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대공이 광룡이나 종말에 대해서도 알아요?’
‘당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사실 대공이 시간 여행이 가능하단 사실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차탈은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뻔히 알겠다는 눈치였다.
“그간 믿지 않았던 건 맞네. 오늘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그대를 보고 뒤늦게 확신한 것이고.”
3520년의 대공의 서재로 시간 여행을 한 이래 차탈이 처음으로 굳은 표정을 풀었다. 시아의 당황한 모습 때문이다.
차탈은 삼 년 전, 마도구 상점가에서 벌어진 소동을 회상했다.
“그대가 가져온 화폐 때문에 로튼데일이 한동안 얼마나 떠들썩했는데. 라크시스 옌이 아니었다면 그 소란을 막을 수 없었을걸. 안 그런가, 옌 경?”
차탈은 뒷말을 덧붙이며 라크시스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라크시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아는 변명하려다 결국 포기했다. 늘 그렇지만, 이미 들켜 버린 일을 감추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었다.
시아는 화제를 돌렸다.
“아까 라크가 대공 전하께 협조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요?”
올가가 대답했다.
“고대 마법사께선 대공 전하의 발작을 막고 저주를 푸는 데에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그 덕에 전하께선 목숨을 보전하셨죠.”
라크시스가 비스듬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실 그것 말고도 수상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서 말입니다.”
“뭔데요?”
“발자크 로스는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있어요. 그것도 꽤 자주 찾아뵙는다더군요. 그가 무슨 속셈으로 황제를 만나는지 알아봐야 해서 말입니다.”
차탈이 조소했다.
“내게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러니 알리나에게 붙은 걸 테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거의 차탈은 카얄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카얄은 권력을 가진 자의 비틀린 욕망이 얼마나 맹목적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 욕망을 부추겨 지금껏 원하는 바를 이루고 있었다.
“예컨대 저 요란하고 쓸모없는 공사를 벌이기 위해선 황궁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을 테니까.”
차탈은 진절머리를 치며 창밖으로 보이는 황궁을 가리켰다. 거리가 있어 귀가 쨍할 정도의 소음까진 아니었지만, 공사하는 소리라 그런지 시끄럽긴 시끄러웠다.
“저것도 발자크 로스가 알리나와 가까워지며 벌어진 일이야. 올가가 그러더군. 아무 문제도 없었던 마력 동력원을 수리해야 한다며 알리나를 부추겼다고.”
“그러니까 저게 황궁의 노후화된 마력 동력원 교체 공사란 말이죠?”
“다시 말하지만 내가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황궁엔 아무 이상이 없었어.”
시아의 입이 다물리며 얼굴에 순식간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라크시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럽니까, 시아.”
“…저 공사는 원래 대공 전하께서 추진하셨던 공사였어요.”
차탈이 기가 막히다는 듯 그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정확히는 대공 전하께서 황제가 된 후에 말이지만요.”
“하, 나중엔 내가 노망이라도 들게 되나 보지? 아니면 먼 미래엔 정말로 황궁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는 소린가?”
“정말로 이상이 생겼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중요한 건 황궁 보수 공사 중에 큰 사고가 난다는 거예요. 황궁 동관이 무너져서 사람이 많이 죽었거든요.”
황궁이 무너져 사람이 죽는다. 고작해야 건물 보수 공사에 불과한 일을 칠십 년 후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건, 그것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참사였기 때문이다.
차탈은 그런 불안전한 공사를 제가 추진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 얼굴을 서서히 일그러뜨렸다.
동관엔 내무부를 비롯한 수많은 부처가 있다. 그곳이 무너졌다면 단순한 인명 피해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관이 무너졌다는 소리보다 더 충격적인 건 시아의 다음 말이었다.
“그리고 대공 전하께선 젊은 나이에 황위에 오르시게 돼요.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는 행차 도중 저격을 당해 돌아가시게 되거든요.”
“이런 불경한!”
차탈이 노호하며 테이블을 내려쳤다. 올가가 그를 말렸으나, 차탈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감히 황제의 죽음을 입에 올리다니. 누이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자신더러 황제가 된다고 하다니.
“죄송해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역사는 이게 전부인 걸요.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셨을 때 조지 황자 전하께선 나이가 너무 어려서, 대공 전하께서 대신 황위에 오르게 되셨거든요.”
그러나 이 사실을 말해 준 시아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녀는 단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었던 것일 뿐.
차탈은 결국 자신이 성급히 분노했음을 인정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서, 그 행차가 어떤 행차인가.”
“그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3522년 이전이에요. 대공 전하께서 17대 황제가 되신 것 말이에요.”
