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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36)화 (236/292)
  • 236화 

    “…명 따르겠습니다. 대공 전하.”

    잠시 멈춰 있던 귀부인이 차탈의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꼿꼿한 모습이 초췌한 대공과는 사뭇 달랐다.

    시아는 차를 홀짝이며 귀부인을 흘끔거렸다. 그녀는 다름 아닌 웰링턴 백작 부인인 올가 웰링턴이었다.

    ‘황제의 시녀가 대공의 가신이었다니.’

    세상에 믿을 것 하나 없네.

    황제의 최측근이 대공의 첩자라니. 이 사실을 알고도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시아는 얼마 안 가 라크시스가 폭로한 진실을 듣곤 올가의 치밀함과 모략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러니까, 레이디 웰링턴이 황제 폐하를 불임으로 만들려 했다가 실패했고 산파까지 매수했었다고요?”

    “폐하께서 눈치채고 절 부르지 않으셨다면 조지 황자 전하는 빛을 구경하지 못하셨겠지요. 물론 황제 폐하도요.”

    라크시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그는 조지 황자를 낳고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꺽꺽거리던 알리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는 텅 빈 산실에서 홀로 죽어가고 있었고, 순간의 판단으로 고대 마법사를 불러 가까스로 살 수 있었다.

    “혈육의 정도 황좌 앞에선 무의미한 것인가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대공 전하.”

    라크시스의 조소에 차탈은 딴 곳을 보며 움츠러들었으나 올가는 표정에 변화 한 점 없었다.

    “죄를 물으시려거든 제게 물으시면 되고, 돌팔매질을 하시려거든 저를 광장에 세우시면 됩니다.”

    “참 대단한 충심이군. 레이디 웰링턴.”

    “그만들 해. 지금 이러자고 여기 모여 앉은 게 아니지 않나.”

    결국 차탈이 한숨을 쉬며 백기를 들었다.

    “내가 죽일 놈이야. 누이를 해하려 했던 내가 죄인이라고. 됐나? 제국의 황제를 해코지하려던 건 바로 나였다고.”

    대공의 고백으로 날카로워지던 분위기가 가라앉긴 했으나, 시아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차탈과 알리나는 각별한 사이의 남매였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차탈이 라크시스를 오랫동안 견제해 왔던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목표가 손위 누이를 죽이고 황좌를 차지하려던 것임은 처음 알았다.

    알현식 날의 섬뜩하던 차탈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의 차탈은 정말로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시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날 차탈에게 손목을 잡히고 희롱을 당하는 것 이상의 해코지를 당하지 않았던 건 천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정리하자면 레이디 웰링턴이 라크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는 거잖아요. 대공 전하께서 로드 발자크 로스를 친구로 여기며 알고 지내신 이후 여러 가지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셨는데, 어느 날부터 그 정도가 심해져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기게 되었다고요. …예를 들면 절 위협하셨던 거라든지요.”

    시아는 짧은 시간 동안 몰아치던 대화에서 정보를 하나씩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역사와 대공의 그간 행보가 하나씩 맞물리기 시작했다.

    “로드 로스와 각별하게 지내면서 그간 해오던 업무도 미루시곤, 언젠가부터 모든 일에 흥미를 잃으시더니 최근엔 발작 증세까지 겪으셨다는 거죠?”

    올가가 조용히 첨언했다.

    “문제는 전하께서 그간 해오시던 일이 다름 아닌 제국을 위협하던 저주의 마법사를 쫓는 일이었다는 것이었지요. 한때 황궁에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니는 마법사가 있었거든요.”

    차탈은 마른세수를 해대며 바싹 마른 입으로 변명했다.

    “저주를 쓰는 검은 마법사였지. 난 단번에 알아보았어. 그 마법사가 사멸된 고대의 마법을 쓰면서 제국을 활보하고 있단 걸 말이야. …그때의 난 옌 경과 로드 켈튼을 의심했었네. 고대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황궁이며 클럽을 돌아다닐 만한 사람은 옌 경이나 옌 경과 어울려 다니는 로드 켈튼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사실 확인도 없이, 제국에 오랫동안 헌신해 온 마법사를 의심하고 감시해 오신 것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라크시스의 매몰찬 비난에 차탈은 이제 더 이상 차릴 체면도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하네. 나의 명예를 걸고 진심으로 사죄하지.”

    가을날의 쌀쌀한 공기가 서재를 조용히 휘감았다. 벽난로의 불은 대공의 속도 모르고 주홍 불꽃을 이리저리 팔락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차탈의 대답을 곱씹던 시아가 퍼뜩 입을 열었다.

    “검은 마법사라니, 잠시만요.”

    “시아. 눈치채셨습니까.”

    라크시스는 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시아는 라크시스가 바라던 정답을 정확히 짚어냈다.

    “…카얄이었군요. 라크, 대공 전하가 쫓던 검은 마법사가 카얄 맞죠? 재키 레이븐의 악명에 숨어서 미스터 비렌체를 공격했던 바로 그 검은 괴한 말예요.”

    시아는 라크시스의 침묵 속에서 긍정을 읽어냈다.

    카얄이 이런 식으로 대공과 얽혀 있었다니. 시아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전하, 그 사람은…….”

