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29)화 (229/292)
  • 229화 

    워워. 어째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앙숙처럼 다툰단 말이야?

    시아가 두 사람을 말리려 재빨리 끼어들었다.

    “재키 레이븐 같은 광신도가 아니더라도 이단의 신도일 순 있잖아요. 가령 이자벨라 황녀라든가요.”

    그러자 라크시스가 순식간에 시아의 말에 수긍했다.

    “하긴, 이단에 세뇌당하지 않고도 자발적으로 카얄과 손을 잡은 자들이 있긴 하군요. 그렇다면 저주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설명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이자벨라 황녀도 그랬잖아요. 이자벨라 황녀도 이단을 맹신한 게 아니라 복수를 위해 카얄과 거래를 했던 거였죠.”

    라크시스와 요르문은 시아 앞에선 언제나 백기를 들었다. 순식간에 발톱을 감추고 꼬리를 내린 두 마법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리암 블레어도 야망이 상당한 인물이죠. 그가 총리직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면 놀랄 겁니다.”

    “정치가 중에 야욕 없는 자가 있긴 하나?”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총리가 되고 싶다고 해서 총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보수당 총수면 뭐해. 의석을 다 빼앗긴 당에서 뭘 할 수 있다고.”

    요르문이 툴툴거렸다.

    “그게 문제였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곰곰이 곱씹고 있던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카얄은 리암 블레어에게 총리직을 두고 거래를 했던 걸지도 몰라요. 그 대가로 리암 블레어는 황혼 국교회에 자금을 대고요.”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닌걸요. 의원들을 모조리 신도로 만들어 의회를 장악할 게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요.”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리암이 황혼 국교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건 알아냈으나, 그가 어째서 이단에게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퍼부어가면서까지 카얄을 돕는지는 결국 밝혀내지 못했다.

    라크시스는 그 이유만 알 수 있다면 리암을 압박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 했다.

    유령선 건으로 리암의 약점을 잡고, 카얄에게 흘러 들어가는 자금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제게 전적으로 맡겨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나라에서 고대 마법사를 적으로 두면 살아남기 어렵겠구나.

    시아는 다시 한번 라크시스의 영향력을 상기하며, 다 마셔서 빈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쨌든 미스터 블레어의 치부가 밝혀진 건 레베카에게 여러모로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러자 요르문이 재깍 되물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님?”

    “미스 뮐러의 이야기라면 아마도 티 파티 이후의 일과 관련이 있겠군요.”

    역시 라크시스는 눈치가 빨랐다.

    시아는 맨덜랜드에 온 이후 짬이 나지 않아 하지 못했던, 황궁에서의 티 파티와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등 돌린 채 대화를 엿듣기만 하던 루드윅도 어느새 몸을 돌려 시아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새로이 장작을 먹은 모닥불이 생생하게 타오르며 추임새를 넣었다.

    시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요르문이 경악하며 뛰어올랐다.

    “미스 뮐러의 약혼자가 리암 블레어였다고요?”

    “응. 그랬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로렌시아 호에서의 일도 리암 블레어 때문에 벌어진 일이겠네요! 그자가 미스 뮐러의 정체를 카얄에게 알린 거예요. 역시 리암 블레어가 이단의 신도였다고요.”

    “아냐.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미스터 블레어는 레베카의 정체를 몰랐어.”

    레베카의 정체를 알았다면 그렇게 절절하게 구애하지 않았을 터다. 왜냐고? 리암 블레어의 태도가 바뀐 건 뮐러가의 상속자가 로드리치가의 혼혈인 메이드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이기 때문이었다.

    “으으, 그럼 미스 뮐러의 정체가 어떻게 카얄에게 새어 나간 건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리암 블레어가 제일 의심스러운데.”

    요르문은 생각이 실타래처럼 꼬여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라크시스는 다리를 반대로 꼬며 턱을 괴었다.

    “여러모로 수상하군요.”

    “라크도 그렇죠? 저도 이 일의 범인은 리암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특히 레베카 뮐러에게 그간 편지를 전달해 주던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점에서요.”

    시아는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단조로운 천장 무늬와 노란 가스등 불빛이 뒤엉켜 미로 같은 자국을 만들어냈다.

    어째 사건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일들은 그들이 숨어있는 카얄을 찾아내 저항불능의 상태로 만들면 끝나는 일이었다.

    광룡의 부활도 이단의 범죄도 없는,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 미래.

    그게 가능할까. 내가 정말로 모든 걸 바꿀 수 있을까?

    “아, 누님. 이거 받으세요.”

    요르문의 부름에 시아는 재깍 정자세로 돌아왔다. 그가 내민 건 레이디 켈튼의 앞으로 온 편지였다.

    말린 꽃잎을 왁스에 끼워 넣어 봉한 봉투에선 은은한 장미 향이 났다. 누가 봐도 숙녀의 편지다.

    마도 시대의 레이디 중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만한 사람이 있던가?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시아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알현식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은 레이디였으며, 라크시스가 무언의 압박으로 구혼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매일같이 무도회의 초대장을 뜯고, 꽃과 선물을 한 아름 안아 든 신사들의 구애를 받았어야 했다는 것을.

    다행히도 편지를 보낸 사람은 시아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레베카가 보낸 거네.”

    시아는 인장을 툭 뜯어 편지를 열었다. 편지엔 간밤에 자신의 고민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한참 읽어내리던 시아는 추신에서 레베카의 본론을 발견했다.

