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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44)화 (244/292)
  • 244화 

    “…어쩌면 헨리 던로가 재키 레이븐이 된 것도 카얄의 의도 때문일 수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죠. 그렇다고 해서 재키 레이븐을 그저 스칼렛 포드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으로 치부할 순 없겠지만요.”

    시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방금 들었던 기막힌 이야기도 이야기였지만…….

    ‘왜 하필 스칼렛이었을까.’

    스칼렛은 카얄이 조종하기 쉬운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화려한 세계에 대한 욕망. 수렁으로 떨어진 삶. 죽음을 앞둔 절박한 상황.

    차가운 뒷골목에서 죽어가던 스칼렛은 카얄이 내민 구원의 손길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 같은 운명을 맞이한 사람이 스칼렛 하나뿐이었을까?

    웨스트스트릿 168번지에서 보았던 그녀는 카얄에게 매우 충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대신해 맨덜랜드에서 지저분한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었고, 카얄에게 어둠의 힘이라도 받은 듯 저주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다무스 출신 귀족인 발자크 로스의 누이동생, 스칼렛 로스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껏 저주에 휘말렸던 사람 중 카얄이 이토록 곁에 두고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수단이었고,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할 패에 불과했으니.

    시아는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의문을 입 밖으로 냈다.

    “…설마 카얄도 사랑이란 걸 하게 된 걸까요?”

    “웩. 누님, 제발요. 그 자식에게 사랑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역시.

    말을 꺼내자마자 요르문에게 반박당했다. 라크시스도 이번만큼은 요르문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었다.

    시아는 괜히 민망해져서 대꾸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카얄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는걸요.”

    “저도 그게 이상하긴 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카얄이 스칼렛 포드를 특별히 여겨서 그러는 것 같진 않습니다.”

    라크시스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요르문이 결론을 내리듯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주위를 환기했다.

    “이용할 구석이 남은 거겠죠. 차라리 잘 됐어요, 누님. 우리가 먼저 스칼렛 포드에게서 약점을 잡죠. 카얄이 그녀에게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는 거예요.”

    “그럴 수 있으면야 좋지만…….”

    “참고로 스칼렛 로스는 맨덜랜드 사태 이후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시아.”

    시아는 두 사람의 시선이 제게 향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그녀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눈빛이었다.

    사교계에 데뷔한 스칼렛 포드에게 접근하는 것이라.

    시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결국 제가 해야 될 일이라는 거네요?”

    그러자 라크시스가 에스코트를 하듯 팔을 내밀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같이 할 일이죠. 제가 언제 당신을 혼자 둔 적이 있습니까.”

    “누님, 걱정 마세요. 사교계에서 누님을 함부로 건드릴 만큼 간 큰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시아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이들이 이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스칼렛을 만나보러 어차피 사교계에 나가봤어야 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팔을 장난치듯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 쭉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봉인은 수도에 있는 게 확실하네요. 맨덜랜드에도 없고, 카얄과 스칼렛도 모두 수도에 모여 있으니까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라크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요르문도 이에 거들며 나섰다.

    “누님이 여기서 깨어나셨으니까요. 지난번에 시간 여행으로 도착하셨던 곳도 별궁의 대공 서재였고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대공 전하는 어떻게 되셨어요?”

    별궁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아는 문득 대공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평판이 엉망이 되어버려 별궁에 칩거하다시피 지내던 대공이었는데…….

    라크시스가 턱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대공은 저도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만. 황제 폐하의 폭탄 미수 사건 이후로 다시금 그를 지지하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무언가 하셨군요?”

    요르문이 불쑥 끼어들었다.

    “폭탄을 던진 범인을 대공이 찾아냈거든요. 모르간 경찰도 어쨌거나 내무부 소속 기관이었으니까요. 밤낮 할 것 없이 경찰들이 도시를 수색해서 찾아냈죠. 그 후에 대공이 어떻게 한 줄 아세요? 맨덜랜드 사태의 원흉과 황제 시해 미수 사건의 범인을 남대륙인과 동일시하지 말라며 사건을 종결해 버렸어요.”

    시아는 차탈의 지시 아래 정말로 사건의 범인만이 처형된 후로, 그가 남대륙 출신 제국인과 혼혈인 제국인들에게 큰 환호를 얻게 되었다는 일화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보수당에 밀려났던 노동당이 차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도 말이다.

