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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39)화 (239/292)
  • 239화 

    “시아. 당신이 지난번에 그랬었죠. 메이덜린에서 큰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고요.”

    “네, 그랬죠.”

    “실제로 메이덜린에서 시위가 일어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모르간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말이죠.”

    라크시스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신문 기사를 떠올리며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하지만 시위는 일어나기도 전에 흐지부지되었어요. 제국인 공장 노동자들이 함께 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던 가멜 출신 노동자들을 무장군 첩자라며 신고했거든요.”

    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메이덜린 시위는 제국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어린 아카데미생부터 교양 수업을 듣는 갈리프도흐 학생들까지, 법원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준 최초의 시위인 메이덜린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이후의 수많은 시위들도 벌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다니.

    시아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칠십 년 후의 원래 시대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버렸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와 함께 계속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이제 가멜인을 메이드나 하인으로 고용하려는 사람은 없어요. 공장도 마찬가지죠. 그들이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도둑질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라크시스는 발끝에 채는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옆쪽의 가게에는 핏자국이 남은 장난감들이 뻥 뚫린 진열장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던 토머스 부부는 가멜인 아이를 입양해 키웠다는 이유만으로 뭇매를 맞았죠.”

    미스터 토머스의 장난감 가게, 일명 토머스 아저씨의 가게. 이곳은 칠십 년 후에도 정교하고 아기자기한 장난감을 팔기로 유명한 가게였다.

    시아는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변해 버린 가게를 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카얄이 노리는 종말이란 게 이런 걸까요.”

    “그가 이런 상황을 유도했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종말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써가면서 벌인 짓이 식민지와의 불화일 리는 없을 테고요.”

    라크시스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잠시 말을 고르고는 결론을 말했다.

    “아마 리암 블레어의 재선 때문이겠지요.”

    “재선이요?”

    “맨덜랜드 사태 이후 노동당은 완전히 몰락했고, 남대륙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 보수당이 의회를 장악하기 시작했어요.”

    라크시스는 제국 전역이 보수당의 깃발 밑에 놓여 있는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말했다.

    보수당은 맨덜랜드 사태를 기회로 삼았다. 노동자들을 제국인과 비제국인으로 갈라 그들끼리 싸우게 하곤, 불안에 떠는 귀족들과 부유층에게 강력한 지배권을 약속하며 표를 얻었다.

    “리암 블레어는 재선에 성공할 겁니다. 그가 발자크 로스와 손잡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겠죠. 총리직에서 물러나면 남대륙 회사라는 조부의 유산을 포기해야 될 테니까요. 물론 자금을 여러 방법으로 세탁해 두어서 추적하기는 어려울 테지만요.”

    라크시스는 한껏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시아는 그의 마지막 한 마디에서 숨겨진 뜻을 해석해 냈다.

    “…하지만 라크는 그 어려운 걸 했다는 거잖아요.”

    추적하기 어려울 테지만, 자신은 해냈다. 라크시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예상이 적중한 듯 라크시스의 눈매가 접히며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해두기야 했죠. 하기야 제가 못 하는 일은 거의 없기는 합니다만. 웨스트스트릿 168번지에서 가져왔던 자료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리암 블레어의 반응이 예상과 다르더군요. 여러 방식으로 그를 떠보았는데, 돈에 초연한 사람처럼 굴었어요. 어쩌면 그가 총리직을 원하는 이유가 따로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대륙 회사를 통해 빼돌려 온 막대한 세금이 목표가 아니라고? 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리암 블레어가 재선을 원한다면 당연히 선대부터 비밀리에 모아온 자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단순히 직책에 대한 열망인가? 총리라는 의회의 수장직이 탐나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대륙과의 갈등을 과격하게 부추길 필요까지 있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원래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리암 블레어에게도 총리직을 갈망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있긴 할 것이다.

    물론 그 자리를 위해 가멜인은 물론 맨덜랜드까지 모두 희생시킨 그의 행동은 모두 잘못되었지만 말이다.

    “…레베카는 괜찮아요?”

    “미스 뮐러는 잘 지내는 듯하더군요. 미스 뮐러가 당신 앞으로 보낸 편지가 술란으로 온 적이 있었습니다.”

    라크시스는 레베카가 마음이 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마 그녀의 전시회 초대장을 시아가 거절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일 테다.

    거절하고 싶어서 거절한 것도 아닌데…….

    시아는 조금 억울했지만, 할 말은 없었다. 멋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 버린 건 자신이었으므로.

    “켈튼저로 다시 보내두었으니 아마 요르문에게 물어보면 편지의 행방을 알 겁니다.”

    “잘 지냈다니 다행이에요.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닐까 해서…….”

    라크시스는 시아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뮐러가의 상속자를 해할 만큼 담이 큰 자들은 없죠. 문제는 다른 이들이지만.”

    그때였다.

    “저기야, 저기!”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붉은 제복의 군악대가 빨간 점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황제 폐하다! 황제 폐하가 오신다!”

    가로등을 장식한 붉은 벨벳 휘장이 줄지어 펄럭였다.