    [추신. 다음 달 초에 로드리치가에서 후원하는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려요. 자선 파티를 겸해서 열리는데, 대모님이 레이디 켈튼은 꼭 초대하라시지 뭐예요. 절 한 번만 도와주시겠어요?]

    어쩐지 편지 봉투가 두툼하더라니. 시아는 봉투에서 전시회 티켓 두 장을 발견했다. 보나 마나 라크시스와 같이 오라는 뜻일 터다.

    시아가 티켓을 내밀자마자 라크시스는 그 뜻을 알아차렸다.

    “레이디 로드리치가 수를 썼군요. 당신이 미스 뮐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는 걸 어젯밤의 고민 상담으로 알아버린 모양입니다.”

    “어차피 못 가게 될 텐데… 레베카에겐 미안하네요.”

    이번 시간 여행에서 남은 시간은 예정대로라면 길어야 사흘이 전부였다. 운이 좋아 더 오래 있는다 해도 지금까지의 패턴을 생각하면 다음 달까진 이곳에 있기 힘들었다.

    그리고 다음 시간 여행의 도착지는 지금으로부터 일 년 후인 3521년이었다.

    “우연히 생긴 고대 마법사와의 접점을 최대한 활용해 보려는 거겠지요. 레이디 로드리치는 오래전부터 종종 이런 식으로 절 떠보려고 했던 사람인지라.”

    라크시스는 이 역시 본인이 잘 처리해 보겠다고 말했다. 처리라고 해봤자 레이디 켈튼이 병에 걸려 저택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되었다든가 하는 변명을 둘러대는 것뿐이겠지만 말이다.

    때마침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저녁 식사를 이르게 한 탓에 시아의 배가 출출해졌기 때문이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트롤리를 끌고 들어온 풋맨은 늦은 시각에 신사 셋과 함께 있는 숙녀를 보곤 아무것도 못 봤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소리 없이 물러났다.

    시아는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듬뿍 올려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맞다, 요르문. 파장 감지기는 어떻게 됐어? 조사할 게 꽤 있었다며. 고장이라도 났던 거야?”

    “아, 고장 난 건 아니었고요. 처음엔 저도 누가 잘못 건드려서 꺼진 줄 알았는데…….”

    요르문은 말을 멈추고 일어나 객실 한 편에 쌓여있던 수건을 가져왔다.

    웬 수건?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수건이 아니라 둘둘 말려 수건처럼 두툼해진 그래프용지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요르문이 그녀의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잘못 건드린 게 아니었어요. 과부하가 걸려서 꺼졌던 거였어요.”

    저 작은 파장 감지기가 하루 꼬박 기록한 데이터가 이렇게나 많다고? 요르문은 능숙하게 종이를 풀어내 그래프가 요동친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과부하라는 건 예상값 이상의 파장을 감지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고요.”

    예상값 이상의 파장이라…….

    시아의 손끝이 떨렸다.

    “…그렇다는 건 설마 봉인을 발견했다는 거야?”

    “거의 그런 셈이죠.”

    확신을 가지지 않고선 가능성조차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 마류 학자가 이렇게 대답했다는 건, 요르문이 구 할 이상의 높은 확률로 여덟 번째 봉인을 발견했다는 것과도 같았다.

    찾는 데만 최소 수 개월이 걸린다고 했었던 봉인을 단 이틀 만에 찾아내다니! 시아는 흥분감에 손에 힘이 풀려 먹고 있던 스콘을 떨어트렸다.

    “거기가 어딘데? 진짜로 광룡의 봉인이 맞는 거지?”

    그러나 반색하던 시아와 달리 요르문은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혹시 벌써 봉인에 문제가 생긴 거야……?”

    봉인을 찾으면 제일 먼저 방방 뛰고 기뻐할 사람이 얌전히 있자 시아는 불안해졌다. 라크시스도 요르문에게서 이미 언질을 받은 바가 있는지 마찬가지로 애매한 표정이었다.

    요르문은 머뭇거리며 코끝을 긁었다.

    “문제가 생긴 파장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던 곳은 맨덜랜드 국교회의 교회 부지였어요. 교회 건물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요. 측정된 값이 틀린 게 아니라면 봉인은… 아무래도 땅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아요.”

    시아는 무엇이 문제인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해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일이 복잡해져도 한참은 복잡해졌다는 듯 앓는 소리로 첨언했다.

    “제국에는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죠. 주신 디아우스를 섬기는 국교회가 그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봉인을 찾아보려면 교회 부지의 땅을 파보아야 하는데, 그 위에 세워진 교회 때문에 상황이 난감해졌다는 뜻이다.

    “교회 건물 자체를 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이 나라에서 교회를 무너뜨리고도 멀쩡히 사는 건 꽤 어려운 일이 될 겁니다.”

    “땅을 파헤치기 위해 교회 건물을 사들여 무너뜨린다면 분명 이단 소리를 들을 거예요. 황제도 저희를 가만두지 않을걸요?”

    황혼 국교회가 그토록 세력을 불리고도 지금껏 국교회의 그늘에 숨어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제국은 이단에 예민한 나라였다. 공개적으로 교회를 손상시킨다면 고대 마법사라고 해도 비난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정말이지 뜻밖이어도 정말 뜻밖의 난관이었다. 보아하니 라크시스와 요르문도 당장 떠오르는 해결책이 없는 모양이었다.

    시아는 상황의 기구한 전개에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대체 봉인이 왜 그런 곳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