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시아! 정신 차려요! 제발, 눈을 떠봐요. 시아, 시아……!”
흐릿해진 시야를 깜빡이길 두어 번. 실루엣의 경계가 이지러졌지만, 시아는 눈앞을 가득 메운 새하얀 얼굴이 라크시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크.”
“네, 시아. 저 여기 있어요.”
곧 몸이 으스러져라 껴안아졌다.
라크시스의 청량한 체취가 몽롱하던 정신을 일깨웠다. 카얄에게 붙잡혔던 손목이 아직까지 아픈 것 같았다. 시아는 볼 안쪽을 깨물어 혼몽했던 정신을 가까스로 일깨웠다.
엉망이 된 객실을 보자마자 자신이 정신을 잃기 직전과 그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매달려 절박하게 외쳤다.
“카얄이 제 머릿속에 들어왔어요. 제 기억을 읽고, 갈리프의 기억까지 끄집어내선, 아니, 그보다 그가 우리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어요. 카얄이 여덟 번째 봉인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고요. 그가 달리아 벤슨의 몸을 지배해서는… 달리아는, 달리아 벤슨은요?”
시아는 생각나는 말을 마구잡이로 뱉다가 흠칫했다.
갈리프의 기억이라니…….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자신이 평행세계의 또 다른 갈리프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그 말을 못 들었는지, 아니면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잠잠히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갯짓을 했다. 빛을 잃은 마법진 위에는 정신을 잃은 달리아가 줄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쓰러져 있었다.
“달리아 벤슨은 살아있어요.”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온 신경을 쏟으며 식은땀 범벅인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겼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신경도 쓰지 말고요. 남은 일들을 처리하는 건 내 몫이니까.”
시아는 라크시스가 그답지 않게 손을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 볼을 스치는 그의 손가락이 축축했다.
“내가 방심했어요. 카얄이 마법진을 뚫고 달리아 벤슨의 몸을 조종할 수준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당신을 데리고 최대한 멀리 피했어야 했는데.”
질척하고 끈끈한 액체가 뺨에 달라붙는다. 시아는 그제야 그것이 제 귀와 코에서 흘러나온 피라는 걸 알아차렸다.
“당신이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봉인의 힘이 없었더라면…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또다시 당신을 잃을 순 없어…….”
“라크.”
라크시스가 이상했다. 그는 시아를 끌어안은 채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남들 앞에선 악착같이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던 고대 마법사가 신사의 굴레도, 껍데기도 모두 벗어던진 채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난 괜찮아요. 이것 봐요. 멀쩡히 살아있잖아요? 그리고 또다시 날 잃는다뇨? 제가 언제 라크를 영영 떠나기라도 했나요?”
그의 등이 떨렸다. 라크시스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자신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시아는 치명상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카얄이 머리를 파고든 탓에 뒷골이 여전히 뻐근하게 당겨왔지만, 애초에 라크시스가 뛰어들 만큼 심한 공격을 받지도 않았다.
라크시스의 숨이 불규칙했다.
시아는 라크시스가 이토록 놀란 모습을 처음 보았다. 시간 여행 도중 그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시아는 라크시스를 마주 끌어안으며 도닥였다. 호리호리하다곤 하나 그녀보다 키도, 덩치도 큰 남자의 축 늘어진 몸을 안고 있으니 이불을 뒤덮은 것 같았다.
그러고 한참 있으니 남자에게서 습기 어린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내가 추한 모습을 보였군요.”
고개를 든 라크시스의 눈동자는 젖어있었다. 그의 시선이 이젠 아까와는 다른 떨림을 안고 수그러들었다.
그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행동을 시아 앞에서 보였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난 라크의 어떤 모습도 다 사랑하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라크시스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난 정말 못난 사람이네요. 숙녀의 입에서 구애의 말이 먼저 나오게 하다니…….”
“그러면 어때요? 솔직히 라크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거지, 칠십 년 후 미래에선 그런 순서 따위 아무도 신경 안 쓴다고요.”
시아는 키득거렸다. 코와 귀에서 줄줄 흘러내리다 말라붙은 핏자국을 얼굴 가득 달고 웃는 모습이 괴상하긴 했지만, 라크시스는 그렇게라도 그녀가 웃는 것을 보자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그가 진정할 때까지 뒷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새하얀 은발 속에서 고개를 내민 이질적인 색을 발견했다. 그것은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 한 가닥이었다.
마법사는 새치가 거꾸로도 나나…….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는 건 봤어도, 은발에 검은 새치가 난단 소리는 못 들어봤다.
