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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42)화 (242/292)
  • 242화 

    요르문은 그녀가 쓰러졌던, 황제의 행차가 있던 날의 일들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천천히 회고했다. 시아의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둔 이야기였다.

    덕분에 시아는 순서 없이 떠돌던 기억을 퍼즐처럼 하나씩 끼워 맞출 수 있었다.

    황제의 행차가 있었던 3520년 12월. 시아는 저격수가 있던 테라스 건너편에서 카얄을 발견했고, 카얄은 시아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구경꾼으로 위장한 꼭두각시를 이용해 황제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

    그 순간, 시아는 칠십 년 후에서 자신이 겪었던 아르카나 테러 사건을 떠올렸었다. 기사 로건이 불구가 될 정도로 다치고, 거리가 화염에 휩싸이던 끔찍한 그 날을.

    그땐 그날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폭탄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자마자 시아의 손은 폭탄을 향해 움직였고, 그녀의 몸을 가득 채운 마력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시아를 공간 이동시켰다.

    갈리프의 마력이 시아를 보호했으나 폭탄이 터지며 발생한 충격까지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차에서 알리나가 무사히 내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시아는 의식을 잃었다.

    그러고 나서 눈을 떠보니 의회가 끝난 3521년 3월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폭탄을 던진 범인이 서대륙의 첩자였다고?”

    시아는 요르문의 말에 놀라며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황실에서 공표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는 건데, 진실은 아무도 몰라요. 사람들은 이제 서대륙이 제국을 침공할 거라고 믿게 됐죠.”

    황제의 마차를 공격한 범인이 자신의 배후가 서대륙이라며 순순히 불어버린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아는 두 귀를 의심했다. 세상 어느 첩자가 저렇게 입이 가볍단 말인가.

    그러나 시아는 요르문에게 쉽사리 반박할 수 없었다. 테라스에서 붙잡은 저격수의 총 역시 서대륙의 방식으로 제조된 것이라던 라크시스의 말이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맨덜랜드 사태도 실은 제국의 식민지가 탐났던 서대륙에서 가멜 무장군을 부추겨 일어난 사태라고 결론이 났어요. 구체적인 근거야 일반인들이 알 길이 없지만… 클럽에선 이를 두고 한동안 말이 많았죠. 서대륙을 공격하기 위한 빌미를 꾸며내기 위해 제국이 맨덜랜드를 희생시킨 것이 아니냐면서요.”

    요르문의 말에 시아는 덜컥 공포에 사로잡혔다. 극복했다 싶으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어릴 적의 트라우마가 그녀의 발목을 수렁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서대륙의 전투기에서 알약처럼 떨어지던 폭탄들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손발이 파르르 떨렸다. 숨이 턱 막히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전쟁은 안 돼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른다고요. 제가 겪은 건 어릴 적에 ‘휴양지 씨즐턴’에 벌어진 공습이 전부이긴 하지만, 아… 안 돼요. 서대륙을 도발했다간 제국 전체가 표적이 되어버려요. 그래선 안 돼요. 절대로, 절대 안 돼요.”

    “누님!”

    “시아. 숨 쉬어요.”

    라크시스는 재빨리 시아의 손을 잡아 주곤 그녀의 몸에 치유 마력을 흘려 넣었다.

    오래전, 시아가 슈테른베슈테크를 공격했던 제국군의 횃불을 보고 쓰러졌던 것이 생각이 난 탓이다.

    아무래도 시아의 기억 속엔 전쟁의 참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모양이다.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을 것 같았던 숙녀였는데…….

    라크시스는 시아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전쟁을 곁에서 지켜보며 살아왔던 자신인데, 칠십 년 후의 미래에서 그녀가 겪었던 전쟁이 새삼 끔찍하게 느껴졌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품에 한참을 안겨 있다가 겨우 진정했다.

    호흡이 안정되고, 자리에 도로 똑바로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진정되자 요르문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누님, 죄송해요.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

    “아냐. 내가 말하지 않은 것도 있는걸. 극복했다 싶었는데 또 이러네. 난, 괜찮아.”

    “황실의 마법사단과 제국의 마도 무기들을 맹신하는 자들이 과격한 주장을 하기는 합니다만, 의회와 황제 모두 전쟁을 원치 않기에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러나 시아는 라크시스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래의 전쟁도 아주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었으니까.

    요르문은 시아를 위해 화제를 돌렸다.

    “아, 동관 공사는 무사히 끝났어요. 공사 과정의 대부분은 황궁 깊은 곳을 그저 들쑤시는 것이긴 했는데, 마력 동력원엔 정말로 문제가 있긴 했더라고요.”

    황제 암살 미수 사건 때문에 동관 공사에 관한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아의 귀가 쫑긋거렸다.

    황제의 행차에서 봉인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공사 중인 동관에서 봉인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을 정도로 수상한 공사였다.

    노후되지도 않은 마력 동력원을 교체해야 한다고 황제를 부추겼던 자가 발자크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수상해도 보통 수상한 일이 아니었다.

    “동력원으로 쓰이는 마정석에 쇳조각이 박혀 마력이 누수되고 있었어요. 누님이 기억하는 공사에선 아마 그 쇳조각을 제거하다가 마정석을 잘못 건드려 사고가 생긴 것 같고요.”

    “마정석이 오래되어서 다른 문제가 생기거나 하진 않았어?”

    “황궁 전체에 마력을 공급하는 마정석은 아마 앞으로 수백 년은 더 멀쩡히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멀쩡했어요. 문제가 있었던 건 마력이 누수되는 부분이 전부였고요.”

    요르문은 동관 공사에 대해 그 밖에 다른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그의 반응으로 보아, 황궁 동관 공사 현장에서도 봉인은 발견되지 않은 듯했다.

