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라크. 카얄은 우리 예상대로 많이 약해져 있었어요. 그는 지금 오토마톤의 심장에서 꺼내 간 어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요.”
시아는 거침없이 라크시스에게 되돌아갔다.
“어차피 카얄은 봉인을 찾아봤자 마음대로 어둠을 흡수할 수 없어요. 게다가 불안정한 봉인을 처리할 수 있는 건 오직 저뿐이고요. 로렌시아 호에서 봤잖아요.”
라크시스가 주춤거렸다. 하지만 시아의 기세는 그녀의 걸음걸이처럼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시아.”
“봉인이 폭발하는 걸 막으려면 결국엔 제가 필요할 텐데, 절 두고 가면 어떡하려고요?”
그녀의 주장을 묵묵히 듣던 라크시스는 결국 시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신 말이 다 맞아요. 시아.”
“그렇죠? 그러니까 절 라크 곁에서 떨어뜨려 놓을 생각은 말아달라고요.”
그러나 선뜻 시아의 편을 들어준 것과는 달리, 라크시스의 표정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당신 말이 맞아요. 지금의 카얄은 봉인을 얻어봤자 사용할 수 없어요. 흡수할 수도 없고. 봉인이 교회 밑 깊은 곳에 묻혀 있다면 더욱이 지금 당장 봉인을 꺼내기도 힘들겠죠.”
창문을 등진 라크시스의 뒤로 주홍빛이 번쩍였다. 아득한 함성과 먹먹한 폭발음이 배경처럼 깔린다. 수평선을 따라 시작된 촛불 같은 불길이 깊은 밤을 밝히며 서서히 번져 오고 있었다.
“당신이 그랬죠. 그가 종말을 준비했다고요. 하지만 카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덟 번째 봉인의 행방을 몰랐어요. 그런데도 그는 종말을 준비했다고 했죠.”
창밖에선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타오르는 건 화약 주머니가 아니라, 맨덜랜드의 건물들이었다.
맞은편 건물이 대장간의 쇳덩이처럼 빨갛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아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카얄은 지금 교회로 간 게 아니에요. 그는…….”
“라크, 피해요!”
퍼펑―!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눈보라처럼 몰려들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껴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캐한 연기와 함께 화마가 창문을 타고 넘어와 객실을 덮쳤다.
“괜찮아요? 라크, 라크!”
두어 번을 구른 시아는 팔 안에 가둔 라크시스를 내려다보며 그를 애타게 불렀다.
사방이 잔 불길과 파편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그 위를 구른 고통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크시스는 넋을 잃고 시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자신과 똑같은 은발이었다. 그를 구하고, 그녀를 구한 것은 저 은발을 타고 넘쳐흐르는 고대의 마력이었다.
구르다 멈춘 곳이 운 좋게도 라크시스가 그려둔 마법진에 반쯤 걸쳐진 곳이라 시아의 마력을 타고 마법진이 발동되어 달리아는 불길과 유리 조각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네, 전 괜찮습니다. 당신이, 날…….”
시아의 머리칼을 뒤덮었던 마력은 소임을 다했다는 듯 곧 사그라들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고함과 비명이 들려온 탓에 라크시스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시아를 붙잡고 일어났다.
“라크,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피해야 돼요. 요르문에게도 어서 연락해요. 수도에서 만나자고요. 달리아 벤슨도 공간이동 마법으로 옮겨줄 수 있죠?”
창밖에서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옆 건물에서 시작된 불길은 머지않아 이 호텔도 집어삼킬 것이다.
시아는 화장실로 달려가 수건을 대충 적셔서는 달리아의 코와 입에 가져다 대고, 라크시스에게도 건넸다.
총성이 마구잡이로 울렸다. 경찰의 호루라기 소리와 비명이 뒤섞이고 있었다.
거리를 점령한 자들이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때리고, 죽였다. 도시를 점령한 괴한의 무리는 맨덜랜드에서 가장 값이 비싼 이 호텔까지 침입하려 하고 있었다.
로비의 유리문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시아는 절박하게 외쳤다.
“라크, 어서요! 이거 받아요! 호흡기부터 막고 빨리 여기서 탈출해야 된다고요!”
창밖을 내려다본 라크시스는 도시를 공격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어둠과 똑같은 피부를 지닌 이들.
무기를 든 건 가멜인들이었다.
카얄이 준비한 종말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라크시스는 신음을 흘렸다. 이 화마는 단순히 마력으로 물을 끌어다 막을 수 있는 재난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시아와 함께 대피하는 것이 우선이다.
라크시스는 발밑으로 마력을 끌어모으며, 수도의 켈튼 저택으로 마법의 좌표를 고정했다.
요르문이야 알아서 잘 탈출하겠지. 그라면 갖은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로드 젤마니까지 무사히 챙겨올 터다.
라크시스는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에서 챙겨온 증거들을 공간이동 마법의 영역 안으로 가져왔다. 서류 가방들이 차곡차곡 쌓였고, 공간이동 마법도 발동될 준비를 마쳤다.
라크시스는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며 그녀가 해야 할 것을 말했다.
