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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30)화 (230/292)
  • 230화

    라크시스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봉인이 교회 밑에 있게 된 경위를 천천히 짚어나갔다.

    “그러니까, 이건 다무스 때와 마찬가지인 겁니다. 시아, 과거가 바뀌기 전엔 다무스 신전이 있던 자리에 시트리나 대성당이 있었던 걸 기억하십니까?”

    “네. 기억해요.”

    “주신 디아우스를 믿는 국교회가 제국을 장악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죠.”

    요르문이 어이가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오래지 않다고 해도 몇백 년 전이잖아.”

    수천 년을 살아온 고대 마법사의 기준에서 ‘오래전’이라는 건 적어도 세기를 거슬러 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라크시스는 툴툴거리는 요르문을 가볍게 외면하곤 설명을 이었다.

    “그전엔 모두 고대 신화를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갈리프와 그의 사도들을 믿었죠. 빛의 신이자 창조주인 신룡과 그 조각들 말입니다.”

    라크시스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객실은 고요해졌다. 시아와 요르문, 루드윅 모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의 소음도 모두 잠들어 버린 시간,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와 달리아를 감싼 마법진의 기이한 소리를 빼곤 라크시스를 방해하는 것이 없었다.

    “갈리프에 대한 신앙은 국교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지배했죠. 황제조차도 그 믿음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요.”

    고대 마법사의 회상은 제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는 역사서에도, 성서에도 실리지 않은 국교회의 진짜 시초를 기억했다.

    “국교회는 고대 신화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죠. 지금의 국교회는 주변국들을 정복하여 갓 통일된 나라를 만든 황제가 통치를 위해 만들어 낸 신앙이에요.”

    대 세페란테 제국, 씨즐턴과 해외 세페란테 자치령의 군주. 신앙의 수호자.

    제국의 황제가 가진 작위와 지위를 간추려서 말할 때 흔히 사용되는 칭호였다.

    라크시스는 황제가 신앙의 수호자가 된 것이 다름 아닌 제국 초기의 황제가 국교회의 수장을 자처하며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기에 국교회의 주신을 뜻하는 디아우스는 고대어로 빛과 태양을 뜻하는 단어였다고 하니… 국교회가 고대 신화를 대체하기 위해 얼마나 갖은 애를 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언뜻 듣기엔 봉인과 상관없는 역사의 일부를 설명한 것 같으나, 고대 신화에 대한 믿음을 주신 디아우스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해야 했던 국교회의 입장을 생각하면 답은 금방 나왔다.

    “그렇다는 건 오래전엔 지금의 맨덜랜드의 교회 자리에 사도의 신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네요.”

    “그렇죠. 그렇게 생각하면 교회 밑에 봉인이 묻혀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겁니다.”

    현 맨덜랜드 교회 밑에 고대 사도의 신전 터가 있다. 어둠의 힘을 봉인한 사도의 육신도 아마 그 밑에 있을 터다.

    하지만 교회를 함부로 무너뜨릴 수 없는 상황이라 곤란한 거지, 봉인을 못 찾은 것보단 훨씬 나은 상황 아닌가?

    시아는 위로하는 듯 두 마법사를 번갈아 보며 입을 뗐다.

    “적어도 잘못 찾아온 건 아니네요. 요르문의 노력이 헛되진 않았잖아요?”

    “그렇네요. 헛수고를 한 건 아니니까요. 방법은 어떻게든 찾으면 되겠지요.”

    그러자 잠자코 있던 루드윅이 중얼거리며 끼어들었다.

    “역시 아르카나 중앙역에서 레이디 켈튼과 마주친 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루드윅.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해명해야 될 것 같은데.”

    요르문은 라크시스를 흘긋거렸다. 눈썹을 씰룩거리긴 해도 라크시스는 전에 비해 얌전히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누님과 관련된 일엔 늘 신경을 곤두세우더니.

    루드윅은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댔다. 놀라운 건 라크시스가 이를 가만히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제가 어디에서 이런 비화를 듣겠어요! 고대 마법사님께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레이디 켈튼과 만났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렇지. 나도 레이디 켈튼이 아니었다면 여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진 않았겠지.”

    ‘대신 간간이 무도회나 사교 클럽에 드나드는, 그저 그런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테지.’

    라크시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시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맞은편의 요르문이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왜 그러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마주 보는 시아의 말간 얼굴에서 안정감을 느낄 뿐이었다.

    요르문은 최근 이틀 사이에 벌어진 라크시스의 변화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배신감을 느꼈다. 물론 그 변화는 라크시스를 곁에서 오래 보아온 요르문 정도만 인지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요르문은 손바닥 뒤집듯 하루아침에 달라진 그의 태도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약혼이라도 한 건가?’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이전의 라크시스는 분명 시아 주변의 남자들을 경계했다. 시아 앞에서야 신사인 것처럼 굴었지만, 혹여 그녀의 관심이 저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할까 봐 홀로 초조해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엇이 바뀌었냐고 묻겠지만, 여튼 라크시스는 달라졌다.

    방금도 그랬다. 루드윅의 말에 저렇게 평온한 대답을 돌려줄 줄이야. 그것도 저렇게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면서…….

    ‘로렌 허슬러의 연인, 라크시스 옌. 맞는 말인데, 안 그래요?’

    시아의 마음이 제게 있다는 걸 확신한 라크시스에겐 더 이상 긴장도, 불안함도 없었다. 그저 이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계획을 세울 뿐.