    요르문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황궁이 무너지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누님, 이젠 긴장을 푸셔도 돼요.”

    “…내가 긴장하고 있었다고?”

    “말도 마세요, 아가씨. 오며 가며 아가씨를 보던 제가 마음이 다 졸아들던걸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심하셔요. 아가씨께는 주인님도 계시고, 고대 마법사님도 계시잖아요.”

    요크 부인이 시종 대신 직접 디저트를 내오며 시아를 도닥였다. 그녀가 어지간히 마음이 쓰인 모양이었다.

    시아는 초콜릿 크림이 잔뜩 올라간 케이크를 먹으며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디저트 코스까지 마친 세 사람은 응접실에 둘러앉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식사는 진작 끝났는데도 할 말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아는 잠옷 차림 그대로 응접실에 가려 했다가, 응접실만큼은 숙녀답지 못한 차림으로 가게 둘 수 없다는 요크 부인에게 이끌려 드레스룸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렇게 수십 분이 흐르고, 요르문과 라크시스가 서로 한마디도 없이 소파에 앉아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던 중에 마침내 시아가 이 층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문을 펼쳐 들고 있던 라크시스는 요크 부인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시아를 발견하고 반색하며 일어났다.

    “시아.”

    로렌 허슬러를 연상시키는 유백색 드레스는 실크와 레이스가 아낌없이 들어가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풍겼다.

    언제부터 이 집에 있었는지 모를,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가 설탕처럼 뿌려진 섬세한 목걸이가 살짝 드러난 쇄골 위에서 은은하게 반짝였다.

    어디 그뿐이랴. 요크 부인은 시아가 당장 무도회에 가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머리카락을 공들여 꾸며주었다.

    그간 풀지 못했던 한을 풀기라도 하는 듯, 시아의 결 좋은 긴 머리를 이리 말고 저리 말아 반묶음으로 모양을 내어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핀을 꽂아두었다.

    요크 부인의 손길에 오랜만에 숙녀처럼 완전히 갖춰 입은 시아는 제 모습이 어색한 듯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았다.

    “이걸 이제야 입어보네요.”

    시아는 코끝을 어색하게 긁으며 괜히 다른 곳을 보았다. 시아가 입고 있는 건 지난 시간 여행 때 라크시스가 알현식을 준비하며, 그녀를 위해 맞춰 두었던 드레스였다.

    “…예쁘네요.”

    “옷이 예쁘긴 하죠. 이게 대체 얼마짜리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시아는 순식간에 제 몸에 척척 걸쳐진 천 뭉텅이와 보석들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옷이 주인을 찾은 것뿐이죠. 아름다운 건 당신이에요, 레이디 켈튼.”

    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 그간 봉인이니 뭐니 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라크시스 옌은 원래 저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던 사람이었다.

    시아가 손발을 오그라뜨리든 말든 라크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아를 구경했다. 그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일 년 사이에 유행이 살짝 변한 것 같군요. 물론 당신은 뭘 입어도 어울리지만요.”

    “유행이 변했다고요?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이렇게 입고 있던 것 같았는데.”

    “재단사를 부르는 건 어렵지 않죠. 조만간 새로운 드레스를 맞추도록 합시다. 원한다면 블레어 스트릿에 방문해도 좋고요. 마침 당신을 에스코트할 신사가 여기에 있군요, 안 그렇습니까?”

    뭘 또 사겠다고? 에스코트가, 뭐?

    시아는 아연하여 멍하니 서 있었다.

    알현식 이후, 맨덜랜드에서 봉인을 찾는 데 집중하는 바람에 못 입은 드레스만 장롱 가득이었다. 포장을 뜯지 못해 상자째로 쌓여 있는 모자며, 장갑만 해도 수십 개인데.

    “제 눈엔 그게 그건데요, 뭘. 마도 시대엔 이런 옷들을 수선해서 살짝 다른 모양으로 입고 또 입고, 그랬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 시아. 날 속 좁은 신사로 만들지 말아요.”

    라크시스가 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가 할 말이 무엇인지 예상하고 있던 시아는 뒤로 물러서며,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심한 반항을 했다.

    “새 옷이 저렇게나 많은데 뭘 또 옷을 맞춰요. 새 옷을 하루에 하나씩만 입어도 3월이 다 지나갈걸요?”

    “전 당신이 일 년 내내 매일같이 새 옷을 입게 해줄 수도 있는걸요.”

    “한두 푼도 아니고, 이건 유행 좀 달라졌다고 바꿔입기엔 너무 비싼 옷이에요.”

    “시아, 잊었나요? 당신은 황제의 찬사를 받은 최고의 숙녀예요. 그런 숙녀분을 유행에 뒤처지게 두는 일이 벌어져선 안 되는 법이죠.”

    역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드레스를 가지고 한참을 쓸데없는 대결을 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나, 하고 기다리던 요르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시아. 전 그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많은 것뿐인데, 안 되는 걸까요?”

    시아에게 바짝 다가선 라크시스가 그녀와 닿을락 말락 한 거리를 두고선, 애원 조로 시아에게 물었다.

    저런 얼굴을 들이밀면 반칙이잖아.

    구슬프게 늘어뜨린 눈매로 서운함을 잔뜩 담아 입술을 비죽 내민다.

    결국 패배한 건 시아였다.

    애초에 승패가 명확한 대결이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얼굴에 약했다. 그 못지않게 준수한 미남들을 그간 숱하게 마주쳐 왔는데도, 이상하게 라크시스의 얼굴에는 유독 약했다.

    “…제가 졌어요. 라크 하고 싶은대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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