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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31)화 (231/292)

231화 

새카만 우주. 몽환적인 별 무리. 사도 다무스가 죽음을 맞이했던 거대한 신전의 광경이 마치 현실처럼 시아의 눈앞을 채웠다.

‘속고 있는 건 너희들이야! 내가 천칭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아나? 갈리프가 왜 천칭을 오래 보지 말라고 했는지 아느냐고!’

발자크 로스가 보인다. 사도 시절의 카얄인가. 찬란한 금발을 지닌 남자가 만신창이가 되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또다. 이건 갈리프의 기억이구나.

시아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자마자 몰아치는 비탄에 머리끝까지 잠겨 들고 말았다.

슬펐다. 이해할 수 없었고, 그저 괴롭고 슬프기만 했다. 제 몸을 갈라 처음으로 빚어낸 자식에게 벌을 주어야만 한다. 죗값을 치를 저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카얄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고, 무슨 죗값을 받아야 하길래 갈리프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까?

시아는 잠시 그런 의문을 품었으나, 곧 갈리프의 서러운 감정에 휩쓸려 생각을 잃고 말았다.

‘갈리프여. 참으로 불쌍하지 않습니까? 이 아이는 귀리죽조차 먹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칭에 오르면 두 번 다시 대지를 밟아보지 못할 수도 있지요.’

카얄은 버둥거리며 발악하고 있었다.

시아는 카얄을 붙든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그녀가 찾은 봉인들이었다. 다무스, 울리아트……. 천칭에 어둠을 올리기 직전 만났던 사도들, 카얄의 형제들.

그러나 그들은 카얄을 형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배신자, 이 배신자!’

증오 섞인 목소리가 사방에 난무했다. 카얄은 그 사이에 꿇어앉은 채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자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전생에서도 사람을 죽였지요. 천칭은 이자를 벌써 두 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천칭이 이번에도 이자를 살려준다면 무고한 자가 또다시 희생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카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심지어 갈리프조차도.

갈리프는 그저 어리석은 선택을 한 첫 번째 자식을 안타까워하고, 그에게 닥칠 험난한 시련에 슬퍼하고 있었다.

시아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갈리프는 분명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속은 텅 비어있었다. 마치 무정물처럼, 길가의 돌멩이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바람은 떨어지는 나뭇잎을 가여워하지 않고, 설산은 내리쬐는 태양을 원망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 순환하는 세계와 순환의 원리.

갈리프는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존재였다. 태고의 존재인 빛은 그저 우주의 법칙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고, 또 어둠으로 인도했다.

카얄을 보며 슬퍼하는 갈리프는 인간이 아니었다. 초월자로서의 신. 빛 그 자체인 존재.

미옌. 오, 미옌!

시아는 곧 갈리프의 슬픔이 카얄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렸다. 시아 켈튼에게 공허하다고 느껴졌던 슬픔은 갈리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본 감정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시아는 갈리프가 얼마나 격정적으로 비통해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곧 카얄의 발밑이 갈라졌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태고의 어둠이 절규하는 카얄을 삼키고, 카얄의 부르짖음만이 남았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미옌.’

갈리프는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남아 하염없이 울었다.

시아는 한참이나 제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닦아내야만 했다.

이윽고 갈리프의 시야가 사라졌다. 깜빡. 순식간에 시아의 주변이 암전이 되어버린 것처럼 새까맣게 변했다.

그때, 암흑의 공간에서 어둠을 녹여 만든 듯 번들거리는 인영이 쑤욱 나와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시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건 마도 시대의 신사 모습을 한 금발의 남자였다.

달리아의 너머에 있던 자. 저주의 본체이자 어둠을 자처한 갈리프의 첫 번째 사도.

“놀라워. 태고의 빛도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을 땐 별수 없다는 게.”

시아는 자신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카얄이지?”

“오, 그러고 보니 당신과 직접 마주친 적은 이번이 두 번째로군. 레이디 시아 켈튼.”

“두 번째라고?”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맞아, 내가 카얄이야. 갈리프가 오래 전 저버렸던 첫 번째 자식이지.”

카얄은 스스로의 존재를 쉽게 인정했다.

시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검으나, 시야에 붉은 기운이 걸린다. 저주였다. 사람의 머리를 뒤흔드는, 고대의 사멸된 마법.

그때 시아의 턱이 우악스럽게 들어 올려졌다. 시아는 검은 가죽으로 감싸인 카얄의 손에 잡힌 채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카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시아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참 신기한 존재야. 역시 갈리프는 천칭의 가호를 받고 있었던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갈리프의 복사본인 너를 천칭이 이렇게나 편애할 리가 없지. 시간 여행자라니, 감히 과거를 거슬러오다니!”

시아는 카얄을 노려보았다.

“…내 기억을 봤구나.”

카얄은 신랄한 웃음을 터트리며 시아를 내팽개쳤다.

시아는 벌겋게 부어오른 볼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카얄은 지팡이를 짚으며 다리를 삐딱하게 짚었다.

“아쉽게도 다 보진 못했어. 네가 가져간 봉인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난 네가 추측했다시피 지금은 어둠 한 조각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몸이 되어버려서. 너같이 거대한 빛을 파고들긴 힘들지.”

유지가 벅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카얄의 몸 경계선이 살짝씩 흐려지고 있었다. 시아는 그것을 숨죽여 지켜보다가, 그의 가슴 깊숙이 웅크리고 있는 어둠을 발견했다.