    그러나 차탈은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이젠 알아. 로드 발자크 로스가 그 옛날의 검은 마법사이자 이단의 수장이라는 것 말이지. 그는 일부러 내게 접근한 거야. 내가 자신을 추적하길 포기하도록 말이야.”

    이미 알고 있었나.

    시아가 없던 반년 사이에 라크시스와 차탈이 모종의 관계를 맺었다는 건 확실한 모양이다. 그녀와 라크시스만이 알고 있던 정보의 상당 부분을 차탈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올가가 읊조리듯 말했다.

    “실제로 재키 레이븐 사건 이후 주군께선 검은 마법사를 더는 쫓지 않으셨습니다. 옌 경을 직접 감시하는 일도 많이 줄어드셨죠.”

    “대신 발자크는 날 이용하기 시작했지. 지금 생각하면 다무스의 귀족임을 자처한 그가 제국 사교계에 곧바로 뛰어들지 않고 나의 사냥에만 어울려 준 것도 모두 내 눈과 귀를 막아버리기 위함이었던 것 같고.”

    발자크는 차탈과 친해지며 황궁에 자유로이 출입할 권한을 얻었다. 제국은 무엇이든 관습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였고 황족의 총애를 받는 자들은 옛날부터 황궁 출입이 관습적으로 허용되었기에, 사람들은 대공이자 황제의 동생인 차탈이 가까이 두는 다무스의 귀족을 아무런 의심 없이 황궁에 드나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올가 웰링턴이 발자크를 수상히 여겨 하버마일 숲에 설치된 마력막 생성기를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차탈은 발자크 로스가 제게 저주를 사용했다는 사실은커녕,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도 영원히 몰랐을 터였다.

    “발자크가 언제부터 내 정신을 장악했는진 모르겠어. 어쩌면 까마귀를 통해 처음으로 검은 마법사를 발견했을 때부터일지도 모르겠군. 내가 자만했던 거겠지. 옌 경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마법으로 압도당하리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주고받던 대화가 어느새 독백으로 변했다. 차탈은 그간 자신이 놓치고 지나온 것들을 짚어 나가고 있었다.

    라크시스 옌을 쫓느라, 그에 대한 증오만을 행동의 연료로 쓰다가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간 진짜 적, 발자크 로스.

    차탈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속이 쓰라렸다.

    “난 처음부터 발자크의 손에서 놀아났던 거야. 이단을 비밀리에 쫓고 있는 걸 이단의 수장에게 그대로 말해 버렸으니. 놈은 날 얼마나 비웃었을까.”

    뭐?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소를 흘리는 차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공이 이단을 쫓고 있었다고? 대체 언제부터?

    “왜, 그대도 내가 웃긴가 보지?”

    시아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녜요, 그런 게 아니라. 대공 전하, 언제부터 황혼 국교회를 쫓으신 거예요? 그걸 지금껏 혼자서 하고 계셨다고요?”

    “옌 경과 그대가 지나간 자리엔 늘 이단이 있더군. 재키 레이븐도, 다무스도, 로렌시아 호의 저주도 말이야. 아까 말했었잖나. 처음엔 옌 경을 검은 마법사라고 생각했었다고. 두 사람을 이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더군. 모르간 경찰의 간부도, 내무부의 상당수도 이단이었고 그대들은 그저 불행한 사건에 줄곧 엮일 뿐이었지.”

    그가 이단을 쫓고 있었다니. 시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껏 차탈을 경계하기만 했는데, 어쩌면 우린 처음부터 적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른다.

    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차탈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무엇일지 가늠이 되었으나 감히 멋대로 추측할 수 없었다.

    “아까 혼자서 이단을 쫓았냐 물었지. 맞아. 황혼 국교회를 조사한 건 나 혼자였어. 제프리와 올가만이 날 도왔고. 하지만 그것만으론 이단은커녕 그대들의 뒤를 캐내는 것이 무리였지.”

    가느다란 한숨이 잠시 말을 끊었다.

    “그래서 난 조언을 구했네. 이단과도, 제국과도, 고대 마법사와도 무관할 거라 여긴 발자크 로스에게 말이야.”

    아…….

    시아는 그제야 차탈이 한순간에 망가져 버린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카얄이었다.

    케르딕 7세와 이자벨라 황녀를 갈라놓고, 에드먼드와 아스타의 눈을 멀게 한 발자크 에이클레이. 유망하던 황위 계승자 차탈 세페란테를 나락으로 끌어내린 발자크 로스.

    “그래서 그가 날 이 꼴로 만든 거겠지. 내 명예를 실추시켜서 두 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내게서 앗아간 것들을 모두 알리나의 기반에 실어서 말이야.”

    빛을 잃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건 생각보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시아는 모든 걸 털어놓는 대공이 마치 빛바래고 먼지 쌓인 그림 같다고 느꼈다. 과거의 영광이 스러져간 버려진 성채.

    차탈의 낯을 얇게 뒤덮은 감정은 다름 아닌 회한이었다.

    “레이디 켈튼. 이럼에도 내가 미래에 황제가 되던가? 칠십 년 후의 난 무엇으로 남아있지?”

    “…알고 계셨어요?”

    시아는 라크시스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그의 미묘한 표정을 보건대 차탈이 시간 여행자의 존재를 확신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시선 사이로 무형의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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