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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34)화 (234/292)
  • 234화 

    “이렇게 돌아가면 제가 무척 곤란해진다고요!”

    [바라 마지않던 소원이 이루어지고 있나니.]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천칭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시간 여행을 조종하냐는 말도 부정하지 않았다.

    “라크에게 간단 말도 못 했어요! 절 시간 여행에 휘말리게 하셨으면 적어도 언질은 주셨어야 되는 게 아닌가요?!”

    그러나 천칭은 그녀의 외침에 답을 주지 않았다.

    순간 발밑이 울렁거려 시아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아득히 멀리 있던 천칭이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시아는 자신을 떠받친 별들이 천천히 천칭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목적지로 향하던 중앙 우편국의 소포들처럼 시아는 천칭으로, 그것도 천칭의 꼭짓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꼭짓점은 아주 작고도 거대한 구멍이었다.

    쥐구멍처럼 새까만 점을 들여다보자, 그녀가 익히 알던 검은 우주가 펼쳐졌다. 신비롭고도 오묘한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기울며 훅―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에 도달한 별들이 흩어진 것이다. 시아는 점을 넘어서 그녀의 우주 속으로 끝없이 떨어졌다. 시야의 양옆으로 익숙한 광경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녀가 봉인에서 꺼낸 어둠을 올려놓던 천칭과 별의 길, 다무스가 죽음을 맞이하던 신전과 열한 개의 왕좌, 시아 켈튼이 살던 자그마한 별과 거대한 대륙…….

    헬릭스의 목소리가 어느새 우레처럼 커졌다.

    - 제기랄, 젠장.

    황족이나 쓸 법한 고상한 말투와 욕설이 뒤섞인다.

    그런데 헬릭스 황자가 욕을 하던가? 그것도 온갖 명사가 모여든 무도회에서?

    시아는 뒤늦게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듣던 목소리가 헬릭스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시간 여행의 도착지가 3587년의 키르 해협 승전 기념 연회가 아니라는 것도.

    [너는 결국 굴레에서 벗어나 두 개의 선을 매듭지을 것이다.]

    “잠깐만요,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게 무슨, 잠깐만요오오―!!!”

    새하얗기만 하던 시야가 천천히 색을 입었다.

    짙은 마호가니 빛 천장 위로 섬세한 무늬가 덧그려지고, 낯선 시가 연기가 후각을 일깨운다. 보이는 가구마다 조각이 화려하고,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있어 흐릿한 눈으로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누구의 집인지는 몰라도 유서 깊은 대저택이 틀림없었다.

    천칭의 음성은 아스라이 멀어지다 결국 흩어져 사라졌다.

    시아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겨우 몸의 중심을 잡았다. 와인빛 카펫이 눈앞에서 뱅글뱅글 도는 와중에 짜증스러운 중얼거림이 시아의 청각을 곤두세웠다.

    “시끄러워 죽겠군. 멀쩡한 황궁은 왜 뜯어고치고 난리인 건지.”

    단단하고도 푹신한 벽이 등에 닿았다. 시아는 저가 정신을 차린 곳이 누군가의 서재이며, 지금 자신이 벽난로 앞 소파 뒤에서 몸을 일으켰음을 알아차렸다.

    “나더러 레이디 켈튼에게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면서, 경은 시도 때도 없이 날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지?”

    목소리의 주인은 벽난로와 멀리 떨어진 책상에 앉아 등을 돌린 채였다.

    그 위엔 황실의 문장이 수 놓인 휘장이 걸려 있었고, 의자의 등받이 너머로 살짝 보이는 머리카락은 타는 듯이 붉었다.

    시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아는 붉은 머리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기에.

    “덕분에 발작이 멈췄으니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군. 라크시스 옌.”

    시아는 붉은 머리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후 소파 뒤에 숨어 있다가, 그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소파가 밀린 탓에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낸 인기척에 남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 변명하지? 저 사람에게 변명이 통하기는 하나?

    붉은 머리 남자는 시가를 비벼 끄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자신의 서재에 찾아온 불청객을 발견하고는 얼이 빠져 그 상태로 행동을 멈추었다.

    그가 발견한 건 오만한 고대 마법사가 아닌, 반년 전 맨덜랜드에서 자취를 감추곤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켈튼가의 레이디였다.

    “…아니, 레이디 켈튼.”

    시아는 카펫에 자빠진 모습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대공 전하.”

    * * *

    차탈은 마른세수를 하며 차를 내왔다.

    “그대가 왜… 아니, 대체 그 꼴은 뭐지? 뜬금없이 남장은 왜 하고 있으며, 그보다 어떻게 기척도 없이 내 서재에 들어온 건가?”

    그게, 저도 사정을 설명하기 참 어려운데요…….

    시아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차탈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키스까지 하려던 남자였는데, 너무 당황스럽다 보니 그에게 가졌던 미약한 공포심마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난 옌 경이 온 줄 알았어.”

