스에서 마주친 것 외엔 더는 본 적이 없었고.
‘스칼렛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시아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녀의 표현을 눈치챈 라크시스도 눈썹을 밀어 올리며 화답했다.
“일단은 답장을 드리고 알현 신청을 해보도록 하죠. 말씀은 거기서 따로 드려봅시다.”
* * *
레이디 켈튼이 수도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녀를 실제로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모두들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그녀의 수도 복귀를 주장했는데, 첫 번째는 블레어 스트릿의 모든 부티크가 특별 손님의 주문을 핑계로 일제히 예약을 멈추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데뷔할 황녀 하나 없는 황궁에서 뜬금없이 무도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레이디 켈튼, 어쩜 제게 한 마디도 안 하실 수가 있어요?”
“레베카, 그게…….”
켈튼저에서만 지내던 것이 답답했던 시아가 몰래 아르카나로 나왔다가 그만 레베카 뮐러와 마주친 사건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레이디를 위한 무도회를 열어주겠다고 하셨다면서요! 황제 폐하의 시녀 자리는 왜 거절하신 건데요? 저라면 당장 승낙했을 거예요!”
“레베카, 조금만 소리를 낮춰요. 아, 그래. 우리 카페라도 갈까요? 여기 모퉁이만 돌면 지난번에 갔던 카페 블랑이 있거든요.”
남장을 하고 거리를 신나게 쏘다니던 시아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레베카의 질책에 허둥지둥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레베카는 더 이상 옛날의 순진하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수도에 오셨으면 오셨다고 말씀하셨어야지, 제가 내내 편지 보낸 것엔 답장도 한 번 안 해주시고. 우리 친구 아니었나요? 친구의 소식을 부티크에서 듣게 만드는 사람이 어디 있냔 말이에요!”
부티크에서 시아의 소식을 들었다는 사람답게 레베카의 뒤엔 쇼핑의 결과물을 잔뜩 들고 그녀를 따르던 하인들이 네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레베카의 말이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느 순간 슬그머니 마차에 짐을 싣고 있었다. 그러나 레베카는 그것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옌 경 때문에 모든 부티크가 예약 주문을 취소했다고요. 신사분이 드레스 파는 가게에 예약했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요? 레이디 켈튼이 왔다는 뜻이겠죠. 그것도 사교계 시즌에 맞춰서요!”
결국 레베카는 감정이 북받쳐 눈시울을 빨갛게 물들이고 말았다.
시아는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레베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레베카.”
“꼴은 왜 그래요. 예쁜 얼굴 다 가리고. 왜 신문배달원 같은 옷을 입고 다녀요?”
“이렇게 하면 거리에서 눈에 잘 안 띄거든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 깨어난 시아의 체력을 고려한 라크시스는 부티크의 디자이너들을 전부 저택으로 불러들였으나 그 탓에 며칠 동안 내내 집 안에만 있어야 했던 시아는 바깥의 맑은 공기를 간절히 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작년의 알현식으로 시아의 얼굴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탓에 라크시스는 그녀가 외출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해질까 걱정했다.
시아는 결국 남장을 조건으로 외출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새하얀 드레스에 타조 깃털을 머리에 달았던 레이디가 연상되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시아의 미모엔 남장도 소용없었다.
“안 띄긴요. 전 레이디 켈튼을 한 번에 알아봤다구요.”
레베카라서 알아본 걸까, 아님 모두가 날 알아볼 정도인 걸까.
시아의 눈동자가 당황하여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시아를 가까이서, 그것도 로렌 허슬러에 대한 사심으로 요모조모 뜯어보며 관찰해 왔던 레베카였기에 한 번에 알아본 것이었지만 레베카는 괜히 심술이 나 그 사실은 알려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몸은, 괜찮고요?”
“제가 몸이 아파서 남부로 내려간 이야긴 아무도 안 믿잖아요.”
“안 믿어도 예의상 물어봐 주는 거예요. 우린 친구니까요.”
레베카의 쏘아붙임엔 핀잔과 걱정과 안심이 모두 들어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아를 흘기면서도 툭툭 안부를 묻는 레베카에 시아는 괜히 더 미안해지고 말았다.
“몸은 괜찮아요. 아파서 내려간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매우 건강하니까 제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레이디 켈튼. 약혼했나요?”
“네, 네에?”
뜬금없이 물어온 질문에 시아는 사레에 들려 켁켁거렸다. 레베카는 시아의 등을 도닥여 주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시아의 손가락을 빠르게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