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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43)화 (243/292)
  • 243화 

    시아에게 항복 선언을 들은 라크시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아를 부축해 내려왔던 요크 부인은 진작 자리를 피하고 없었으나 시아의 귀엔 응접실 벽 너머에서 어머, 하고 감탄하는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숙녀분? 제게 기대시죠.”

    라크시스가 에스코트를 빙자해 은근하게 팔을 내밀었다. 팔다리에 힘이 없기는 아직도 마찬가지라, 시아는 결국 피식거리며 라크시스를 붙잡고 응접실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곤 차로 목을 적시며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씩 물었다.

    “그나저나 봉인은 어떻게 된 거예요? 맨덜랜드의 교회 부지에 봉인이 없었다면서요?”

    프레디 뮐러가 남긴 바람 장미를 따라 시아 일행이 맨덜랜드로 갔던 것도 벌써 반년 전 일이었다.

    위치까지 거의 특정했기에 봉인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질문을 들은 라크시스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에 시아는 지난 반년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직감했다.

    “교회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김에 부지를 조사해 봤죠. 봉인의 파장은 그대로 감지되긴 했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디론가 옮겨진 게 아닌가 싶은데……. 봉인이 교회 부지에 오랫동안 머무른 탓에 주변 지대에 봉인의 이상 마류가 깃든 것 같더군요.”

    “있긴 있었다는 소리네요.”

    “맨덜랜드에 오래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교회가 있던 자리에서 성물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성물. 누가 봐도 수상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발견된 물건이 성물이라 여겨졌던 이유가 교회에 방문했던 마법사들의 마력을 회복시켜 주고, 기이한 기운을 뿜어 사람들을 혼절시킨 탓이라 하니…….

    라크시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성물이 봉인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백 년도 더 된 일입니다만, 성물이 발견된 것을 기념하여 그 자리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 안에 성물을 보관해 왔는데 마거릿 황제가 국교회를 숙청하던 시기에 성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다 그만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잃어버렸다고요?”

    “…잃어버렸단 건 도둑맞았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죠. 증기 마차가 생기기 이전엔 마차를 습격하는 강도들도 꽤나 있었고요.”

    라크시스는 성물을 실은 마차의 소식을 들은 강도들이 늦은 밤 숲을 지나는 마차를 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시아는 머리를 짚었다. 봉인 찾기가 어째 순탄하게 흘러간다 했더니…….

    그러나 뒤이은 라크시스의 말에 시아는 놀라고 말았다.

    “혹시나 싶어 맨덜랜드 땅 전체를 파보긴 했는데, 역시나 발견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봉인을 찾기 위해 도시 전체를 뒤엎었다고 했다.

    맨덜랜드 이외의 곳에서 봉인의 파장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성물이 맨덜랜드 안에 남아있을 거라 생각하고 온 도시를 파헤쳐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맨덜랜드를 헤집고 다녔는데 아무도 뭐라 안 했어요?”

    “도시 재건을 위한 자선 사업이라는 그럴싸한 핑계가 있었죠. 실제로 맨덜랜드엔 구호가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고요.”

    라크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도시를 수색하기 위해 땅도 닦아주고 건물도 몇 올려줬다는 말씀이다.

    이런 거야말로 그밖에 못 하는 일일 터다. 시아는 혀를 내두르며 헛웃음을 흘렸다.

    “한 가지 더. 시아, 혹시 웨스트스트릿 168번지에서 봤던 자들을 기억하십니까?”

    “그, 음… 리암 블레어와 붉은 드레스를 입었던 사람 말이죠?”

    기억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제국의 총리가 이단과 손을 잡고 노예 밀무역에 가담하고 있었단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가.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발자크 로스의 누이인 스칼렛 로스라더군요.”

    뭐?

    “카얄에게 누이가 있다고요? 그렇단 건 스칼렛이란 사람도 사도라는 건가요?”

    시아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깜짝 놀란 요르문이 시아를 달래며 진정시켰다.

    “누님, 진정하세요. 그런 건 아닌데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에 비할 정도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긴 했습니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도로 앉혔다. 그러면서 가만히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서 아주 미약한 바람이 불더니, 경찰서에서나 쓸 법한 칙칙한 서류철이 나타났다.

    “시아. 그때 리암 블레어가 스칼렛 로스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해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표현이지만요.”

    아르카나의 창부.

    리암 블레어는 붉은 옷을 입은 여자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면서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때 제가 짐작 가는 것들이 있다고 했었죠. 시아,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라크시스는 소환한 서류철을 시아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넘기며 내용을 살피던 시아는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메이덜린 경찰서의 실종자 명단이잖아요.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요?”

    인적 사항과 사진이 함께 있는 명단을 한 장씩 넘기던 시아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페이지에 도달한 시아는 경악하며 새된 신음을 삼켰다.

    “잠깐만요, 스칼렛 로스가 설마…….”

    믿을 수가 없었다. 메이덜린 실종자 명부에 떡하니 박힌 흑백 사진 속 얼굴은 그날의 웨스트스트릿 168번지에서 본 여자의 얼굴과 똑같았다.

    미스 스칼렛 포드. 아르카나의 창관 출신인, 부모와 친척이 없는 무연고자.

    헨리 던로의 약혼녀이자, 헨리가 던로 남작가를 등지고 야반도주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며, 재키 레이븐이 죽인 첫 희생자.