“시아, 미스 벤슨을 꽉 잡아요. 잡기 힘들면 손이든 발이든 당신과 묶어둬도 좋아요. 떨어져 있지만 않으면 상관없으니까… 시아?”
그러나 그의 뒤엔 아무도 없었다.
“…시아.”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웅웅거리는 마법도, 바깥의 아수라장도, 쓰러진 달리아 벤슨에 불길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객실까지 그대로인데…….
단 하나. 시아 켈튼만이 사라지고 없었다.
라크시스는 공간이동 마법 발동도 잊은 채 멍하니 그녀가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 * *
눈앞이 새하얬다.
‘…시간 여행이구나.’
또 이러는구나.
원래대로였다면 사흘 정도 더 남았던 시간 여행이 제멋대로 끝나 버렸다. 이젠 정말로 일기장과 모든 것이 완전히 어긋나 버린 걸까…….
시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며 발을 굴렀다.
왈칵 울음이 솟았다. 지난번에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라크시스에게 인사를 못 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은 맨덜랜드의 호텔에서 창을 통해 불타는 도시를 내다보던 그의 뒷모습뿐이었다.
어째서 자꾸만 시간 여행이 꼬이는 건가…….
꼬여가는 건지, 제대로 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멋대로 과거를 바꾼 벌을 받는 걸까. 종말이라는 건 사실 막을 수 없는 게 아니었을까……. 그래도 하나만큼은 바뀌었으면 좋겠다.
라크시스 옌이 죽는 과거. 그가 없는 미래.
그를 살리는 대가를 내가 오롯이 뒤집어쓰더라도, 그 하나만큼은 살리고 싶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슴께에서 요동치는 마력이 시아를 집어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작은 그릇에 다 담기지 못한 사도의 힘이 폭주하며 시아의 등을 떠밀었다.
새하얀 공간 속에 그보다 더 새하얀, 너무나도 새하얘서 파리하게 보일 지경인 빛무리들이 시아의 발밑에 깔렸다.
시아는 그것들이 천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보았던 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은하, 큰 은하. 강물처럼 흐르는 은하수.
별들은 몸을 나선으로 꼬았다 둥글게 말았다 하며 까르르 웃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쇳덩이가 기우는 소리가 났다. 천칭이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고 접시를 이리 뉘었다가 저리 뉘는 소리였다.
지금 보니 제 발밑에 깔린 별들은 천칭을 고정하는 아주 작은 꼭짓점과 이어져 있었다.
[작은 빛이여. 태고의 빛이여.]
시아는 움찔 놀랐다. 기름칠도 안 한 경첩이 여닫히는 것처럼 끼익거리던 소리가 저절로 음형을 갖추고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천칭이다. 제게 말을 걸어온 건 분명 천칭이었다. 시아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닫고 새하얀 우주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천칭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꺄르르 웃는 별들만 있을 뿐.
시아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내게 말을 건 게 천칭 당신인 거죠? 시간 여행이 멋대로 이루어지는 건 당신 때문인가요?”
그러나 천칭은 대답이 없었다. 그런 자신을 비웃듯 발밑에서 청량한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래, 알았어. 내가 바보지. 세상에 저울이랑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 내가 망상이라도 하는가 보지.”
시아는 괜히 민망해져서 별들을 발끝으로 헤집었다. 하지만 제게 말을 건 존재는 분명 천칭이었다.
근거도 뭣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시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을 지배하는 마력이 저 목소리가 천칭이라고. 우주의 균형을 수호하는 위대한 존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고요 속의 음형 외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말소리였다. 젊은 남자의, 라크시스보다는 굵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가 한밤중의 모깃소리처럼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다.
혹시 헬릭스 황자인가?
그러고 보니 이번 시간 여행의 출발점은 3578년의 키르 해협 승전 기념 연회였다.
자신은 헬릭스의 춤 신청을 받았고, 그와 춤을 추기 직전에 그만 시간 여행을… 그리고 지금의 시아 켈튼은 여전히 보험사정관의 조수 역할에 충실한 라운지 슈트 차림이었다.
“자, 잠깐만요! 저기요! 제 말을 듣고 있나요? 거기 있죠, 당신! 아니, 천칭이여?”
그녀의 외침과 별개로 가느다랗게 들리던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는 중이었다. 귀를 기울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준이었다.
“천칭이여! 절 돌려보내더라도 돌아갈 준비는 하게 해줘야 하는 거 아녜요? 이렇게 매번 멋대로 돌려보내는 게 어디 있어요!”
이대로 원래 시대로 돌아간다면 헬릭스는 틀림없이 시아를 의심할 것이다.
헬릭스는 연회에 참석한 레이디를, 그것도 한때 고백까지 할 정도로 마음에 두고 있었던 여자에게 사정을 꼬치꼬치 캐물을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치장한 시아가 눈 깜짝할 새에 투박한 남성용 정장 차림으로 변해 버린 걸 그렇구나, 하고 넘길 사람도 아니었다.
게다가 칠십 년 후엔 마법도 없지 않은가. 그 말인즉, 헬릭스에게 이 꼴을 설명할 길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