    휘장의 중심부에 금실로 수 놓인 세페란테 황가의 문장이 을씨년스러운 공기를 뚫고 내려앉은 햇빛에 반짝였다.

    군악대를 뒤따르는 수백 마리의 말과 기다란 모자를 자랑하는 근위병, 황제의 관을 실은 마차가 차례로 거리를 가로지른다.

    “라크, 시작됐어요.”

    사방으로 날리는 꽃가루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신호들이 거미줄처럼 교차된다.

    맨덜랜드에 설치해 두었던 파장 탐지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수의 마류 탐지기가 일제히 작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카나를 뒤덮은 마류 탐지기는 행차 계획과 근위병의 배치를 바꾸지 못하는 시아와 라크시스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이번 행차에서 황제의 저격뿐 아니라 여덟 번째 봉인을 마주할 준비도 해야만 했다.

    맨덜랜드의 교회 부지에 묻혀 있어야만 했던 봉인은 놀랍게도 맨덜랜드 사태로부터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시아가 하필이면 3520년인 이 시점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 오늘 황제의 행차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는 사건이란 뜻이었다.

    황제의 목숨도, 예정된 역사도, 여덟 번째 봉인도 모두 이번 사건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아. 당신은 탐지기에서 신호가 오는지 잘 확인해 줘요. 전 지금부터 마법을 사용할 테니.”

    시아가 신호 수신기를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라크시스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왔다. 반달처럼 휘어진 푸른 눈동자가 얼음처럼 새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

    시아는 라크시스를 돌아보았다. 고대 마법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순식간에 아르카나를 뒤덮었다.

    “엄마아, 추워어.”

    “이리 와, 엄마가 목도리 꽁꽁 싸매랬잖니.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할 땐 잘못하면 감기 걸린단다.”

    곳곳에서 한기를 느낀 사람들이 몸을 문지르며 짧은 신음을 냈다. 시아는 목덜미가 오싹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겨울바람이라 착각한 것은 다름 아닌 라크시스의 마법이었다.

    기묘한 정적이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가운데, 라크시스의 마력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그가 찾는 것은 ‘쏜다’라는 생각이었다. 오늘이 정말로 황제가 죽는 날이라면, 황금 마차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저격수가 분명 근처에 있을 테니까.

    “라크.”

    “전 괜찮으니 당신은 탐지기를 봐줘요. 제가 거기까진 신경 쓸 수 없을 것 같으니.”

    겨울이나 다름없는 날씨였으나 라크시스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제아무리 고대 마법사라도 수천 인파의 머릿속을 한 번에 들여다보는 건 무리인 모양이었다.

    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자신도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차탈이 탄 마차가 지나갔다. 유리창 너머로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긴장감이 오고 갔다.

    차탈은 시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황궁을 나선 이래 지금까지 발견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단 뜻이었다.

    뒤이어 황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마차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멋스럽게 단장한 흑마와 기다란 술을 휘날리는 근위병들 뒤로 아무것도 모르는 황제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랑처럼 패인 주름마다 연륜과 이지가 깃들어 있는 얼굴. 사람들은 그들의 군주를 확인하고 열광하기 시작했다.

    올해의 행차가 유독 소란스럽고 열기를 띤 이유는 다름 아닌 가멜인에 대한 두려움, 나아가 절대적이라 믿었던 제국의 위상과 안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맨덜랜드 사태 이후 황제는 그 어떤 적도 제국을 침략할 수 없을 것이라 말했고, 위대한 붉은 군대가 시민들을 지킬 것이라 약속했다.

    시아는 알현식 날 자신을 압도하던 알리나를 떠올렸다. 부드러운 미소와 선명하던 눈빛. 그날의 시아는 알리나 황제가 왜 후대까지 위대한 군주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이젠 모르겠지만.’

    가엾은 아이를 위해 노예제를 폐지했던 황제는 시아가 없었던 반년 사이, 남대륙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화폐 개혁 이후 황제와 줄곧 반목해 왔던 의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황제의 편을 들었다.

    알리나는 발자크의 알현 신청을 꾸준히 허가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행차의 위험성을 황제에게 알리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만일 황제 암살 사건에 카얄이 연루되어 있다면, 황제에게 알린 정보가 모두 카얄의 귀에 들어가게 될 테니까.

    시아는 손에 쥔 신호기를 내려다보았다. 봉인의 이상 마류나 저주의 기운을 감지하면 울리게 되어있는 신호기는 황제의 마차가 시아의 앞을 지나갈 때까지도 계속 잠잠했다.

    ‘역시 오늘이 아닌 걸까?’

    알리나 황제를 저격한 암살자의 배후는 칠십 년이 지난 후에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자마자 혀를 깨물고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그렇다는 것이지, 황제의 안위와 국가의 안보가 달린 문제였으니 실제론 암살자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정도는 알아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시간 여행자인 자신이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시아는 신호기를 움켜쥐며 제게서 멀어지는 황제의 마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시아, 저깁니다.”

    내내 마법에 집중하고 있던 라크시스에게서 처음으로 소리가 들렸다. 그는 미동 없이 시아를 끌어당겨 턱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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