    시아는 서류철을 든 손을 파르르 떨었다.

    “스칼렛 포드였죠. 헨리 던로가 처음으로 죽인 피해자 말입니다.”

    그의 확답에 시아는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이렇게나 증거가 명확히 존재하는데…….

    그제야 오래전 웨스트스트릿 168번지에서 들었던 대화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 그대의 전남편? 데이먼 포드 말이지. 이혼당한 남편이 쫓아오기라도 하는 모양이군. 하긴, 내가 데이먼 포드라도 그대 같은 아내는 지옥에 내던지고 싶을 거야.’

    ‘제 앞에서 다시 한번 그놈의 이름을 꺼내셨다간 각하를 미라로 만들어 남은 평생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겠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데이먼 포드는요? 설마 데이먼 포드가 유령선 사건에 집착했던 이유가…….”

    “자신을 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서였죠. 이혼 서류만 남기고 집을 나간 아내, 스칼렛 포드를 말입니다.”

    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요르문은 라크시스에게 진작 이 이야기를 들었었는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라크, 제가 사라진 사이에 데이먼 포드를 만났던 거군요.”

    그러자 라크시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맨덜랜드 사태 이후 미스터 포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건 로드 젤마니가 알려준 단서를 쫓아 직접 알아낸 이야깁니다.”

    제국 동부의 작은 농업 도시 보테나. 데이먼 포드는 그곳에서 방앗간을 하던 포드가의 장남이었다고 했다.

    산업이 발전하고 마도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세 장원의 질서가 무너진 지는 오래였지만, 보테나처럼 농사를 가업으로 삼은 이들이 많은 지역에선 방앗간은 여전히 부의 상징이자 마을의 권력이었다.

    스칼렛은 그런 포드가의 장남, 데이먼 포드와 결혼한 여자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처음부터 두 사람은 맞지 않았다고요.”

    스칼렛은 포드 부인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

    데이먼 포드는 성실하기만 한 평범한 남자였기에, 스칼렛은 그에게서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제아무리 방앗간이 부의 상징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장원 농노들 사이의 이야기였고, 스칼렛은 그 이상의 화려한 삶을 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에 살던 귀족이 영주를 만나기 위해 보테나를 찾아오게 된다.

    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스칼렛이 그 수도의 귀족이란 자를 따라간 거군요?”

    “맞습니다. 데이먼 포드에게는 이혼 서류만을 남겨둔 채 말이죠.”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이런 일이 터질 줄 알았다며 하룻밤 불장난에 속아 남편을 배신한 스칼렛을 손가락질했다.

    데이먼에게도 그녀와의 이혼을 종용했지만, 데이먼은 끝까지 이혼 서류를 받아들이지 않고 스칼렛을 찾으러 수도로 올라왔다.

    시아는 아찔해지는 기분에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스칼렛도 그리 행복하게 살지 못했겠군요. 헨리 던로를 만나기 전의 일을 생각하면요.”

    스칼렛은 수도에 오자마자 귀족에게 버림받았다. 그에게 이미 부인이 있었던 탓이다.

    스칼렛은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고 끝까지 버텼으나, 결국 내쫓겨 낯선 수도에서 혼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거리를 전전하던 그녀가 발길을 향한 곳은 아르카나 뒷골목의 창관이었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불운했죠. 불장난 상대였던 귀족의 아이를 밴 탓에 청부업자에게 살해당했거든요.”

    “뭐라고요? 잠깐, 스칼렛이 죽었다뇨. 그럼 지금까지 말한 이야기는 뭔데요? 제가 맨덜랜드에서 본 사람은요?”

    “…창관의 마담이 그러더군요. 뒷골목에 죽어있던 스칼렛을 살려낸 사람이 바로 검은 코트의 마법사라고요. 시아, 믿기 어렵겠지만 마담이 이건 자그마치 십 년도 더 된 일이라고 하더군요. 본인이 직접 목격한 일이라면서요.”

    시아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멈춰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들도 놀라운데, 이게 모두 십 년도 더 된 일이라니.

    “누님, 데이먼 포드를 실제로 만나보면 무슨 말인지 알걸요. 데이먼 포드는 장성한 자식이 있을 것 같은 얼굴이라고요.”

    요르문이 끼어들며 라크시스의 말을 거들었다.

    시아는 실종자 명부 속 흑백 사진을 다시 한번 살폈다. 사진 속 여자는 레베카 또래쯤으로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스칼렛 포드는 카얄에 의해 되살아난 후 늙지 않고 있다는 거다. 데이먼 포드가 나이를 먹어가는 도중에도 홀로 계속 오래전에 머물러 있었단 뜻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노화와 죽음이라는 순리를 거슬러 인간을 마음대로 살릴 수 있다니. 그러니 카얄에겐 인간이 죽고 다치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것일 테다.

    “그날 이후로 스칼렛 포드는 검은 코트의 마법사를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헨리 던로가 스칼렛 포드를 만난 건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한참이 지난 일이에요.”

    시아는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다.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스칼렛은 다시 창관으로 돌아갔다는 거잖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트라우마 때문에라도 두 번 다시 그 근처에 발도 들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스칼렛은 다시 아르카나의 뒷골목을 찾았고, 우연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와 엮인 헨리 던로는 황혼 국교회의 저주와 함께 처녀에 집착하는 살인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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