    시아 켈튼을 오롯이 마음에 담을 수 있게 되자 그제야 라크시스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요르문은 이러한 라크시스의 심정 변화 과정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라크시스조차 자신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라크시스는 이제 루드윅의 말을 가볍게 맞장구쳐 주고 있었다. 대부분이 시아 켈튼에 대한 놀라움과 시간 여행을 함께 겪으며 알게 된 그녀의 올곧음에 대한 칭찬이었는데, 라크시스는 은근히 흐뭇해하기까지 했다.

    그래, 내가 끼어들어서 뭐 하냐.

    요르문은 진절머리를 쳤다. 자고로 부부의 일엔 끼어드는 게 아니다. 시아와 라크시스가 공식적으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곤 하지만, 요르문은 언젠간 제 두 눈으로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자리나 피해 줄까. 시간도 늦었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요르문이 소파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라크.”

    잔잔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겼다. 라크시스는 요르문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요르문은 시선이 객실 한 편에 고정된 채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라크시스는 요르문의 시선을 따라갔다. 뒤이어 같은 곳을 바라본 시아와 루드윅도 모두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곳에는 고개를 똑바로 든 채, 기괴하고도 선명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달리아 벤슨이 앉아 있었다.

    * * *

    달리아 벤슨은 천천히 일어났다.

    [맨덜랜드에서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아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뜻밖에 굉장한 수확을 얻었군.]

    그녀의 입에선 다 큰 여자의 목소리가 아닌 젊은 남자의 미성이 흘러나왔다. 달리아의 입술은 유령이 치는 피아노 건반처럼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를 묶어두었던 끈이 순식간에 재로 변해 사라졌다. 달리아는 마치 포박된 적 없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걸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카펫이 검게 그을렸다. 두어 발자국을 걸어 나온 달리아가 우뚝 멈췄다. 고개를 우두둑 꺾으며 한 바퀴를 돌리더니 꼿꼿이 서서는 입꼬리를 올렸다.

    찌들대로 찌든 부인의 얼굴에서 천사의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천사의 미소라고 부를 수 없는, 섬뜩한 웃음이었다.

    그간 단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던 얼굴 근육들이 억지로 피부를 우그러뜨려 낯선 이의 얼굴을 만들어 냈다.

    그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다름 아닌 루드윅이었다.

    “…발자크, 로스.”

    그 이름에 달리아, 이젠 카얄의 껍데기가 되어버린 여자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녀는 발자크 로스의 오랜 습관을 그대로 따라 하며, 모자를 까딱이는 시늉을 했다.

    [아아, 반갑군. 나의 친구여.]

    루드윅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요르문은 그런 루드윅을 제 등 뒤로 숨기며, 바짝 경계한 자세로 카얄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지?”

    [궁금한가? 내가 어디서부터 듣고 있었는지?]

    카얄은 낄낄거렸다. 그저 웃기만 하며 요르문을 계속 응시했다.

    요르문은 카얄을 노려보았다. 달리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웃는 남자는 모두를 혼란에 빠트리려 하고 있었다.

    [왜, 어차피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것들인데. 아, 너희만 알고 싶었던 것도 있었겠지. 예를 들면 나의 형제가 잠든 곳이라든가.]

    “저 자식이……!”

    “요르문! …정신 차려. 도발에 넘어가지 마.”

    라크시스는 당장에라도 달리아를 죽여버릴 것처럼 마력을 끌어모으고 있던 요르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대신 맨 앞으로 나서며 손에서 마력을 피워올렸다.

    “로드 젤마니, 시아와 함께 당장 뒤로 피하게.”

    차원이 다른 마력이 객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곤두선 신경만큼이나 날카로운 마력이 라크시스의 손짓을 따라 마법진에 채워졌다. 동시에 빽빽하게 채워진 수식을 따라 마법진에서 푸른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레이디 켈튼!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불기둥과 함께 전신이 휘날리던 달리아 벤슨의 몸은 한참 동안 휘몰아치던 마력 폭풍이 가라앉고 나서야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뒤엉켜 산발이 된 머리에 뒤집힌 치마와 날아가 버린 장신구로 달리아의 꼴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점령하고 있는 카얄의 섬뜩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손님에 대한 대접이 형편없군그래. 적어도 차 정돈 내어줄 줄 알았는데.]

    라크시스는 잇새를 악다물었다.

    “손님 대접을 받고 싶었다면 손님다운 수준을 갖췄어야지.”

    [오, 명예로운 귀족일수록 가엾은 자들을 내치지 않는 법인데.]

    카얄이 깃든 눈동자가 뒤룩뒤룩 구르며 시아를 찾아냈다. 그녀는 일찌감치 루드윅과 소파 뒤에 숨은 후였다. 엄호물처럼 모여 있는 소파들의 틈새에서 카얄은 시아의 동그란 눈동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닥쳐올 일도 모르고 겁도 없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카얄은 잔인하게 흰 이를 드러냈다.

    [인간은 변함이 없어, 안 그런가? 갈리프.]

    “……!”

    동시에 섬뜩하고 저릿한 마력이 시아의 뇌를 관통했다.

    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레이디 켈튼!”

    “시아!”

    시아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모든 것이 느려진다. 제게 달려오는 라크시스도, 요르문도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가 먹먹해지며 이성이 멀어지며, 이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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