왜 하필 3522년 이전인가. 시아 켈튼은 그에 대한 답을 주진 않았다. 차탈도 그 이상 시아에게 묻진 않았다.
“레이디 켈튼, 분명 행차라고 했지.”
황실의 단발성 행사와 연례행사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황제가 거리로 나서 직접 제국민들을 만나는 행차는 그 규모와 비용이 상당한데다 황제가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에 쉬이 주최할 수 없었다.
“…젠장.”
차탈은 벌떡 일어났다. 그가 창가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당장 이틀 후면 의회가 열려. 황제는 무조건 의회장으로 행차할 수밖에 없다고. 황제의 허가가 있어야 의회가 열릴 수 있으니까.”
그의 시선이 황제가 있는 황궁에 머물렀다. 동관이 무너진다면 황제도 사고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문제의 행차가 시작된다면…….
차탈은 신경이 고장 난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어떤 행차에서 알리나가 저격당하는지 모른다고 했잖아. 그 말인즉 알리나가 죽는 날이 당장 이틀 후가 될지도 모른단 소리지.”
라크시스는 그런 차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펜하임 궁으로의 행차 준비는 이미 끝났을 겁니다. 경비 인력 배치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대는 이 나라 황제가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있자고 하는 건가?”
“언제부터 황제 폐하를 그리 각별하게 여기셨다고 그럽니까.”
고저 없이 무덤덤한 라크시스의 목소리가 심장을 찔러댄다. 차탈은 반박할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자신은 알리나를 해코지하면서까지 황좌에 오르고 싶어 했고, 자신이 발자크 로스에게 놀아나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건 눈앞의 재수 없고 오만한 고대 마법사였다.
차탈은 침음을 삼키며 속내를 토해냈다.
“…황위를 얻더라도 내 손으로 얻어낼 것이다. 알리나와 반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직접 누이를 탑에 가두는 한이 있어도, 남의 손에 의해 죽는 꼴은 볼 수 없어.”
그렇게 말한 후 차탈은 자신의 추한 진심을 드러낸 것에 수치스러워했지만, 시아와 라크시스는 이것이 차탈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가 그동안 라크시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굴긴 했지만, 시아와 라크시스는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두 사람은 피식 웃어버렸다.
이토록 분위기가 심각한데도 눈빛만 보면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니.
라크시스는 시아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한 건 발자크 로스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단 사실이군요.”
“제가 3521년도, 칠십 년 후도 아닌 3520년의 가을에 떨어진 이유도 분명 있을 거고요.”
시아의 시간 여행의 본질은 오직 하나였다. 여덟 번째 봉인. 어쩌면 마지막 봉인일지도 모를 그것이 이 근처에 있는 것이다.
불안정한 봉인은 칠십 년 후를 살아가는 시아 켈튼을 필요로 했고, 그녀의 운명은 이제 봉인과 함께 시간선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시아가 속삭였다.
“모든 게 뒤바뀌고 있어요. 제가 알던 과거도, 일기장의 사건들도 모두요.”
“그렇지만 당신은 멈추지 않을 테죠.”
라크시스는 시아를 내려다보았다.
원래의 시대로 돌아가지 못했는지,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의 슈트 차림 그대로인 시아는 반년 전의 재앙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옷 여기저기에 그을린 자국이 가득했다.
탄 내가 날 것 같은 머리카락이며 꾀죄죄한 몰골은 숙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라크시스는 그 속에서 의지와 결심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발견했다.
아름답다. 현자처럼, 때로는 개척자처럼 빛나는 와인빛 눈동자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라크시스 옌이 처음으로 시아 켈튼을 인식하게 만든 바로 그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짝은 체념이 어린 것 같지만, 누구라도 도시 전체가 불타던 현장에서 난데없이 반년 후의 적진(지금은 더 이상 대공의 서재가 적진이 아니었지만)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면 지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아는 상황에 적응하고 있었다. 과거야 어떻게 되든 내버려 두어도 상관없을 텐데도 그녀는 기꺼이 종말로 내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었다.
열차에 탄 수많은 이들을 살려보고자, 고장 난 브레이크를 뜯어내고 새로운 선로로 달려보고자.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내내 이어진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시아는 멈추지 않았다.
라크시스가 처음으로 인식한 시아 켈튼도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세월에 마모된 마법사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던 유일한 존재.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나?”
차탈이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 시아는 그를 잠시 흘긋거리다 다시금 라크시스와 눈이 마주치곤, 키득거렸다.
“라크도 함께 해줄 거죠?”
라크시스의 눈이 조용히 커졌다. 시아는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과 함께였고, 자신도 늘 그녀와 함께였으니.
라크시스는 부드럽게 시아의 손을 감쌌다. 그러곤 시아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시작했다.
“당연한 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