    “…라크가 온 줄 아셨다고요?”

    차탈은 제 몫의 찻잔을 테이블에 올리며 맞은 편에 앉았다. 시아는 차탈을 바라보는 척하며 슬쩍 주변을 관찰했다. 아치형의 큼직한 창문 너머로 단풍이 얼마 남지 않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가을?’

    그것도 겨울로 넘어가기 직전의 가을풍경이었다. 잘못 도착해도 단단히 잘못 도착한 모양이다. 원래대로였다면 그녀는 3521년 봄에 도착해야 했다.

    헐벗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황궁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여긴 별궁인가.

    시아가 기억하기론 17대 황제 차탈은 그가 노든 대공이던 시절, 누이 알리나에 대한 정이 각별하여 황궁에 줄곧 머물렀다고 했다.

    알현식 날 대공이 레이디 켈튼에게 저지른 일로 그의 명예가 크게 실추되었던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게 대공이 황궁에서 쫓겨난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발작이 멈췄으니까. 게다가 이런 괴물 같은 마력을 가진 사람은 라크시스 옌뿐이고.”

    “…전하, 어디 아프셨어요?”

    반년 전 시작된 대공의 광증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머나먼 시골의 촌부들은 모를 수도 있겠다만, 라크시스 옌의 연인이자 화제의 인물이었던 시아 켈튼에게까지 이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멍청하게 안부를 묻는다고?

    “그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군. 옌 경이 말을 안 해주던가? 설마 그간 진짜로 사라져 있기라도 했던 건가?”

    차탈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지 선이 굵던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내온 차에 손도 대지 않고 있는 시아를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 짓도 안 했어. 마셔도 돼.”

    시아는 그제야 움찔거리며 차를 홀짝였다. 그녀는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별궁의 서재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차탈과 눈이 마주치면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그대가 날 싫어하는 걸 알아. 하지만 말도 없이 불쑥 찾아온 건 그대이지.”

    차탈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한때 제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황자는 알현식 이후 한순간에 부도덕한 난봉꾼으로 전락했다. 호의 어린 시선도, 든든하던 세력도 떨어져 나간 지 오래였다. 이젠 황궁의 시종들도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았다.

    레이디 시아 켈튼의 경계 어린 눈빛이 익숙하단 뜻이다. 차탈은 그녀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단 표시로 두 손을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대에게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할 일은 없어. 그날의 일을 제대로 사과하지 못한 것도 알고.”

    시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달라도 너무 달라진 차탈이 어색했다. 그전까진 라크시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대공이 왜 이렇게까지 무력해졌을까.

    “…대공 전하께선 라크를 싫어하셨으니까요.”

    “싫어하진 않았어. 경계했을 뿐이지. 그대도 옆에서 지켜봤으니 알잖나? 이 나라에서 고대 마법사가 어떤 존재로 통하는지 말이야.”

    땅땅!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젠장. 저놈의 공사!”

    차탈은 머리를 싸매며 조용히 욕설을 중얼거렸다. 시아는 창가로 다가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유백색의 우아한 외관으로 제국을 상징하는 황궁이 쇠 파이프로 둘러싸여 있었다. 맨 바깥 외벽에 달라붙은 인부만 어림잡아 수십이다.

    마도 시대라면서 공사엔 마법을 안 쓰는 건가, 하는 의문도 잠시, 시아는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대공 전하, 죄송한데 오늘 날짜를 여쭈어도 될까요?”

    “대화하기 싫단 말을 이렇게 돌려 하는군. 하… 미안하네. 내가 요즘 신경이 어지러운 바람에. 아니, 이것도 변명 같군.”

    차탈은 친절하게 오늘 자 신문을 가져다 테이블에 툭 던졌다.

    “3520년 11월 28일이야. 신문만 봐도 알 수 있는 날짜를 왜 물어보는진 모르겠지만 말이지.”

    신문을 집어 든 시아 켈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에 차탈은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반년 전의 알현식 이후, 사교계 최고의 명사로 떠오른 레이디 켈튼이 홀연히 사라졌다. 병에 걸려 급하게 고향인 술란으로 내려갔다곤 했지만 그 소문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남자가 죽어가던 황제도 되살린 고대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레이디 켈튼이 술란으로 내려간 후 라크시스 옌까지 덩달아 남부로 내려가면서 사교계엔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그들이 비밀리에 결혼하여 이미 신혼을 즐기고 있다거나, 샤프롱을 자처했던 레이디 로드리치와 반목하여 사교계를 떠나 버렸다든가 하는 낭설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차탈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건 레이디 켈튼을 위협한 차탈에게 유감을 표하기 위해 라크시스 옌이 그녀를 데리고 남부로 떠나 버렸다는 소문이었다.

    모두 진실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차탈에겐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무뢰한처럼 굴었던 건 사실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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