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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26)화 (226/292)

226화 

* * *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방금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요. 제가 보고 들은 게 사실이라면, 벤슨 경감님의 여동생은 지금까지 살아있었던 거란 뜻이잖아요.”

시아는 굳게 닫힌 검은 문을 바라보았다. 방금 떠나간 여자의 명령을 곧바로 수행하고 있는 건지, 168A번지 안에선 분주히 움직이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데이먼 포드는 또 왜 등장한 거고요? 방금 전 여자는 또 뭐고요. …설마 벤슨 경감님이 말씀하셨던 강령술사가 아까 그 여자일까요?”

어쩌다 끼워 맞춘 퍼즐이 딱 맞게 들어맞는 것처럼 찜찜한 것도 없다.

시아는 애먼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뤼스에서 사람들을 홀려 미라로 만들던 강령술사를 얼떨결에 찾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붉은 옷의 강령술사에 대한 건 고작해야 그자가 젊은 여자라는 것과 집시 같은 행색에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다시 말해 168A번지에서 나온 숙녀(달리 지칭할 말이 없어서 숙녀라고 했을 뿐, 시아와 라크시스 모두 그녀를 숙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와 말로만 들었던 뤼스의 강령술사를 동일 인물이라고 확신할 결정적 근거는 없단 소리였다.

하지만 인간의 육감이란 때때로 무엇보다 정확할 때가 있는 법이다. 시아는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여자에게서 익숙함을 느꼈다. 처음 본 사람이었는데, 마치 어디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벤슨 경감님이라면 강령술사의 얼굴을 알고 있겠지. 거스 벤슨에게 부탁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해 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시아는 곧 도리질을 쳤다.

애초에 거스 벤슨에게 이단과 관련된 정보를 죄 넘기지 않았던 건 그가 카얄과 황혼 국교회를 파헤치다 다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혹여 달리아 벤슨을 발견했단 얘기를 전한다면 거스는 눈이 뒤집혀 물불 안 가리고 맨덜랜드로 달려올 게 뻔했다.

‘지금의 달리아 벤슨은…….’

시아는 방금 전 달리아가 했던 행동들을 되짚어 봤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단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그녀의 정신까지 황혼 국교회에 물들어 있다면, 거스 벤슨에게 알려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걸 발견한 사람처럼 골치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는 아르카나의 창부라는 말이 신경 쓰이는군요. 사실 제 불길한 짐작이 틀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현관 부근에서 발소리가 났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달리아가 짐 없이 단출한 행색으로 나왔다. 마부가 한 박자 늦게 마차를 현관 앞 도로에 준비시켰다.

이윽고 시종으로 보이는 자들이 뒤따라 나오자 달리아는 그들에게 무어라 지시한 후 홀로 마차에 올라탔다. 시종들은 달리아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사라졌고, 약에 취해 현관 복도에 늘어진 남자들은 이전과 같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168A번지는 순식간에 빈집처럼 변해 덩그러니 내버려졌다.

골목의 그늘에 숨어 달리아의 마차가 완전히 멀어진 걸 확인한 시아가 나직이 물었다.

“라크. 쫓아갈 건가요, 들어갈 건가요?”

집의 규모로 보건대 남아있는 건 사용인 몇이 전부일 터다. 그나마 가장 위협적이고 번거로우리라 예상했던 적은 저주를 사용하던 붉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였으나, 그녀는 이미 리암 블레어와 가버렸으니, 나머지는 저주에 잠식된 잔챙이뿐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라크시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인 없는 성만큼 무력한 곳도 없죠.”

시아와 라크시스는 168A번지가 비어버린 지금이 적진을 기습할 최적의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문서들은 이미 가져가서 없겠지만, 그들이 깜빡 흘리고 간 단서들은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천천히 골목 밖으로 걸어 나갔다. 거리는 여전히 한적했다.

현관의 계단을 반쯤 오른 라크시스가 지팡이를 들고 현관문을 밀어 열려고 했던 때였다.

철컥.

리볼버가 장전되는 소리가 났다.

“어딜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불청객.”

라크시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제 뒤를 따라오던 시아가 당황한 얼굴로 그대로 굳은 채 서 있었다. 총구는 그녀의 뒤통수에 겨냥되어 있었다.

라크시스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시아에게 총을 겨눈 건 떠난 줄 알았던 달리아였다. 달리아의 발밑엔 찢어진 스크롤 조각이 뒹굴고 있었다.

달리아의 뒤로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시커먼 코트의 깃을 목 위로 잔뜩 올린 채 모자 밑으로 시체 같은 낯빛을 자랑하는 남자들이었다.

라크시스는 그들이 부둣가를 거닐던 보험사정관 D라는 것을 눈치챘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역시 이곳은 남대륙 회사와 관련되어 있는 곳이었다. 황혼 국교회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고 말이다.

‘제대로 찾긴 했군.’

시아에게 총을 겨눈 달리아 벤슨만 아니면 말이지.

라크시스는 시아가 제 뒤를 따라오게 한 것을 후회했다. 흔하디흔한 이동 스크롤의 마력을 감지하지 못한 것도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제 머리를 겨누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가차 없이 총구를 비틀었을 텐데.

라크시스는 오만하게 치든 턱을 살짝 내렸다. 행여 시아가 다칠까 봐 저자세로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다만 뻔뻔스러운 태도는 여전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지나가는 행인에게 총을 겨누는 것도 예의는 아닌 듯싶은데.”