지금껏 찾아왔던 봉인 속 어둠과 똑같은 것이었다. 오토마톤의 심장을 파괴하고 가져간 어둠의 힘이 틀림없었다.

카얄은 어느덧 제게서 등을 돌리고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시아는 카얄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곳은 자신의 정신 속이며, 카얄 역시 정신이자 본질 그 자체만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카얄의 등에 손을 찔러넣어 어둠을 꺼낸다면, 카얄이 유일하게 손에 넣었던 봉인을 빼앗을 수 있을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네게 절망을 보여줄 준비는 이미 끝났으니까.”

그러나 시아가 카얄에게 가까이 다가선 순간, 그는 사라지고 말았다.

“……!”

등 뒤에서 손목이 잡혔다. 우악스럽게 손목을 파고드는 카얄의 손가락에 시아는 신음을 흘렸다.

카얄은 조소하며 시아의 손목을 비틀어, 그녀가 자신을 마주 볼 수 있도록 돌렸다.

“인간인 당신은 정말이지… 익숙하지가 않아. 날 빚어낸 갈리프는 이런 쥐새끼 같은 짓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시아는 한참 동안 말없이 카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카얄 역시 시아를 그저 경멸하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시아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발악하고, 저주하고, 그러다 살려달라 애원하며 그녀가 카얄의 발밑에 엎드려 빌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힘이 들어갔던 시아의 눈꺼풀이 서서히 풀어졌다. 시아는 어느 순간부터 카얄을 관찰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시작된 관찰은 어느새 기묘하게 일그러진 카얄의 얼굴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가시로 몸을 두른 짐승.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을 죽였던 주제에 그는 왜인지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전말을 모르는 시아가 본 카얄은 그런 모습이었다.

“입을 다물기로 한 건가? 좋아. 네 조그만 뇌가 얼마나 저주를 버티나 기다려보지.”

카얄은 침묵하는 시아를 조소했다. 붙잡힌 손목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 붉은 기운이 피부로 스며들며 목덜미 위로 기어올랐다.

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뇌에 수백 개에 바늘이 꽂히는 기분이었다.

시아는 손목을 빼내는 대신, 고통을 삼키며 가만히 물었다.

“…종말을 불러오고 라크시스를 죽인 후에, 당신은 그 후엔 어떻게 살아갈 거야?”

“오, 갈리프. 바뀌는 건 없어. 아무리 날 설득해 봤자 네 운명은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마치 네가 정해 둔 영혼들의 운명처럼 말이지.”

“당신은 종말 이후에도 살아남아. 그러곤 또다시 망령처럼 갈리프를 쫓지.”

“그럼 넌 결국 내 손에 죽었겠군. 안 그래?”

시아는 잠시 숨을 골랐다. 카얄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일기장의 시아 켈튼처럼 살았더라면.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 채 종말을 맞이하고, 칠십 년 후의 미래까지 살아남아 갈리프를 쫓던 카얄을 만났더라면.

자신은 정말로 카얄에게 죽었을까?

그러나 시아는 곧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곤 폐쇄된 수국관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기억해 냈다.

자신이 머물던 기숙사 방의, 오래된 나무 문 너머로 들리던 두 사람의 대화. 총성. 찢어진 공간이동 스크롤.

“아니, 당신은 갈리프를 살려줬어. 왜인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당신은 종말을 일으키고 라크시스를 죽이고, 그 후에도 줄곧 갈리프를 죽이려 쫓아다녔으면서도 결국 그녀를 살려줬다고.”

그러자 카얄이 코웃음을 쳤다.

“마치 너와 갈리프가 다르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저주는 계속해서 시아를 농락하듯 그녀의 머릿속을 찔러왔다. 그러나 카얄이 그녀를 파고들 수 없다고 했던 것이 사실이긴 했는지 기억은 더 이상 읽히지 않았다.

카얄은 그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싶을 뿐이다. 시아는 그의 증오가 향한 곳이 갈리프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갈리프는 카얄을 어둠으로 보내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은 시아는, 그것이 그 당시 갈리프가 느낄 수 있었던 최대의 감정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갈리프의 기억과 칠십 년 후의 카얄. 그 두 가지의 간극은 대체 무얼까.

단편적인 정보로는 두 사람의 사정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갈리프에 대해 풀리지 못한 무언가가 카얄의 가슴 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카얄 본인 외에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시아는 그에게 사실을 깨우쳐 주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시아 켈튼이지, 갈리프가 아니니까.”

툭. 손목이 놓였다.

시아는 카얄이 놓친 제 손목과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픔을 삼키는 와중에, 카얄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굉장히 불쾌한 것처럼 보였다.

이내 카얄은 다시금 섬뜩한 미소를 띤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나 시아는 그의 표정이 가면 같다고 생각했다.

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덧씌워 놓은 가면.

“만나서 즐거웠어. 너를 만나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여섯째의 행방을 알려준 건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의 몸이 붉은 기운에 휩싸이자, 동시에 온통 검던 의식의 공간도 흔들리며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저주가 깨지고 있었다.

흐릿해지던 카얄의 실루엣이 점점 형체를 잃어갔다. 카얄은 마지막까지 시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를 악다물었다.

“내가 준비한 종말을 기대해. 부디 즐겨주길 바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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