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황제 폐하께선 여전히 강녕하시지요?”
“왜, 내가 알리나를 죽이기라도 했을까 봐?”
“죄송해요. 그런 뜻으로 여쭌 건 아니었어요.”
제 눈치를 보며 움츠러드는 시아 켈튼은 정말이지 낯설었다. 로렌시아 호에서나 알현식에서나 단 한 번도 이 나라의 대공에게 진 적이 없던 여자인데.
제게 겁을 먹었나 싶었지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그녀는 마치 낯선 세계에 뚝 떨어져 주위를 경계하는 짐승처럼 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군. 라크시스 옌과 술란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런 차림으로 나타난 것도 이상하고.”
“제가 술란에서 잘 먹고 잘살았다고요……. 아, 그런 거구나. 네, 그랬죠. 오랜만에 수도에 올라왔는데 스크롤을 잘못 쓴 바람에 전하께 폐를 끼치고 말았네요.”
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차탈의 눈이 가늘어졌다.
“툼르칸 제도는 어떻던가. 난 한 번도 남부에 가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시인들이 노래하는 것처럼 하얀 모래 위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나?”
“그으…럼요. 뱃놀이를 하기에도 제격이죠. 술란은 아무래도 상선이 매일같이 드나들다 보니까요. 한가롭게 경치를 구경하려면 제도의 작은 섬으로 가는 게 좋을 거예요.”
“라크시스 옌은 잘 지내겠지? 마지막으로 봤을 땐 그대와 함께 남부에 간다며 아주 들떠 있던데.”
“…아주 잘 지내죠. 라크의 안부를 대공 전하께서 물어보실 줄은 몰랐지만요.”
차탈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라크시스 옌은 남부에 내려가지 않았다. 술란에 갔다는 헛소문을 흘리곤 저택에 틀어박혀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라크시스 옌이 들떠 있다고? 하! 라크시스 옌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았다면 절대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레이디 켈튼, 그대는 지금 본인이 이상하단 걸 알고 있긴 한가?”
“제가요……? 하하…….”
“그대가 어떤 소문을 달고 술란으로 내려갔는지는 아나? 그대는 병에 걸렸다고 했어. 물론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아차. 대공이 날 떠보고 있었구나.
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흥분한 차탈이 테이블을 내려치곤 벌떡 일어났다.
“레이디 시아 켈튼, 그대는… 큭!”
“대공 전하!”
대공이 고꾸라졌다. 발작 증세가 있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는 신음하며 손발을 덜덜 떨었다.
시아는 재빨리 테이블과 소파를 모두 밀어 치웠다. 그녀가 옮길 수 있을 정도로 가구가 가벼운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도착했을 때에도 차탈은 발작을 막 겪은 뒤라고 했다. 설마 뇌에 문제가 생긴 걸까? 발작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머리에 생긴 이상 때문이다.
‘지난 반년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대공 전하, 잠시 실례 좀 할게요.”
남자가 눈을 뒤집은 채 부르르 떨었다. 시아는 차탈의 목을 조이던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었다.
너무 길게 이어지지 않는 이상, 발작 증세는 알아서 멈출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게 나았다. 시아는 혹시라도 기도가 막힐까 차탈의 고개를 돌려두었다.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대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대공의 숨이 금방 편안해졌다. 경련이 멈췄나 싶어 그의 호흡을 살펴보려는데, 그가 번쩍 손을 들어 시아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 이상해. 내가 착각한 게 아니란 말이야. 마력이 옮아가기라도 하는 건가? 그런 이론은 들어본 적도 없어.”
“대공 전하.”
차탈의 눈엔 어느새 이지가 돌아와 있었다. 안색이 깨끗해진 게 방금 전까지 쓰러져 경련하던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차탈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변 가구들이 죄 밀려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곤 옷깃이 열려 훤히 드러난 제 쇄골을 가리켰다.
“이건 그대가 푼 건가?”
그러면서 차탈은 시아를 유심히 살폈다. 상황이야 어쨌든 차탈의 기준에서 시아는 ‘숙녀’였다. 언질도 없이 대뜸 찾아와 발작하는 남자의 옷깃을 푼다, 라. 사실만 놓고 보면 꽤나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아는 수백, 수천 명의 환자 중 하나를 보는 듯한 눈길로 차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겠다는 듯 대답을 줄줄 읊었다.
“기도 확보가 중요하니까요. 발작 증세는 얼마나 오래전부터 겪으셨어요? 다행히 아주 심각한 건 아닌데… 이 정도면 치유사의 마법으로 충분히 회복될 거예요. 제 생각에 마력이란 건 신경 치료에 효과적인 것 같거든요. 혹시 모르니 항상 곁에 사람을 두세요. 발작 자체보다는 넘어지면서 다치는 게 더 큰 일이거든요. 보좌관이라든가, 대공 전하께는 그런 사람들 많잖아요.”
“하하……. 의술사라고 하더니 거짓은 아니었나 보군.”
그 말에 시아가 경멸 어린 눈으로 차탈을 잠시 응시했다. 차탈은 콧잔등을 찡그리다 결국 사과했다.