“지나가는 행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계시기에.”

달리아는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을 당길 것처럼 손을 움직이며 냉소했다. 시아는 여전히 하하, 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달리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어, 미스 달리아 벤슨?”

시아의 부름에 달리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달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총구를 그녀의 머리에 더욱 가까이 댔다.

어떻게 이름을 알았냐는 미심쩍음과 적들의 교란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다짐이 뒤섞여 달리아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 반응으로 라크시스는 그녀가 진짜 달리아 벤슨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젠 상대를 떠볼 차례였다.

“그래요, 미스 벤슨. 사실 우리는 미스터 거스 벤슨의…….”

“당신이 라크시스 옌인가? 그렇다면 이쪽은 요르문 켈튼이겠군.”

달리아는 라크시스의 말을 잘라먹었다. 혹시나 달리아가 거스의 이름을 듣고 동요하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정신을 파고들 틈이 있을까 싶어 꺼낸 말이었는데, 달리아는 거스 벤슨이라는 이름을 태어나 처음 듣는 것처럼 굴었다.

“둘 다 들은 것과는 다르게 생겼지만.”

거기다 남장한 시아를 착실하게 요르문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레이디 켈튼이 황궁의 티 파티에 참석하느라 수도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기에, 시아 켈튼이 이 자리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둘 다 들은 것과 다르다.

라크시스는 달리아의 말에서, 자신의 머리카락 색을 왜곡시킨 마법이 달리아에게도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시아도 간파한 마법을 달리아는 모른다, 라.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라크시스는 곧 계단에 선 그대로 달리아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그녀의 머릿속에 침투할 준비를 시작했다.

“달리아 벤슨.”

“소개받지 않은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건 무례한 짓이지. 이제 보니 고대 마법사는 무뢰한을 이르는 말이었군?”

“그대의 오라비가 아직까지 그대를 찾아 헤매는 걸 알고는 있나?”

“나의 주인은 오직 어둠뿐이오.”

시아가 입 모양으로 작게 속삭였다.

‘라크, 미스 벤슨은 세뇌당했어요.’

동시에 바닥에 차가운 금속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아는 제 뒤통수를 겨누고 있던 서늘함이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달리아는 자신이 리볼버를 떨어트린 줄도 몰랐다.

라크시스의 작은 손짓에, 시아는 머리부터 피해 살금살금 달리아에게서 벗어났다.

달리아의 눈동자가 이지를 잃고 흐릿해져 있었다. 달리아는 환각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요르문 켈튼의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있다는 환각을 말이다.

시아가 움직이자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보험사정관들이 하나둘 총을 꺼내 들었다.

낭패로군.

라크시스는 혀를 찼다. 달리아에게서 시아를 빼냈더니 오히려 총구가 늘어났다.

보험사정관들은 달리아의 이상함을 눈치챈 듯했다. 그들은 시아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총구를 겨누었고, 당장에라도 총알이 날아올 것 같은 상황에 시아는 울상이 되어 움직임을 멈췄다.

그때였다.

“어떻게 알고 온 지는 모르겠지만, 잠자코 종말을 기다리시오. 위대한 어둠의 계획은 한낱 노예가 방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달리아는 선심이라도 쓰듯 라크시스에게 고했다. 노예라는 표현은 라크시스를 향한 것이었다.

얼마 전 갈리프의 기억에서 검은 머리의 어린 라크시스를 보았던 것이 불현듯 떠올라 시아는 순식간에 창백해졌으나, 라크시스는 그저 불쾌한 듯 보였다.

“그 위대한 계획이 고작 인간의 영혼으로 위태로운 목숨을 연명하는 것인가?”

“종말은 운명이오. 인간 노예의 죽음도, 갈리프의 절망도 모두 운명이지. 당신이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소.”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된 자들이나 할 법한 대사였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한 달리아의 말투에 시아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 노예와 갈리프. 그녀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걸까?

라크시스가 소리쳤다.

“너희들의 계획이 뭐지? 리암 블레어가 떠난 후에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수작 부리지 마시오. 우리는 존 베버와 다르니까.”

고대 마법사 못지않게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달리아가 빈정거렸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이미 총을 떨어뜨렸는데…….

시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라크시스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실소를 터트리며 시아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시아. 가까이 붙어요.’

‘공간이동이라도 하려고요?’

‘공간이동은 마법이 발동되는 시간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고.’

이 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무형의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보험사정관들의 총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저들의 총도 떨어트리게 할 순 없어요?’

‘동시에 저만한 인원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건 힘들어요. 그러다가 누구 하나 마법이 풀려서 당신에게 총을 쏘면 어쩌려고요.’

‘그렇다면 어떡할 건데요? 그냥 총을 맞고 라크의 치료를 받을까요?’

라크시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의술사라는 사람이 총상을 너무 가벼이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지금의 당신은 총에 맞아도 며칠이면 알아서 나을 테지만, 하……. 내 생각도 좀 해줘요. 당신이 쓰러져 있는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이 총을 맞아도 저절로 낫는다니. 라크시스가 한 이상한 말에 시아는 벙긋거리며 의문을 표했으나, 라크시스는 단시간에 바싹 말라 버린 낯으로 대답을 피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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