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틀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12월의 첫 번째 날이 밝았다.
“와, 사람이 많긴 하네요.”
시아는 신세계를 본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인파에 묻히려는 의도 반, 활동성을 챙기려는 의도 반으로 그녀는 오늘도 신문 배달원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라크시스가 눈썹을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기로 유명하긴 한 행사입니다. 모르간 시민이라면 평생에 한 번쯤은 꼭 구경하게 되는 행차라고 합니다만, 혹시 와본 적은 없었습니까?”
“있기야 하죠. 저도 어릴 땐 행차를 구경 나왔어요. 헤이든이 데리고 와줬죠. 요르문 님은 늘 의회에 가셨지만요.”
“하긴 ‘로드’ 켈튼은 빠질 수 없었겠죠. 이런 날까지 의회 출석을 게을리했다간 영영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물론 요르문이 연금을 아쉬워할 사람은 아니지만요.”
라크시스가 덧붙인 말에 시아가 키득거렸다. 평소 의회 나가기를 극도로 귀찮아하던 양부 요르문이 개회식을 위해 오래된 붉은 예복을 입고 흰 가발을 뒤집어쓰며 오만상을 쓰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요르문 님이 개회식에 불참한 건 이번이 처음일 거예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겁니다. 본인을 대신할 오토마톤을 의원석에 세워두는 것보다 개회식에 직접 참석하는 것이 덜 귀찮다는 것을 요르문도 알았을 테니까요.”
시아와 라크시스는 국회의사당인 알펜하임 궁과 황궁을 잇는 아르카나의 대로에 있었다.
두 사람이 이 북적이는 인파 속에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알리나 황제의 암살 사건을 막기 위함이었다.
“결국 황제 폐하를 구하러 왔네요.”
시아는 허공에 한숨을 흩뿌렸다.
팔자에도 없는 마도 시대의 신문 배달원 차림을 두 번이나 하면서, 황제를 저격수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니.
그것도 저격으로 죽게 될 운명인 황제를.
“…후회하십니까?”
“후회라기보단, 뭐랄까. 제가 정말 과거를 바꿔 버려도 되나 싶은 생각은 들긴 해요.”
시아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오늘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오늘일 수도 있잖아요.”
황제는 행차 도중 저격을 당한다. 하지만 시아는 그 사건이 정확히 몇 년도에 벌어진 건지 기억하지 못했다.
황제의 알펜하임 궁 행차는 매년 12월 1일 의회가 개회되는 날에 이루어지는 연례행사로, 하원이 생기고 지금과 같은 형태의 의회가 성립된 이래 한 번도 빠짐없이 거행된 행차다.
차탈은 3522년 이전의 행차에서 황제가 저격당한다면 지금이 가장 유력한 시기일 거라 주장했다.
그는 이틀 내내 황제를 구해야 한다며 시아와 라크시스를 닦달했다. 그런 차탈을 무시할 수도 있었으나, 시아는 어쨌든 황제의 행차가 여덟 번째 봉인과 관련이 있으니 시간 여행이 이렇게 시작된 게 아니겠냐며 차탈의 뜻을 따라주기로 결정했다.
라크시스는 할 말이 많은 듯한 눈으로 시아를 내려다보다가 말았다.
그녀가 겪는 혼란을 자신이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었다. 라크시스 옌은 현재의 사람이고, 시아 켈튼은 칠십 년 후의 사람이니까.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건 봉인입니다. 황제 폐하가 아니라.”
시아가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뉴지 캡 밑으로 보이는 자줏빛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 결과가 어떻게 되든 너무 괴로워 말아요. 설령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그저 당신이 알던 역사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일 테니까.”
“라크는 황제 폐하를 구하고 싶은 거죠?”
그러자 라크시스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구하고 싶다기보단 당연한 일이라고 느낍니다. 어쨌거나 지금의 전 제국인이고, 황제 폐하는 제국의 수장이니까요.”
그때 라크시스의 손안에서 붉은빛이 반짝였다.
“라크, 대공 전하인가 봐요.”
통신 기능이 달린 작은 마도구였다. 붉은빛을 내는 버튼을 누르자마자 인사를 생략한 물음이 스피커를 닮은 마도구을 통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 점검은 다 끝났나? 마류 탐지기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고?
“당연한 말씀을. 전하께선 황제 폐하가 타실 마차나 잘 살펴보시지요.”
- 안 그래도 확인하였네. 별 이상은 없긴 해. 혹 그대 정도의 마법사만이 감지할 수 있는 저주 같은 건 없나?
“전하께서 이리 말씀이 많으신 분이셨는지 몰랐습니다만. 마치 방울새가 귓바퀴에 앉아 울어대는 듯 귀가 아프군요.”
차탈의 목소리는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 속에서도 선명히 들렸다.
시아는 뉴지 캡을 푹 눌러쓰며 곤란하다는 듯 라크시스의 손바닥 위에 놓인 마도구를 가리켰다.
- 그대는 정말이지 이 나라 대공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군.
라크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갯짓을 따라 그의 콧대에 얹힌 안경도 조금씩 흔들렸다.
시아와 라크시스가 진저리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탈은 꾸역꾸역 제 할 말을 했다.
- 아, 로드 켈튼은 무사히 공사 중인 동관으로 들어갔어. 미스터 비렌체도 말이야. 분장한 걸 보니 감쪽같이 속겠던데? 아마 지금쯤 감독관에게 붙잡혀 인부들과 함께 망치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밖에 새로운 정보는 없습니까?”