시아는 검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만지작거렸다. 불현듯, 갈리프의 기억에서 엿보았던 노예 아이가 떠올랐다.
라크시스는 날 또다시 잃을 수 없다고 했었지…….
“라크. 혹시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요?”
“역시 내가 신사답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거군요. 물론 내가 한 짓이 유모에게 어리광부리는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란 걸 알고 있지만…….”
라크시스는 시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을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요. 시아. 시아 켈튼. 나의 레이디.”
그러나 시아는 그가 무언가를 엿보았음을 눈치챘다.
설마 방금 전 카얄이 라크시스의 머릿속도 헤집어 버린 걸까. 그래서 갈리프와 함께하던 시절을 떠올린 걸까.
그의 어루만짐이 평소와는 다르게 애절하다. 라크시스는 마치 죽은 연인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서 겹쳐보는 것은 아마도 갈리프일 터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이렇게 난데없이 서럽게 울거나, 지금처럼 불안한 눈빛을 할 이유가 없었다.
입맛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아는 자신이 갈리프에게서 비롯되었으나, 갈리프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아는 금세 씁쓸한 기분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라크시스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아. 내게 그런 질문을 하고선 당신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방금 전까지 엉엉 울었던 남자라곤 도무지 생각할 수 없게, 라크시스는 시아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홍채 주름의 움직임까지 읽어내려는 듯,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푸른 눈동자엔 온통 시아 켈튼뿐이었다.
그가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껄끄러운 물음을 혀끝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혹, 알리나의 증손자 생각이 납니까?”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헬릭스 황자 이야기에 시아는 잠시 당황하다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에 라크시스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라크시스 옌이 헬릭스 황자를 질투하다니. 이 시대엔 태어나지도 않은 세포 덩어리를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라크시스에 시아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전혀요. 제가 당신 때문에 미래에서 누구를 거절했는데.”
시아는 라크시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왔다. 그와 계속 붙어있고 싶었지만, 엉망이 된 객실과 아득한 함성이 자꾸만 이성을 깨웠다.
“그보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않아요? 카얄은요?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갔어요?”
“카얄은 도망쳤어요.”
“도망쳤다고요?”
라크시스가 객실 한 편을 턱짓했다.
“보시다시피 달리아 벤슨을 버리고 빠져나갔죠. 그가 맨덜랜드에 있는 게 아닌 이상 카얄은 아마도 다른 희생양의 머릿속으로 숨어 들어갔을 겁니다.”
달리아는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지나치게 고요한 몸뚱이에 시아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몸엔 더 이상 카얄이 없는데도, 카얄의 섬뜩한 미소는 망막에 잔상을 남겨 아직까지도 그녀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시아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싸한 기분에 몸서리를 쳤다.
“…그가 제게 종말을 준비했으니 기대하라고 했어요.”
“종말은 불가능해요. 카얄이 가진 봉인은 오직 하나뿐이에요. 그 하나의 봉인이 가진 힘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광룡으로 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시아는 대답을 삼켰다.
그래, 카얄은 이제 일기장에 적혀 있던 것처럼 광룡으로 부활할 수 없을 것이다. 시아와 라크시스가 대부분의 봉인을 찾아 버렸으니까.
물론 카얄이 가져간 봉인 한 개의 힘도 무지막지하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여덟 번째 봉인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르문이 맨덜랜드 교회 부지로 곧장 갔으니까요.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로드 젤마니도 요르문을 따라갔고요.”
“라크는요?”
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아를 살폈다.
카얄에게 몸을 빼앗긴 후유증을 앓고 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미라로 변하거나 다치지는 않은 채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었다.
“당신이 깨어나고 나면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요르문과 합류하기로 했어요. 카얄이라면 아마 가장 먼저 봉인을 찾으러 갔을 테니까요. 아무리 대마법사래도 요르문 혼자서 이단과 카얄을 모두 상대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홱 돌아보았다.
“절 두고 가려고요?”
“위험해요. 아까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요.”
라크시스는 단호했다. 시아는 속에서 울컥 치솟는 감정에 숨을 들이켰다.
지금껏 시간 여행을 하면서 온갖 사건을 함께 겪어왔으면서, 갑자기 날 안전한 곳에 두고 가겠다고?
그의 말에서 틀린 것은 없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아는 라크시스와 떨어질 수 없었다.
자신과 라크시스는 서로의 시간 여행 파트너였다. 그리고 언제나 모든 시간을 함께해 왔었다.
그런데 날 두고 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