    라크시스가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대공 역시 황혼 국교회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아낸 것들이 있다 보니 그런 대처를 한 것 같은데, 사실 사람들은 황혼 국교회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지지율이 미미하게 오른 것도 대공이 남대륙의 신민까지 포용한다는 이미지가 생겨 버린 탓일 가능성이 큽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멜인이 제국을 배신하고 침략한다면서 그들을 배척한 이후, 제국인들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제국의 거대한 마도 산업과 공업을 뒷받침하기에 제국인의 수가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당장의 사건들과 단편적인 증오만으로는 가멜인들과 함께해 온 오랜 세월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제국이 식민지를 보유해 온 세월이 길었던 만큼, 식민지 출신 사람들이 제국에 스며들었던 시간도 길었던 탓이다.

    가멜 출신 노동자를 쫓아낸 공장에선 부족한 일손을 메우려 기존의 두 배에 달하는 임금을 노동자들에게 주어야 했다. 거리의 상점이나, 머나먼 지방의 농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모직물의 가격은 단기간에 크게 올랐다. 양 목장부터 모직 공장까지, 인건비가 모조리 올랐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가치를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었다. 당장 공장이 굴러가지 않으면 아쉬운 건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2쿠퍼짜리 줄과 1쿠퍼짜리 의자 대신 1쿠퍼에 전신을 뉠 수 있는 자그마한 마루판이 생겼고,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할 경우 고용주는 임금을 추가로 지급하게 되었다.

    한 사람만 일해도 가정이 굴러갈 수 있게 되자, 어린아이를 공장으로 보내는 집이 줄어들었다. 일하는 아이들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각은 예전과 달라졌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카얄로 인해 시아가 알고 있던 맨덜랜드 시위는 제대로 일어나보지도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는데, 결국에는 그들의 권익이 보장되는 상황이 오게 되었다.

    제국 사회가 다시 가멜인들을 받아준다고 해도 한 번 올라간 기준은 다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라는 건, 미래라는 건, 결국 예정된 대로 흘러가는 걸까?

    시아는 자신이 과거를 바꾸고 원래 시대로 돌아갈 때마다 자잘하게 달라져 있던 것은 많았어도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환경은 변하지 않았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시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라크시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시아는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만약 미래라는 게, 필연적인 결과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의 죽음이나 종말도 어떠한 형태로든 이뤄지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시아는 차마 라크시스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오롯이 담은 저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기에.

    설령 자신이 돌아가야 할, 칠십 년 후의 미래를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또 혼자서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군요? 시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적어도 당신만큼은 당신이 알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할 테니까.”

    “…라크, 제 머릿속에 들어오기라도 했어요?”

    “이런.”

    라크시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이내 그가 재킷 앞주머니에서 행커치프를 꺼내 들더니 시아에게 몸을 기울였다.

    시아는 그가 자신의 눈가를 콕콕 닦아주자,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아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잖아요. 전 라크만 살아있으면 되는데.”

    라크시스가 손을 멈칫하고는 눈을 잠시 크게 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신도 많이 달라졌군요.”

    “…제가요?”

    시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물을 훔쳤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볼 위로 흐르던 눈물방울을 가볍게 닦아내었다.

    “고작해야 봉인 하나를 가지고, 체내에 남은 마력도 없어서 저주로 연명하는 마법사쯤은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얄을 그렇게 나약한 마법사로 만들어 준 건 다름 아닌 당신이고요.”

    시아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처음 그녀가 종말을 막으려고 했던 건, 광룡에 의해 희생될 무고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아는 라크시스를 구하기 위해 종말을 막고자 했다.

    “일기장이 예견한 미래는 더 이상 없어요.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라크시스는 행커치프를 내려놓곤 시아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 살짝 남은 물기를 엄지로 쓸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니 잘 될 거예요. 모든 것이요.”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 뜨겁다. 시아는 그 열기가 마치 축복 같다고 느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축복을 받은 중세의 기사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듯, 그가 남긴 열기는 모든 일이 정말로 잘 풀릴 것만 같은 묘한 확신을 시아에게 주었다.

    “고마워요, 라크.”

    “별말씀을.”

    “내가 잊고 있었지. 두 사람이 원래 이런 사이였다는걸.”

    이 광경을 코앞에서 봐야만 했던 요르문이 대놓고 불만을 터뜨렸다.

    라크시스는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민망해진 시아는 라크시스에게서 슬그머니 떨어져 나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귀밑 잔머리를 배배 꼬았다.

    “…제가 잠들어서 그간 밀렸던 일들을 해야 한다면서요. 요르문, 라크. 제가 뭐부터 하면 되죠?”

    “많죠. 일단 누님 앞으로 온 초대장부터 해결해야 하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요르문은 집사 헤이든을 시켜 그간 밀린 초대장들을 가져오게 했다.

    시아는 곧 헤이든이 가져온 초대장의 양에 아연하고 말았다.

    “이게, 다?”

    “그럼요.”

    헤이든이 하인을 시켜 테이블에 내려놓은 것은 흡사 팬레터를 방불케 하는 양의 편지가 든 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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