“엄한 오해를 한 건 아니야. 부디 내 무례를 한 번만 용서해 주게.”
“일단은 환자니까… 봐 드릴게요.”
차탈은 너털웃음을 쳤다. 환자 취급이라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대공인 그를 진짜로 환자 취급한 사람 또한 그녀가 처음이었다.
역시 시아 켈튼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내가 그대에게 이것저것 캐물을 입장이 아니란 건 알고 있어. 하지만 한 가지만 묻겠네.”
차탈은 시아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반대쪽 손으로 시아의 어깨에 내려앉은 가느다란 무언가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것은 은을 녹여 만든 것처럼 길고 새하얀 은발 한 가닥이었다.
차탈은 오래전에도 이와 똑같은 은발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3517년. 모르간 만국 박람회가 개장되기 전의 글레이셜 홀에서.
찾았다.
차탈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은발에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는 시아를 당겨오며 물었다.
“레이디 켈튼, 지난 반년 동안 술란에 있었던 게 아니지?”
시아는 침을 삼켰다. 저 머리카락이 왜 자신의 어깨에 있는가. 혹시 시간 여행의 여파인가? 왜 하필 차탈의 눈에 띄어버린 건가.
긴장한 심장 소리가 뼈마디를 쥐고 흔든다.
차탈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무엇을 알고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난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그때였다.
“그건 전하께서 궁금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등 뒤에서 살얼음이 낀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차탈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다.
귓가를 스치고 날아온 서늘한 바람에 검붉은 머리카락이 한 박자 늦게 흩날렸다.
화살처럼 날아와 차탈의 가슴팍을 밀어낸 건 생김새가 익숙한 지팡이였다. 윤기 도는 흑단을 매끄럽게 깎아 금으로 손잡이를 우아하게 장식한, 라크시스 옌의 지팡이.
시아는 본능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완벽하게 성장한 순백의 마법사가 있었다.
“시아.”
라크시스는 언제나처럼 오만하고도 고고한 턱짓으로 차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시아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겼음을 눈치챘다.
그가 몸에 두른 모든 것이 흐트러져 있었다. 빳빳하던 목깃엔 힘이 없었고, 베스트의 맨 밑 단추는 채워지지 않았다. 늘 매끄럽게 닦여있던 구두도 광을 잃었고 실크햇도 급히 쓴 것처럼 비뚜름했다.
결정적으로, 그에게선 샤샤리아 향이 났다. 숲 내음을 닮은 청량한 체취를 모두 덮어버릴 만큼 아주 지독한 수연의 냄새가.
그래서 시아는 라크시스를 마주하자마자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라크, 괜찮아요?”
그러자 고요하던 남자의 눈동자가 해일이 인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라크시스는 천천히 미소를 그려냈다.
그의 입꼬리도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그럼요. 당신은 그간 잘 지냈나요?”
* * *
돌겠군.
차탈은 이마를 짚으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남남처럼 데면데면 앉아있는 눈앞의 신사와 숙녀 때문이다.
아까 전엔 아주 그냥 세기의 사랑을 하고 계시더니, 이제 와 갑자기 내외를 하시겠다?
고대 마법사는 자신이 서재에 나타나자마자 이 나라 대공의 가슴팍에 지팡이를 집어 던진 걸 까맣게 잊었는지, 곧바로 시아 켈튼을 끌어안았다.
물론 두 사람의 재회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차탈은 그 순간 자신이 벽난로 앞 부지깽이나 괘종시계 따위로 전락했음을 알았다.
그토록 절절한 눈빛이라니. 시선만으로 모든 대화를 주고받기로 결심하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뒤늦게 차탈을 인식하고 떨어졌다.
차탈은 남은 인생 동안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를 당하는 경험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라크가 대공 전하를 돕고 있었다고요?”
“정확히는 돕는 것이 아니라 협조하는 겁니다. 대공이 충성스러운 종복을 둔 덕이지요. 대공 정도의 마법사도 알아채지 못한 것을 먼저 알아채었으니 말입니다.”
차탈은 빈정대는 라크시스를 외면했다. 라크시스가 말하는 족족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듯 놀라는 시아 켈튼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차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마침 이쪽으로 오는군요.”
젊은 귀부인 하나가 미끄러지듯 카펫을 걸어와 세 사람의 잔을 차례로 채웠다. 차탈이 엉망으로 내린 차와는 빛깔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여기서 마주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해본 귀부인이었다. 심지어 귀부인은 문이 아닌, 괘종시계 뒤의 황궁 비밀통로로 차탈의 서재에 들어오다가, 시아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황족들이 비상시에 사용하는 통로를 고작 귀부인이 이용한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제국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라크시스와 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은 채 차만 따르고 있었다.
“주군을 위해 어려운 결정을 해주신 고대 마법사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레이디 켈튼도 오랜만에 뵙는군요. 담소가 끝나면 불러주시길.”
귀부인은 가볍게 묵례한 후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러나 차탈이 그녀를 붙잡았다.
“같이 있지. 어차피 그대도 알게 될 내용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