요르문의 허름한 꼴을 떠올리며 웃던 차탈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곁에서 들리는 차분한 목소리가 익숙한 것을 보니 올가 웰링턴이 차탈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발자크는 블레어가의 저택에 계속 머무르는 것 같네. 그곳에 메이드로 위장시켜 보내놓은 마법사들이 소식을 전해 왔는데, 총리는 알펜하임 궁에 가 있고 발자크는 방금 막 아침을 먹었다고 하더군.
“방심하진 마십시오. 대공 전하께서도 그자의 저주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행차가 시작되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사람들은 꽃가루가 든 바구니와 신문을 들고선 제복 경찰들이 가로막고 선 대로를 향해 목을 빼고 있었다.
겨울로 들어서기 시작한 황량한 거리 풍경과는 사뭇 대조되는 분위기였다.
매년 있어 왔던 의회 행차인데도 사람들은 이번 행차에 유독 열광하고 있었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설렘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 너머로 유리창이 깨지고 출입문이 부서진 상점들이 줄지어 보였다. 계란과 오물로 지저분해진 벽이 황량한 풍경에 흉흉함을 더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런 상점들은 없었다는 것처럼, 사람들은 잔뜩 들떠선 행차할 황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탈은 마도구 너머로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제국의 위대함을 부르짖는 소리, 황제에 대한 경외. 본토를 공격해 왔던 검둥이들에 대한 증오, 이웃에 대한 배신감.
라크시스에게서 받은 자그마한 마도구는 그 모든 소리를 차탈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윽고 보좌관 제프리가 찾아와 황제가 대공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차탈은 훈장이 가득한 황실의 오랜 예복을 갖춰 입으며, 마도구 너머에 있을 고대 마법사를 향해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 …옌 경을 믿겠네.
“대공 전하께서 이리 말씀하시는 날이 다 오는군요.”
차탈에게서 더 이상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먹먹한 잡음이 들리다 끊어진 것으로 보아 그의 주머니에서 전원이 꺼진 듯했다.
라크시스도 마도구를 코트 안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못 본 새에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네요.”
“달라졌다기보단 원래대로 돌아온 것에 가깝지만요. 애초에 대공은 남을 해코지할 성격도 아니었습니다.”
도수 없는 안경알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반년 전, 맨덜랜드에서 시아가 위장용으로 썼던 바로 그 안경이었다.
그러나 시아는 라크시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시아를 바라보다가 사람들로 꽉 찬 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실 이번 대 황제는 알리나 폐하가 아닌 차탈이었어야 했습니다.”
뭐라고?
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 치곤 어마무시한 내용이다.
“노든 대공은 황좌를 물려받을 자에게 수여되는 작위이죠. 차탈은 전대 황제인 그의 아버지에게 열다섯에 대공 작위를 받았고요.”
노든 대공이 황제 또는 황위 계승자에게 내려지는 작위라는 건 시아도 알고 있었다. 칠십 년 후의 헬릭스도 노든 대공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야사는 아카데미에서도 갈리프도흐에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차탈이 아닌 그의 누이인 알리나가 황제가 되었죠. 어떻게 생각하면 대공도 불운하게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군요.”
“와, 까딱 잘못했다간 불경죄로 잡혀갈 만한 이야기인데요?”
시아가 과장스럽게 놀라자, 라크시스는 피식거렸다.
“고대 마법사를 불경죄로 잡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죠.”
순간, 거리가 시끄러워졌다. 시선을 돌리자 풀어져 있던 경찰들이 바짝 고개를 추켜세우는 모습이 보였다. 황제가 마침내 황궁을 나선 모양이었다.
아스라이 들리는 군악대의 소리에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축제나 다름없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시아의 시선은 그 너머의 그늘을 보고 있었다. 아르카나는 그녀가 처음 시간 여행을 했던 그 날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황량하네요.”
라크시스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맨덜랜드 사태 때문이죠.”
반년 전의 그 날 이후, 맨덜랜드는 꼬박 사흘 밤낮을 불탔다. 제국군과 모르간 경찰이 급히 출동하여 현장을 진압한 후에야, 맨덜랜드는 잿더미가 된 채로 잠잠해질 수 있었다.
“맨덜랜드를 뒤덮은 화마가 가멜 때문이란 기사가 났었습니다.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가멜 무장군이 밤사이에 상륙해 맨덜랜드를 공격했다는 것이죠.”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낸 사건의 주동자는 다름 아닌 가멜의 무장 저항군이었다.
제국군에게 붙잡힌 무장군 주동자가 가멜을 약탈하고 점령한 오만한 제국인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맨덜랜드를 불태웠다고 털어놓았다. 이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지자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불이 났던 날, 호텔에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던 라크시스는 도시를 공격하는 가멜인들이 유령선에 실려 온 노예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저주에 걸린 채 유리창을 부수고 기름을 훔쳐내 사방에 뿌리고 불을 붙였다.
라크시스처럼 한 번이라도 그들의 헐벗은 행색을 보았다면, 누구도 그들이 무장한 군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밤중에 느닷없이 재앙을 맞이하게 된 맨덜랜드의 시민들은 그들이 군인인지 아닌지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화마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신문을 통해 가멜 무장 저항군 수장으로 알려진 자의 말을 전해 듣고 분노하여 침략자들에게 복수하러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복수한 건, 그들과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이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